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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평점 :
거기서 잘 쉬고 여기로 돌아와 일을 열심히 하고 마음을 다잡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경마장의 말처럼 달리는 사람이 될 수가 없나 나는?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데 쓸 힘이 없었고 점심을 먹고 저녁에 뭐 먹지 생각하는 것처럼…….
여전히 회사에 가기 싫었고 회사에서 별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에 가기 싫었고 비슷하게 말도 잘되지 않았고 생활을 위해서라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훨씬 나았으므로 여름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 바에서 만난 여자는…….
[건널목의말]을 처음으로 읽으며, 문장에 담긴 기분이 전혀 공감이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프린트가 잘못된 것인지 난독증이 온 것인지 실컷 당황하며 일단 끈질기게 글자들을 읽어 보았다. 이야기의 방향이 휙휙 바뀐 모양을 화살표로 표시하면 중소 도시에 표지판을 다 세울 수 있겠다 싶었다. 누군가의 혼잣말을 따라 읽기란 이렇게 어려운 도전이란 걸 처음 배웠다. 그러고 보면 남의 혼잣말을 따라 읽을 것 자체가 처음이다. 뭐랄까, 불편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농구하는사람]에는 다짜고짜 최인훈의 ‘광장’ 속 인물들이 등장한다. 참고도서를 다 읽고 다시 오란 말인가, 오래 전 읽었지만 내 일상과의 접점이 적어 많은 내용이 기억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심통이 더 나는 것인지. 이 단편을 읽어 나갈 수 없다는 판단에 뇌가 ‘멈춤’ 신호를 내려 멍한 것인지. 그런 극도의 불친절함을 가능성이라고 짚어 보기도 할 만큼 정신이 나갔다. 그 와중에도 특정 문학 작품들을 이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은 재밌고 신기해 보였다.
[이미죽은열두명의여자들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직접적인 처벌. 생각은 많지만 어떤 것도 말로 글로 남길 수는 없는 기분이다.
[자전거를잘탄다]를 읽으며 덕분에 자전거를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덤불 속으로 넘어지던 순간이 지나고 잘 타게 된 전환의 순간. 비로소 잘 타게 되었는데 잘 안 타게 되었다. 한국의 도시들은 자전거 타기에 참 별로다. 의외로 기후도 별로다.
[매일산책연습]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무수한 장면들 중에서 사건의 명칭만 남은, 정말 오랜만에 들춰본 역사적 사건이 등장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의 고신대 학생들이 미국 정부가 5·18 광주 학살을 용인했다고 비판하며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한 사건.
오래 전 근현대사 공부를 할 때 요약된 몇 줄로 읽고 넘어간 것이 전부라서, 처음으로 단일 사건으로 찾아보았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기대와 선망이 한 점의 오점도 없었을 시대에, 1980년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쿠데타로 일으킨 신군부를 저지하기는커녕, 지지와 동맹을 강화하고 제5공화국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충격과 배신감에 비판을 넘어 여러 미문화원에 방화하는 격렬한 사건들이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기에 미국이 신군부의 군대 동원을 용인했다는 정황이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버마의 실시간 상황은 어떨지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 그칠 줄 모르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식인과 형제살해를 자행한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들인 우리들은 그 조상의 뇌로부터 거의 진화하지 않아서 뇌 자체는 여전히 아주 보수적이라고 뇌과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특별히 더 야만적인 사회의 모습을 볼 때면 수치스럽고 절망적이고 답답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8개의 이야기들, 길지 않은데 짧게 읽히지도 않는다. 소설집에 정식 논문의 분위기를 풍기는 해설과 참고도서가 붙어 있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갑시다!하며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쭉 전개하더니 막상 글로 전할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빼버리고 남긴 마음의 심상만 담겨 있는 전시회에 서 있는 기분이다. 내게도 예술경영을 전공한 친구가 있다. 그러니 선입견은 갖지 않겠다.
읽히는 것만 읽으면서도 무엇을 읽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지치기도 하고 나른해지기도 한다.
[우리의 사람들]에서 저자는 자신이 말과 추위를 힘들어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삽을 들고 차라리 말을 묻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말들을 흩어버리고 자신은 따뜻한 곳에서 추위가 사라질 때까지 동면을 하고 싶다고. 몇 문장을 따라 읽었느냐는 정확한 수치와는 관계없이 이쯤에서 나는 갑작스레 무언인지 이해가 된다(는 착각이나 위로가 생긴다). 갈팡질팡, 엉망진창을 멈추고 차라리 동면을 할 수 있다면, 스스로는 멈추지 못하는 활동들을 그렇게 멈출 수 있다면, 그 한 때의 삶의 기록은 깨끗할 수 있겠다 싶은 기분. 모든 힘든 과정은 다 지나가고 찬란한 봄 날, 맑은 물과 반짝이는 풀과 잎들이 산들거리는 그런 완벽한 날에 잠에서 깨고 싶다는 기분.
“매번 할 수 있을까? 이걸 왜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을 한다. 안 해도 나에게 아무 지장이 없는데 왜 하는 것일까. 매번 왜 하는지 어떻게 가능하게 할지 생각하면 괴롭다.”
어느해인가 어쩌면 여러해 동안 그랬다고 들은 것도 같은데 쓰는 것에 대한 압박이 너무 심해 뜰의 잡초를 다 뽑고 있었다고 했다. 중략. 맞아 맞아 그때 그 넓은 곳 전체를 다 뽑아버렸지. 뭔가를 강한 신념을 가지고 오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매번 끊임없이 이걸 왜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그때 직접 듣게 되었다.
저자가 아주 유능한 의사라면 나는 아주 말 잘 듣는 환자가 된 기분이다. 이 작품은 내 가독성과 문해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거란 결론을 내려는 무렵, 그 대신 나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설핏 감지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 결론과 정리가 없는 상태를 못 견디느라 왜곡된 결말일 가능성도 많지만.
아주 익숙한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들려주는 게임과도 같은 방식에 휘둘려서 그렇지, ‘어쩌면’ 저자는 단순한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 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삶’을 안다고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것이 누구의 삶이라도.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있는가. 내일이 미래가 모르는 시간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사는 일’은 누구라도 비슷한 반복이 반복되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는 이토록 느슨하지만 같은 운명에 속해있지 않은가, 라고.
가끔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다고 생각한다. 저를 위해 무언가를 한순간 포기해주십시오. 저의 고민을 떠안아주십시오. 나 역시 아주 가끔 누군가의 불덩어리를 삼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곧 사라지는 생각이다. 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먼 곳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것을 어두운 마음 없이 받아들인다. [농구하는 사람]
이 소설은 정신을 뒤흔들고 균열을 내는 독한 술이자 큰 망치이다.
마음을 단단히 하고 읽으시길.
무지하고 무능하고 미미한 존재인 자신을 여러 차례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