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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엄마
김정미 지음 / 꿈의지도 / 2021년 3월
평점 :
“다른 나라 가도 어떵 안 해(괜찮아). 넌 이탈리아랑 스위스 여러번 가봐시난(가봤으니까) 또 가면 재미없네, 엄마는 집 밖에만 나가면 아무 데나 좋으난 너가 가고 싶은 것으로 정해부러.”
“아니아니. 너 바쁘면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어디든 좋아. 너 편한 대로 해.”
“아무거나 먹지 뭐. 난 다 좋아.”
‘엄마’라는 역할자로서는 하나의 집단에 속할 수 있으나 누군가의 엄마로서는 그 모습이 모두 다를 것이다. 나는 익숙하게 소비되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사실 많이 낯설다. 내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원망과 결핍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한 점이 더 많다. 어머니는 자신을 희생하시지 않음으로써 나에게 죄책감이나 부채의식 또한 주지 않았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점이다.
모녀 관계에서 감사한 일들과 이유는 그것 말고도 차고 넘친다. 적극적인 희생을 마다하셨을 뿐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통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많았을 것이고, 쉬운 일이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어머니와 나는 데면데면한 관계이고 의견을 양보하거나 굽히는 법도 잘 없고 때로는 서로가 사는 방식을 못마땅해하기도 하면서, 테이블 맞은편 자리 정도의 거리를 잘 유지하며 지냈다. 즐거운 친구처럼 지낸 날도 있고 불편한 친구처럼 기억되는 날들도 있다.
부모님은 여행을 좋아하셨고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함께 가기 싫었던 주말여행도 빈번하게 다니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고3일 때 두 분이 3주간 여행을 떠난 일이다. 전혀 없을 법한 일도 아니고 수험생이라고 보약을 챙겨주는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살짝 기분이 상하긴 했다. 3주간 나 자신만이 아니라 6살 어린 동생도 돌봐야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런 적당하게 친밀한 관계라 법적 성인이 되는 날, 진지하게 손편지를 써서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하겠노라 알리기도 했고 꼭 참석해야하는 가족 모임이나 큰 일이 아닌 이상, 20대 초반부터는 구체적인 생활의 접점이 많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진학이든 유학이든 취직이든 간섭 하지도 않으셨고 나또한 의논을 드리지 않았다. 꽤나 바쁘게 살던 때의 휴가는 말 그대로 쉬는 게 목적이라 부모님과 여행을 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40대에 이르러 마주본 부모님은 낯설도록 약해지셨고 곧 연이어 큰 수술을 받으셨다. 연세에 비해 결과도 회복도 좋아 다행이지만, 거의 평생 살던 집을 떠나 고향 본가로 이사를 가셨다. 덕분에 내 일상 역시 급작스럽게 변했다. 거의 8개월간 주말을 온전히 혼자 보낸 적이 거의 없다. 주말에는 부모님을 뵈러 간다. 대단한 효도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들려준 적 없는 평생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유쾌하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서로를 온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온 타인으로 새롭게 느낀다는 것 또한 재미있다. 친구를 새롭게 사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가족이라서, 다 같이 늙어가면서 상당히 순화되어서 긴장감 없이 편한 것도 좋다.
그러니 내 어머니는 이 책의 인용문처럼 양보와 희생과 무조건적인 사랑과 가슴앓이의 대상은 아니지만, 마음 편한 여행이 가능한 시간이 오면, 건강이 허락한다면, 비로소 함께 긴 여행을 하고 싶다. 비록 예능프로그램 작가이자 여행사 대표인 저자처럼 섬세하고 센스 있는 준비는 못할지라도 이제는 나도 한 번은 어머니에게 다 맞춰가며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가 된 듯하다.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동료로서 친구로서 무리하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그럴 수 있을 듯하다.
"우리 가서 싸우지 말게이."
해준 것 없이 무례한 일들을 거침없이 시도하는 타인들을 오래 상대해왔으니, 따져보면 해준 것 많은 부모에게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말 같지도 않은 부당한 일들을 요구받을 때 내 부모도 내게 그런 적 없다는 것이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실제로 ‘내가 그런 일을 하면 내 부모가 크게 상심하실 거’란 이유로 거절을 한 적도 여러 번이다.
“단 한 번도 자식에게 ‘갑’이 되어본 적 없는 엄마를 딱 한번만 ‘갑’으로 모셔보는 거예요. 살면서 허구한 날 ‘을’로 살던 자식들이 유일하게 엄마한테만은 ‘갑’ 행세를 하잖아요. 그러니 엄마는 누구에게도 ‘갑’인 적이 없었을지도 몰라요.”

자신이 기꺼이 ‘을’이 되지도 않으셨지만 나를 ‘을’로 대한 적도 없는 부모를 ‘갑’으로 모실 재미난 기회가 부모와의 여행이 아닐까한다. 이 책은 여행을 떠날 때 함께 가져가고 싶다. 여행팁만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위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꼭 필요한 책이다. ‘가능하다면’ 여행의뢰도 <김정미 여행사>에 부탁드리고 싶지만.

“아무리 설명 잘하는 가이드가 있는 투어업체라도 다 소용없는 일. 어차피 (엄마 포함) 대부분의 어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누구에게도 너무 늦지 않게 그런 시절이 가능해지면 참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