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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ㅣ 365일 1
블란카 리핀스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2월
평점 :
한동안 지겹게 소문이 자자했다. 본 사람들도 안 본 사람들도. 폴란드 작가가 쓴 로맨스 소설을 영어권에서 영어판 내놓으라고 닦달을 했다니. 무슨 일인가 싶었다. 코로나로 현실 연애가 힘들어져서 그런가 근거 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19금이든 29금이든 연애세포가 사망하고 탈상까지 한 듯한 내게는 흥미 없는 이야기였는데, 재밌는 기록을 보고야 말았다,
로튼토마토지수 0%
이런 수치도 가능한가.
영화 평점 5.0 소설 평점 9.4
이 차이 뭡니까.
원작이 있는 영화를 맘 편히 신뢰하지 못하는 지병이 있는지라, 영화 안 본 편견 없는 깨끗한(?) 눈으로 떠들썩한 베스트셀러 작품을 읽어 보자 싶었다. 책이라면 읽히기만 해도 된다! 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주말 오후 읽기 시작하는 순간이 즐거웠다.
“베이비걸, 또 뭘 알고 있지?”
“넌 설명을 들을 자격이 있어. 꼭 알아야 하는 만큼은 말해주지. 중략. 넌 모르면 모를수록 좋아.”
“이건 제안이 아니야. 중략. 내가 원하는 걸 반드시 갖고 만다는 걸 아직도 몰라?”
“가끔 당신은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는 것 같아. 중략. 난 원하는 게 있으면 가져야 해. 그날이 아니었더라도 머잖아 널 납치했을 거야.”
“내가 명령할 때마다 자꾸 반대로 행동하려고 한다면, 중략. 네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그러니 그 점 명심하고 나에게 반항하지 마. 넌 벌써 이 싸움에서 졌으니까.”
너무 너무 웃긴다! 뭔가 시대착오적인 극강의 희극공연 대본을 보는 것처럼 웃긴다. 통증이 올 만큼 미칠 듯이 웃었다. 누가 들을까 난감하다. 큰일이다. 범죄 조직 보스가 당당히 범죄 예고를 하는데 웃기만 해선 안 될 텐데…… 이러는 내 정서와 법감정에 문득 고민과 의문도 생긴다……. 어쨌든 이러려고 읽은 게 아닌데, 29금 로맨스는 어디 가고 웃다가 얼굴에 29금 생길 듯.
비 온다는 사실이 좋아서 커피도 두 잔이나 마시며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 Jacqueline's Tears, 베르너 토마스 첼로 연주를 배경으로 듣고 있던 중이라, 이 모든 불화와 불협이 너무 웃긴다. 자, 자, 몰입해 보자.
“지금껏 그 어떤 여자도 나를 이렇게 만든 적이 없었어.”
드디어 나왔다! 이런 톤의 문장이 나오길 기다렸다기보다 기대했던 것 같다. 이 정도로 대표적인 궁극의 클리셰는 오히려 유쾌하다. 알던 유머인데 들을 때마다 크게 웃을 수 있는.
새롭지도 세련되지도 않았는데 전형적인 면들이 끝없이 등장하는 게 소리 내어 웃지 않을 도리가 없이 재밌다. 환상 속의 여자를 만나 납치 계획을 세운 남자가 뜻밖에 365일의 시간을 준다는 설정도 뭔가 싶고, 통계 상 0.0001% 정도로 예의 바른 제안이 아닌가.
“이 남자는 정말이지 모순으로 가득한 존재였다. 온화한 야만인이라고 해야 할까.”
대반전은 여주이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전남친은 해탈한 생불처럼 다 참아 주더니 소위 잘생기고 부유하고 매너 있는 갱단 보스에게는 겁도 없이 마구 대든다! 전남친과의 관계에서 뭔가 큰 깨달음과 내공을 얻은 것인가. 아님 다 지겨워서 이도 저도 싫다는데 자꾸만 사귀자고 제안받는 상황에, 어디 죽여 봐라 싶게, 미칠 듯 싫은 것인가. 저기, 모순으로 가득한 존재는 언니 같아요.
“와인 한 잔을 들고 온 주인 할머니는 이탈리아어로 무어라 말하며 내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럴 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도 뜻은 너무 잘 통했다. 남자란 하나같이 개자식이라 여자의 눈물이 아깝다는 이야기였다.”
마지막 반전! 480쪽이 넘게 밀당만 하다 끝난다! 결정은 빠르고 밀당은 길게! 로맨스 소설이란 원래 이런 것인지. 본격 로맨스 소설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안 읽어서 이게 당연한 건지, 새로운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황당해서 또 크게 웃었다. 이게 왜 29금인가. 혹시 영화만 그랬나. 성행위 장면들이 자주 나와서? 무성애자Asexual들을 제외하고는 발정기가 따로 없는 인간이 늘 하는 일 아닌가. 365일을 성행위 없이 밀당을 했으면 논란이 될 법하겠지만.
와..... 엄청 웃었다. 다 읽었으니 웃음도 멈추고 잠시라도 진지하고 재미없는 얘기를 덧붙이자면, 각자의 로맨스는 형식도 내용도 천차만별인 것이 당연하겠지만, 아무리 이 소설이 보고 싶은 장면들이 많은 현실과 동떨어진 해피엔딩을 향하는 순둥순둥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여주의 반응이 사랑인지 스톡홀름 증후군인지는 의심해 봐야 한다. 나는 확신한다, 그러니 나랑 사귀어야 한다, 말 안 들으면 가족도 죽이고 너도 좋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던 사람이니까.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29금이 맞다. 위험하다! 그래서 이렇게 많이 웃어 놓고 평점은 딱 절반만 드리겠다.
오늘 오전에는 영상을 시청했고 오후엔 책을 읽었다. 분명 세상에서 가장 느린 미디어, 매체는 책인데, 영상이 더 지루했다. 내게 한정될 경험일지 모르지만, 읽고 쓰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덜 지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