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시작은 아르테 미스터리 9
오리가미 교야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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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존재를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봄바람에 흔들린 적은 한 번도 없다취향 탓에 버릇 탓에 질환 탓에 봄이란 계절이 반갑지 않기 때문이었다꽃을 즐기는 기쁨보다 알러지로 숨이 턱턱 막히고 자다가 호흡 곤란이 오기도 하는 봄이 마냥 좋을 수는 없는 일고요하게 실내에서 책읽기 가장 좋은 겨울이 지나 뭐든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새 학기는 언제나 부담스러웠다단체 봄소풍게임도 장기자랑도 김밥도 매년 지루했다나를 제외한 세상 만물이 신나는 계절 같아늘 일정량의 소외감을 느꼈다.

 

그러다 한 여름 밤 문득 열기가 확 밀려나고 서늘한 온도 차이에 심장이 마구 뛰는 그런 순간이 있다잠들지 않아도 눈 뜨고도 마법 같은 무언가를 곧 목격할 듯이 심장이 요동친다아직 여름의 향기는 남아 있는데 이질적인 무언가가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불길하면서도 설레는 기분결국엔 계절을 차지하리라는 승리의 예감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여름에 상상해보는 가을.

 

그렇게 봄과 사랑과 연분홍과 라면에게서 정서적으로 먼 세월을 살았는데, 2021년 3월에 달달하고 애틋하고 마음 저린 감성적인 소설을 또 읽고 있다이번엔 극강 혹은 최고 레벨의 이야기인 듯하다. ‘단 한 번몇 마디 말밖에 나누지 못한 상대를 자신의 운명이라 믿고’,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왔지만’, ‘일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고 내던진다.’

 

가을은 좋아하는 계절이다.

달이 예뻐 보이고첫사랑과 만난 것도 가을이었다중략.

첫사랑의 얼굴은 9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얼굴뿐만 아니라 헤어스타일서 있는 모습밤바람에 나부끼던 옷의 주름까지도.

 

처음 만난 그녀에게 뭘 전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뭔가 말해야 한다는 마음만 앞섰다.

결국 입에서 나온 것은 단 한마디였다.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중략.

만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게 낫겠죠.”

 

9년 전과 똑같았다망설이면 늦는다다짜고짜 달렸다.

예의고 뭐고 따질 심정이 아니었다중략.

……당신은.”

도노를 보고 그렇게 말한 목소리도.

그때와 똑같다기억난다.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할 뿐이야중략.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만이라도 줘몇 년이 걸려도 상관없어.”

아카리에게는 짧은 시간이겠지만도노는 일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9년 내내 좋아했어앞으로도 평생 좋아할 거야.”

 

예컨대 이 세상에서 머무는 시간의 길이가 다르더라도 함께 있기를 원해서 한쪽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멋지다고 생각해."

 

2008년 12월 귀국 후 꽤나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잘 도착하지 못하고 지낼 때생일 선물로 받은 책 노희경 저자의 <지금사랑하지 않는 자모두 유죄>를 읽다가,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그래서나는 행복하지 않았다중략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말 죄책감이 들었다.

 

첫 눈에 반한 적도바짓가랑이 붙잡고 애원해본 적도하여간 무모하고 죽을 듯이 미친 듯이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이 없었다그렇다고 슬프거나 아쉽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자의 필력 탓인지 유죄라는 납득이 순순히 들었다그 후에 기회가 있으면 꼭(?) 유죄를 면해보리라 결심했지만…….

 

사설은 이쯤하고 첫사랑의 순간그 설렘으로 직진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주인공하나무라 도노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아슬아슬 애틋한 이야기이다그리고 연쇄살인범도 등장하는 미스터리이며우리에게 익숙한 흡혈귀와는 다른 인간과 비슷한 흡혈종을 통해 사회에 만연한 차별을 자극적이고 직설적으로 지적하는 판타지SF이기도 한 꽤나 복합적이지만 복잡하지 않은 소설이다술술 금방 읽을 수 있다이렇게 쓰니 연쇄살인쯤은 가볍게 읽어요라고 뭔가 엄청난 얘기를 한 것 같긴 하지만.

 

사람이 이 정도로 피를 흘리고도 살아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틀림없다여기는 살인 현장이다.

 

우리 이야기를 듣고 흡혈종의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중략흡혈종은 괴물이 아니야특이한 체질과 능력을 지닌 걸 빼면 인간과 다름없어.”

 

의도적으로 옮기려고 들지 않으면 남에게 옮지 않고그 병에 걸린 게 내 탓도 아닌데중략앞으로 위험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관리하려 드는 사고방식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존중 없이는 공존도 불가능하다.”

 

흡혈종과 헌터대책반이라는 설정에추리미스터리에 무게감 더 얹힌범인 추적과 위협을 즐기다가 곳곳의 복선들을 회수하는 소설적인 재미가 있다캐릭터의 반전과 범인의 정체에 작가가 전하려한 메시지가 녹아 있다교훈을 주고 싶어 하는 일본 소설의 특징도 별로 불편하진 않았다충분히 재미있었는데, ‘노스탤지어 호러’ 장르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엔 내 이해와 감상이 부족한 듯.

 

이 삶이 끝나는 순간네 곁에서 다시 태어날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My one and 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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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배운 표현 오위합취 : 5개의 행성이 같은 별자리 안에 모이는 현상사전에도 안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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