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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로 보는 동양고전
서승완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1월
평점 :
절판
어쨌든 70년 대 생인 나는 천지현황으로 시작하는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의 책들을 어린 시절 권장도서로 알고 자랐다. 그렇다고 훈장님께 종아리 맞아 가며 외우고 책거리를 하는 경험은 없었지만, 비공식적인 교재들로 내 삶에 함께 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어째서 하늘이 검다고 한 것인지 여러 어른들께 여쭸지만 누구도 납득이 갈 대답을 안 해주신 것은 오래 섭섭했다. 나중에 물리학을 전공하면서 다크 물질dark matter에 대해, 우주 공간에 대해 배우며, 비로소 오랜 질문에 답을 얻었다. 도대체 그 옛날 그저 하늘을 올려다 본 것만으로 어떻게 아셨을까 - 빛이 어둠의 부재라는 것을. 올려다 본 하늘 즉 우주의 모습은 검을 현, 어둠이라는 것을 - 하고 몹시 감동을 받았다.
어릴 적 교육이 가진 관성의 힘을 생각보다 더 강했는지,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사서삼경 공부 모임을 기웃거렸다. 논어를 함께 읽고 엄청 놀랐다. 단아하고 아름답고, 필사하여 외우고 싶은 내용들이 가득한 멋진 책이었다. 지금도 논어는 참 좋다.
우리 집 큰 꼬맹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중국어를 그렇게 신나게 배우고, 한자도 재미있어 하는데, 동양고전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굳이 천자문부터 낭랑하게 읽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조금 섭섭하기는 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대신 나는 무지한 이백이나 두보의 한시들을 좋아하게 된다면, 그 또한 멋진 일이라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만날 날이 있을 거란 생각은 물론 하지만, 이렇게 젊은(?) 저자가 유쾌하고 발랄한 기획으로 엮은 책이라면 어떨까 슬쩍 너지nudge를 부려본다. 이 목차 좀 봐, 전남친 공자래! 하고 막 무리를 해보면서.

어쩌면 혹자는 불경한(?) 짓이라 표정을 구길 지도 모르지만, 재작년에 20대 철학도가 마르크스 자본론을 엄청 재미난 만화로 출간한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것처럼, 이번에는 20대 철학자가 동양고전 입문서를 SNS 형식으로 해설한 것이 나는 반갑다. 권위를 요구하기 보다는, 참 좋은 책들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회자되는 일이 더 좋기 때문이다.

중학생이 세상을 보는 눈이란, 생각보다 건조하지만 적확할 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세상이 제일 시시해 보였던, 어른들이 사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던 시절이 그때였던 것 같다. 한 마디로 평하자면 이 책의 아이디어는 재밌지만 만약 공자, 맹자, 노자, 장자와 같은 분들이 카톡과 인스타를 했다면 시비와 욕설이 난무하는 악플에 시달리셨을 지도 모른다고 한다. 으음…….


어쩌면 나 역시 나이든 남자들이 뭘 자꾸 가르쳐 주려는 시도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고전을 책으로 접했을 때는 논어의 문장들이 몹시 아름다워 좋아하게 되었지만, SNS로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면, <노프사 노장>을 좋아했을 것도 같다.
물론 프사 - 프로필 사진과 정보 - 가 없다는 것만으로 좋아진다는 것은 아니다. 내용이 충실한 말과 글을 들려주면서도 프사에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 경우에 어떤 분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여타의 정보에 관심을 가지고 익히는 대신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는 기분 좋은 경험을 여러 번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 년을 구독하다시피 했는데, 어느 날 문득 보니 블로그 이웃조차 아니었던 경험도 있고, 이런 흥미로운 분도 계시구나하며 SNS상으로만 소통했는데, 알고 보니 대학 때 같은 수업을 들은 동창인 경우, 친구의 친구인 경우, 심지어 중학교 때 스승인 경우도 있었다. 불필요할 뿐 아니라 선입견만 굳히는 사전 정보들 없이 지금, 현재, 존재에 집중해서 만날 수 있고,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 느꼈다.
저자는 이렇게 아무런 프사도 설정하지 않고 비워두는 이들에게서 노자의 모습을 읽는다고 한다. 심지어 ‘노자’란 이름조차, 늙을 노에 선생님 자, 즉 ‘나이 많은 선생님’이고, 그 정체는 아직도 확실히 모르며, 이 세상에 남긴 것은 <도덕경> 단 한 권뿐이었으니.

노자는 “‘비움’의 중요성에 주목했고 비움은 원래의 나 자신, 순수한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략. 노자는 프사를 없앰으로써 자신의 ‘비움’의 철학을 녹여내고, 겸허한 마음을 내어 보이고자 한 것이다.”
단지 프사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도 의식에도 공간에도 ‘비어 있는 것’ 혹은 ‘채워져 있는 것’ 어느 쪽이 불편한 지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