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원의 날 ㅣ 정해연의 날 3부작
정해연 지음 / 시공사 / 202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는 아이가 죽었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 자살하지 않으니까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이 동반되는 사건이라 끝까지 읽어 낼 자신이 없기도 한 소재가 유괴이다. 상상만 해봐도 상상에서도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다.
저자의 인터뷰 내용을 읽어 보니 작품을 쓰기 전에 실종 아동 찾기 협회장님의 인터뷰를 접한 내용이 있었다. 안타깝고 슬프게도 실종 아동 가족의 70퍼센트의 가정이 해체되고, 경제적으로 붕괴될 때까지 아이를 찾는 일에 몰두하다 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더구나 협회장님 본인 역시 20여 년 전 9살이던 딸을 잃은 분이라 한다.
작가는 실종자의 부모들이 주저앉지 않고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이유는 자신의 아픔을 다른 이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가늠한다고 한다. 그래서 <구원의 날>을 실종된 모든 아이들이 귀가하길, 국민의 관심과 정부의 지원과 수사 당국과 수사 전담 인력의 확충,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된 아픔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세상을 기원하며 썼다고 한다.
“여보, 얘 그냥 돌려보내면 안 돼. 우리 선우 찾을 수 있어. 여보, 제발 부탁이야. 우리 선우 찾아줘.”
짜릿한 추리스릴러반전물이 아니라고 알게 되니 더욱 묵직한 기분으로 읽게 된다. 게다가 책의 전개는 유괴당한 아들을 둔 부부가 유괴범이 되는 복잡하고 기막힌 상황으로 펼쳐진다. 부디 이 책의 결말은 안심할 수 있는 행복한 모습이길, 구원의 날, 부디 작가가 기원한 구원의 모습으로 구원 받는 이들이 실재하길 미리 바라며 읽기 시작했다.
가장 깊은 애정과 가장 참혹한 상처를 동시에 줄 수 있는 관계, 가족의 이야기는 늘 얼마간 불편하고 힘겹다. 연이어 보도되는 아동학대살해 사건들, 어쩔 수 없이 현실이 떠올라 묵직한 마음으로 치미는 화를 느끼며 동시에 무기력한 기분으로 읽게 된다.
가해자는 해당 피해아동에게만 폭력을 가한 것이 아니라 그 소식을 접하는 모든 이들을 상처 입힌다는 것을 짐작이라도 할까. 자꾸만 소설과 현실을 오락거리며 그렇게 읽게 된 <구원의 날>이다.
예원이 담당 형사의 차를 아이의 전단지로 가득 채운 봉고차로 들이받던 날, 남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예원을 희망 정신요양원에 입원시킨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얼마나 상상할 수 있을까. ‘형용할 수 없는’이란 표현은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을 위한 말일 것이다.
지지부진한 수사 끝에 단서도 없이 3년이 지나 결국 미제 사건으로 처리되었다. 해당 관청에서 분류작업을 끝났다고 부모의 고통도 마감될 리는 만무하다. 더욱 암담하고 어둡고 무거운 기분으로, 그래도 힘을 그러모아 찾아 나서야 한다.
현실의 실종 아동들의 부모들은 이 세상을 어떤 모습과 느낌으로 새로 경험하게 될까, 냉혹하고 척박한 곳일까, 위로와 도움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곳일까.
“이선우 군으로 추정하는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유류품 확인 부탁드립니다.”
어느 날 발견된 어린 아이의 백골사체와 실종 아동 선우의 목걸이. 시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탈진한 부모와 자신에게는 부재한 따뜻한 애정을 갈구하며 자해하는 또다른 아이, 이 셋이서 선우를 찾아 나서는 게 옳은 일일까, 너무나 불안했지만, 옳고 그름을 차분히 따질 여유가 없이 뭐라도 단서를 따라 길을 나서는 것이 당연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울림 기도원. 금평 살 때 다녔어요. 거기 선우 있어요.”
이 기막힌 상황에 종교단체가 배후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또 다시 현실과 교차되며 새롭지만은 않은 울화가 치민다. 그나마 폐쇄적인 사이비 단체들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풍겨 나오는 스릴이 추리 소설 장르로서 이 책의 문학적 재미를 더한다고 위로해본다.
저자의 집필 의도에 맞게, 이 작품은 두뇌 추리 능력을 요구한다기보다는 심리적 회오리를 느끼게 만드는 치밀하게 인간 심리를 파고드는 내용이 더 눈에 띈다. 물론 강렬한 소재와 전개와 밝힐 수 없는 결론의 카타르시스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손을 잡고, 놓고, 놓친다.
하지만 놓친 손은 다시 잡을 수 있다.
그걸로 우리는 용서하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 결국 용서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