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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것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2
서유미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2월
평점 :
1/5
<우리가 잃어버린 것>, 어쩌면 서둘러 읽게 되지는 않았을 작품이었다. 뭐랄까, 나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결혼, 출산, 육아, 경력단절, 구직활동을 쓰디쓰게 겪어낸 분들을 위해 작가가 차분하게 손길을 내민 작품일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나이 든 분들은 지금 좀 힘들어도 아이는 꼭 필요하다고, 우리 사회에 아이가 없어서 어떡하느냐며 걱정한다. 그런데 밖에 나가 보면 이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중략. 그러면서 왜 결혼을 안 하고 애를 안 낳느냐고 묻는다. 아이 문제뿐 아니라 그런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런 부조리한 일들에 대해 생각하면 피로해졌다.
2/5
2월이 시작되고 존경이란 단어 하나로는 거의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는, 그분들의 부재란 내 삶의 갖가지 구성들을 와장창 부수고 말, 가르치고 보살피고 맡겨진 역할 이상의 수많은 것들을 주신 두 분 스승들께서 타계하셨다.
먼저 떠나신 분의 부재조차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매일 확인하고 놀라고 절망하는 일을 온통 감정적으로 반복하는 중에 또 다른 연락이 밀치고 들어왔다. 한 순간이라도 늦춰볼 수도 말려볼 수도 싸워볼 수도 없는, 어떤 노력도 재능도 가진 것도 다 무의미한, 닥치는 대로 당하는 이별, 연이은 사별이었다.
가까이 사는 친구가 금방 울 것 같은 얼굴로 찾아와 먼저 읽어 봤다며 조용한 위로처럼 책을 건넸다. 황망한 마음에 고인 슬픔이 조금만 줄어 네 손바닥 위에 올릴 수 있는 이 작고 고운 책처럼 257g이 되길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무연탄 발전으로 생산한 전기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232-257g/km 기저질환이 없는 노후건강을 위한 탄수화물 섭취권장량이 257g 이하 4,200원 할인 판매한다는 맛은 그저 그렇다는 즉석비빔밥 내용량이 257g 중고판매상품으로 나온 윌슨테니스라켓이 257g 궁극의 포켓터블 스냅용카메라 무게가 약 257g 세상엔 257g인 것들이 많네 이유도 의미도 없이 화면에 띄워보았다.
3/5
표지 그림을 오래 보았다. 풀지 못하면 내용을 들여다볼 수 없는 퍼즐처럼, 말이 되게 짐작해보고자 이해하고자 이리저리 애를 썼다. 함의들이 가득할 거라는 강박적인 느낌에 편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저 뾰족한 칼을 든 이는 사람일까 인형일까 한 명은 사람이고 한 명은 인형인가 다른 자아인가 딸인가 뾰족해 보이지만 나뭇잎을 뭉친 것만 같은 칼날은 무엇일까 정면을 향하도록 왼손으로 들고 선 이유는 무엇일까 상자 옆면에 앉은 고양이는 기울어진 차원에 존재하는 걸까 검은 고양이는 상자 밖을 벗어난 존재인가 나무가 받치고 있는 이 상자는 어떤 세계인가 숨 막히게 작은 사적 공간인가 열려 있는 상자인데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건가.
감상 훈련이 부족해서 이야기들이 들어맞지도 연결되지도 않았다. 아티스트 역시 내용을 읽고 표지 그림을 만들었을 수 있는데, 읽지는 않고 왜 머뭇거리는 것인지, 본질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기 전 미적거리는 이런 버릇은 언제부터인지, 시작하기를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4/5
부족한 문해력이 간혹은 더 부족해지기도 하는지 책 소개를 읽고 받은 인상과는 촉감이 다르게 읽히는 문장들을 많이 만났다. 결혼, 출산, 육아, 경력단절, 구직에 대한 하소연과 속 풀이를 진하고 풍성하게 담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경주라는 인물의 상실의 계기가 그랬을 뿐, 어떤 계기로 무엇을 잃어버린 누구이든, 모든 상실은 발생하는 순간은 감당하기 힘들고 속절없이 당하고 나면 결과를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오래 지켜본 시선이 느껴졌다.
경주는 막막하다는 말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앞과 뒤, 양 옆을 둘러봐도 열고 나갈 수 있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쳐지고 어떤 회의가 끼어들까봐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문득 낯이 화끈 뜨거워지며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난데없이 닥친 불행으로 다치는 사람살이의 아픔, 누군가의 그 틈이 더 벌어지기 전에 실체로 다가가서 메우고 품으며 살자’했던 서유미 작가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취재 기사처럼 특정한 상실 사건을 다루는 문장들을 한가로이 수집했을 리가 없는데.
인생이란 얼마나 이상한지, 여기에서 저쪽을 보면 그럴싸해 보이고 고통이나 그늘을 짐작하기 어렵다. SNS는 그런 착시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기어이 접속해서 그 온도차를 경험했다.
인간도 인생도 원래 이런 거니 마음 편히 가지라는 위로나, 패배감이나 죄책감에 마음이 패이고 녹아내리는 이들에게 돌파구를 안내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허정거리며 나아가는 길에 걷는 속도가 비슷해 우연히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동행처럼, 내가 있을 장소와 공간을 찾거나 마련하지 못해 몸 둘 바를 모르는 이의 옆 자리에 조용히 앉는, 작가는 그런 연대와 연결을 만드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을 표현하는 일을 하지 않아 줄지 않고 딱 그만치서 경주가 서 있는 거리가 쓸쓸했다. 여유롭게 나이를 탓하며 이미 꽤 오래 전에 말로 자신을 충분히 설명해서 친밀감을 쌓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느꼈으면서. 홀라당 뒤집어 보여줄 수 있는 가방 속 같은 거라면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할까, 아쉽고 피로하다는 게으른 변명도 자주 했으면서. 그래도 뭐라도 물어 보고 날씨 얘기라도 꺼내보라고 경주에게는 소곤소곤 귀엣말을 전하고 싶었다.
운이 좋은 이들은 그런 시기 - 죽도록 쓸쓸하네, 외롭네, 허전하네, 막막하네 - 를 겪고 나서, 잘 몰라도 확실한 친밀감을 느끼는 상대를 알아보는 능력이 발현되기도 한다. 그냥 아는 거. 순간의 눈인사로, 목소리로, 행동으로, 간단한 말로, 짧은 글로, 무엇으로든. 차곡차곡 겪어 본 감정의 결들이 빅데이터처럼 순식간에 종합적 판단을 내리고, 직관이라 부를지 운명처럼 느낄지 선택지만을 남겨 준다.
이 작품에서 참 중요한 요소가 공간, 장소들이라는 걸 이해하고 나니, 경주와는 겹치거나 비슷한 장소를 공유하지 않는데도, 어느 날의 내 일상을 관찰한 것인가 싶은 당혹한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 줄줄이 이어진다는 모순적인 느낌을 받았다. 대상 인물의 일기장도 읽어 보았나 싶게 반쯤은 잊거나 흐릿해진 심정을 속속들이 되짚어 내기도 한다. 경주가 어떤 장소에서 어떤 생각을 할 때마다 나도 잠시 내 현실에 있었던 그 장소로 이동해서 하던 일을 하고 느끼던 것을 오롯이 느끼는 복기체험을 하기도 했다.
하루가 먼 우주 속으로 사라지며 소멸하는 건지 새롭게 시작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시간을 다시 돌린다면 어떤 부분을 바꿔야 할까.
무엇에 홀렸나 싶은 헛헛한 마음 한편에도 누가 나를 재미 삼아 엿봤구나, 하는 불쾌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작자는 연신 그랬구나, 그렇지, 그랬을 거야, 라고 공감하는 내내 쉬지 않고 살피고, 닦고, 씻고, 다듬고, 솜씨 좋게 수선해서 환한 웃음과 함께 보여 주고는, 뭐든 잃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모든 기억들을 곱게 개켜서 건네준다.
뭐라 말할 수 없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특정한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도 아닌, 그냥 어떤 순간을 지나가는 길이 고단해서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어른이 되어도 눈물로, 우는 일로만 속엣 것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시기를 지날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중략. 인생을 산다는 게 그 접힌 페이지를 펴고 접힌 말들 사이를 지나가는 일이라는 걸,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사이여도 모든 것을 같이 나눌 수도 알 수도 없다는 걸, 하루하루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해나가다 가끔 같이 괜찮은 시간을 보내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가 강력하면 할수록, 유일하게 필요한 그 순간에 말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해서, 자신에게는 후회로 상대에게는 오해로 전달되는 시간들이 반복되는, 그러면서 서로가 잃어가는 것들도 많아지는 경주를 가만 지켜보며 읽는 일은 아프고 안타까웠다. 아프고 쓰린 모양으로 지속되는 삶을 살면서 무언가를 천천히 잃어가는 일이 삶 그 자체라고, 그걸 알아가는 게 슬프기만 한 건 아니라고 작가는 다정스레 말을 건넨다.
경주가 ~ 하게 된다면, 이라고 가정한 것들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배신한 것이 아니라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별 볼 일 없다는 걸 깨닫는 방식으로 그녀를 실망시켰다. 중략. 실제로 만난 현실은 대체로 볼품없었지만 늘 그렇거나 완전히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한 비밀이나 놀라운 장면을 숨겨두었다가 완전히 절망하려는 순간에 내밀기도 했다. 그 예외성이 삶 속에서 가정법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도록 도와주었다.
삶의 중요한 시기를 지날 때마다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이제 누군가와 가까워질 가능성은 별로 없고 친구라 해도 좋을 만한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것도 어려웠다. J가 자신을 배려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서운해하는 것보다 자신 역시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이해하고 지나가는 쪽을 선택했다.
5/5
경주야, 살살 체로 걸러서 위에 남은 것들은 모두 반짝이고 맘에 들고 행복한 미래를 보장하고 온전히 내 거!라는 그런 성인됨을 축하하는 의식이 모두의 권리로 국경일로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체 아래로 흘러내린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다면. 이런 상상이 정신 승리에 준하는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라면 얼마나.
경주는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주야, 그다지 긴 시간을 살아보지도 못하는 한 개인이 살면서 챙길 수 있는 것은 얼마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망각이 쉼 없이 필요할 리가 없지. 지혜를 획득하지도 해탈을 맛보지도 못하는 우리지만 선택했다면 이후의 후회는 필요가 없다. 상실처럼 선택 또한 어떤 고립이고 단절일 테니.
경주는 그들에게 묻는 대신 자신에게 물었고 그들에게 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지나쳤다. 오랫동안 혼자 짐작하고 헤아렸다. 자신을 설득하는 동안 질문의 공소시효가 지나가버렸다.
너무 많은 조건들을 일일이 확인하지 말고, 뭐가 되었든 고심한 끝에 멍청한 선택을 하느라 힘겨웠을 자신을, 바로 뒤따를 상실을 예감하지 못하고 실수를 거듭하는 자신을 잠시 들여다 봐주자. 그렇게 잠시 이 시기를 지나가자.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