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 풍문부터 실록까지 괴물이 만난 조선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 괴물 백과>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무척 재밌겠다 흥분했더니 이미 블로그 연재로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유명한 SF작가였다어린 시절 전래동화에 충격을 받아 마음이 멀어진 내게 한국의 괴물들은 대부분이 새로운 내용들이라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래도 백과사전 형식의 괴물 소개서란 캐릭터에 관심이 아주 많은 이들이 아니라면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어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귀중한 자료라곤 생각되지만 SF작가의 작품으로 새롭게 창조된 세상 구경을 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기분을 나만 느낀 건 아니었는지이야기를 입어 살아난 괴물들이 태어났다너무나 차분하고 단정한 목차를 보고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백성왕조해외이 얼마나 순차적인 예상 가능한 괴물 소개 방식인가! - 드디어 좀 더 다채로운 괴물 이야기를 들어보자신나서 읽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부터 열하일기까지 각종 사료에서 발굴한 스무 괴물너무나 구체적이고 실증적이다조선에 괴물이 살았던 건 확실하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시니나는 부럽기만 하다괴물이든 귀신이든 나는 뭘 목격한 경험이 없다귀신 만난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데막 싫어하는데도 굳이 만난 이들도 많던데막 만나고 싶어 하는 나는 왜 여직 기회가 없는 것인지귀신도 꺼리는 성격적 결함이 있다는 건가 괜히 막…….



조선괴물지도 정말 멋지다!

마음 같아선 당장 짐 싸서 시동 걸고 지도 따라 여행을 떠나고 싶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1, 2, 3장의 주제는 백성과 괴물들’, ‘왕과 괴물들’, ‘외국에서 온 괴물들이다. 1장을 읽다 보면 재미와 흥분은 사라지고 마음이 아파지는데당시 수많은 백성들이 이해하고 예측하기 힘든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괴물들을 자꾸만 만나는구나 싶은 느낌이 든다왜 이렇게 힘든지 이유를 알아도 자신들의 힘으로 바꾸지 못하니 반복되는 힘든 시간을 위로하고 가혹한 현실을 잠시 잊고자 괴물을 아주 열심히 믿게 되는구나 싶기도 했다.

 

소문으로 떠돈 괴물 이야기들은 임금님과 대신들을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나영웅을 찬양하는 서사시가 담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삼구일두귀(三口一頭鬼)’ 이야기에서는 조선 전기 전라도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재미로 하는 게임’ 캐릭터들이 아니라농업이나 어업과 관련된즉 생계와 관련된 괴물 이야기들이 많다간혹 도움을 주는 삼구일두귀와 같은 괴물이 등장하는데, “부자 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일기예보만 누가 알려줘도 좋겠단 소박한 바람에 속이 상한다굶지 않고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만 살면 좋겠다왜 이런 인간 같지 않은 괴물이 할 법한 짓들을 하냐고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조선 시대 중기의 이야기책 어우야담에는 고려 임금 우왕이 죽기 직전 자신도 용의 자손이라며 그 증거로 웃옷을 벗어 용 비늘이 돋은 피부를 보여주었다는 전설이 실려 있다이성계 일파가 고려 임금의 자손이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처형하려고 하자자신은 고려 임금의 자손이라고 항의하며 용 비늘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사는 일이 녹록하지 않은 것은 왕가의 임금도 마찬가지였는지권력이 집중된 곳이라 오히려 더욱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짓들이 남발했는가 싶다비참하기 그지없는 짧은 생을 살고제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 기막힌 비극적 인물인 사도세자의 경우에는 그럴법하다 싶기도 하지만성종과 같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성군이라는 임금들 중 한 분의 시대에도 괴물의 기록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도깨비는 무당이 섬기거나 무언가를 부탁하는 귀신또는 신령 같은 대상이다심지어 임금의 아들을 해치는 음침한 주술까지 들어주는 듯하다…… 영조 시대 무당과 추종자들은 도깨비를 전염병 귀신과 비슷한 괴물로 믿었다고 추측해볼 만하다.

 

영화 물괴를 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그 괴물의 연원이 연산군과 그의 사냥개라는 점 역시 설명이 흥미로워 몰입해서 읽었다친자식처럼 키웠지만 결국 남보다 못한 태도로 연산군을 쫓아낸 정현왕후의 죄책감과 더불어왕가 역시 권력 다툼에 언제든 실각하고 쫓겨나고 죽임을 당할 수 있었던누구라도 안전망이라곤 없는 삶을 살았던 시대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저자는 한 가지 더 유의미한 지적을 하는데왕가가 이 지경일 때원래도 살기 힘들었던 백성들의 형편은 어땠을 거냐고 그렇게 묻는다어쩌면 집권을 위해 다투던 서로가 서로에게 괴물 같은 존재였을 터이고이 모든 세력집단들은 자신들이 외면하고 잊어버린 백성들에게 괴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조선에 괴물이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라고 한 저자의 말이 의심할 여지가 없어진다.

 

부족하고 익숙하지 않은 괴물 지식이지만 3장을 읽다가 금두꺼비가 한국이 아니라 고대 중국의 항아(嫦娥)’ 설화가 원조라는 사실에 좀 놀랐다금두꺼비는 해외파 괴물이었다그래도 이 설화는 짐작할 수 있듯이 혼란하고 힘겨운 상황이 아니라 적어도 금으로 만든 두꺼비를 상상해볼 여유 정도는 있었을 때 만들어낸 것이라 짐작되니여가 시간이면 이야기 정교한 상상과 거짓말 를 만들고 들려주는 인간만의 그 독특함이 사랑스럽다.

 

그리고 우연히 며칠 전 읽은 소설 속에서 조선 태조와 세종의 여진족과의 외교 정책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바로 그 세종의 북방으로의 영토 확장 침략 으로 여진족 계통의 북방 이민족 원주민 -에서 유명하던사람 1만 명을 잡아먹었다는 만인사(萬人蛇)’ 괴물이 조선에 소개되었다 한다. 1만 명의 피가 뭉친 만인혈석(萬人血石)’을 품은 괴물은 그 지역에 얼마나 처절한 전투가 계속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들려주었다.

 

어쨌거나 역시 재미있는 소재들이다곽재식 작가 이전에는 한국의 괴물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멋진 모습들로 모이는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쓸쓸해지기도 한다식민지와 전쟁이란 어느 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뭉텅 베어내는 대단한 단절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삽화들이 참으로 고상하고 유려하고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고 묘하게 그리운 기분이 든다아주 어릴 적 조부모님이 입혀 주신 꼬까옷을 입고 아얌에 운혜까지 야무지게 차리고 친지들 댁에 인사를 다니던명절과 의복으로 한 조선 체험 시절이 기억나서 그런가보다.

 

인간만이 번성하고 무서운 것 없어 온갖 패악을 저지르며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세상이 신나지도 즐겁지도 않다코로나가 의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총체적 대응이 필요한 일이듯쉬운 일 별로 없는 모두의 삶에도 인간 말고 더 다양한 많은 존재들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대화도 위로도 나누면 좋겠다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태어나고 힘을 갖추지만인간에게 꾸짖음과 가르침을 줄 수도 있는 괴물들도 더 많아지면 좋겠다 싶다.

 

선하거나 악하게집 안처럼 가까운 곳이거나 외국처럼 머나먼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괴물들은 어떤 한 가지 기준이나 편견을 따르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