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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13
존 맥그리거 지음, 김현우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몇 페이지 읽지도 못하고 낭패감이 들었다. 낯선 장소에서 허둥거리듯, 낯선 얼굴이 분간되지 않듯, 낯선 목소리가 들리지 않듯 그렇게 눈에서 머물다 정리되지 않는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다. 그냥 읽으면 되는 것인지 뭘 기억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몰입하고 공감하고 싶은데 안전선 밖에서 보기만 하시오! 란 지시를 받고 선 기분이다.
실종 사건이 발생한 1년, 당연히 이 암울한 시기에 대화란 부재해야 한다고 작가는 작정을 한 것일까. 마음이 무거워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 시기라고 설명하는 것일까. 내가 느끼는 이 긴장 역시 작가의 안배일까, 아니면 선 밖에 선 채로도 이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에 어떻게든 동조한 것일까. 나는 결국 의지가 될 만한 음악을 틀었다.
모든 것이 멈춰 마땅할 것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지만 일상은 멈추지 않는다. 일상의 한 겹도 찢어 내지 못한 이벤트지만 간혹 긴장과 죄책감을 불러내기는 한다. 시간은 무감하게 흐른다. 선택이나 행동이 모두 인과관계로 설명되지도 명쾌한 결말로 수렴되지도 않는다. 이 세계가 우리의 현실과 가장 닮은 것인가 싶은 생각에 머리를 내젓고 싶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삶도 충분히 복잡할 것인데,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삶을 차곡차곡 축적해서 압축한 문장들이 결국에는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삶이란 총체를 가늠하게 해준다, 는 것을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별개의 문제일 뿐이다.
어떤 대단한 일이 있다 해도 끊임없이 무언가가 일어나는 삶이란 그 모든 것을 손쉽게 싸안고 오직 전진할 뿐이다. 사람들은 살아서 사라지기도 죽어서 사라지기도 하고 그들 중 절대 찾을 수 없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이제 그만 수색을 멈춰 달라’는 유가족의 최종 결정은 단 하나의 엄정한 사실, 수색하는 이들의 인생도 다른 모두의 인생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니 누군가의 실종은 상실로 남겨 두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목격하는 현실 역시 그렇다. 판데믹에도 세계인의 삶은 어떻게든 이어지고 지구가 자전을 멈추지 않는 한 시간 역시 멈추지 않는다.
사랑, 이별, 성공, 실패, 친절, 폭력, 열정, 피로, 인내, 실망, 반복, 단순함, 안전함, 기쁨, 지겨움, 소통, 상실, 고통, 그리고 다시 오늘이 되는 내일, 안도감. 저수지 13의 13, 목록의 1부터 13 장, 1년씩을 다루는 각 장에는 열 세 달, 13개의 문단이 반복된다. 매해 수미상관 불꽃놀이가 반복된다.
이러한 반복이 이어진다는 것이, 일상을 이어나갈 힘이 남았다는 것이, 사람들이 실종 소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하는 걸까. 언젠가 결정적 증거가 나오면 실마리가 풀리면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함께 찾아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와 희망을 잃지도 잊지도 않고 기억하는 일에 담아 두고 싶다.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기나긴 투쟁 속에서
우리의 기억은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다.
긴즈버그
1년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사라질 당시에는 열세 살이었다. 후드가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검은색 진, 캔버스화 차림이었다. 지금은 키가 152센티미터보다 클 것이고, 헤어스타일은 물론 머리 색깔도 달라졌을 것이다. 수사는 계속 진행 중이라고, 경찰 대변인은 분명히 말했다.
아이들은 베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그 아이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점들에 근거해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들이 했을 행동과, 자신들이 아는 주변 풍경에 근거해 추측을 했다. 아이들은 중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 아이와 함께 보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들도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고 느꼈다.
2년
마을에서는 아이 어머니가 오래 머무를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발견되어 이 모든 게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낮은 길고 고요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언덕길을 걷는 것만으로 죄책감이 느껴질 때가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죄책감을 떨쳐내려고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헌터 저택 주변을 피해 다니면 도움이 되었다. 기분이 그랬다.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아직 그 집에 있었다. 중략. 종종 나타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중략. 늘 남자였다. 그런 사람들은.
그녀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자신이 지금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떤 아침에는 완전히 혼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은 너무 멀리 계셨다. 친구들도 너무 멀리 있었다. 마을에는 아무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최근 공개된 비디오에서 아이 엄마는 벡스라고 불렀다. 비디오에서 소녀는 웃고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3년
사람들은 그 아이를 찾고 싶었다. 그 아이가 안전하다는 걸 알고 싶었다. 거의 모르는 아이였지만,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제임스, 어머니가 말했다. 이건 중요한 일인데, 그 애 실종되던 날도 만났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기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았다.
그와 아이 어머니가 이혼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 무렵 그에 대한 목격담도 늘어났다. 저수지 가에서, 채석장 끝에서, 짐말용 다리 아래서, 늘 멀리서만 눈에 띄었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4년
나는 그냥 그 아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았으면 좋겠어.
후드 달린 흰색 상의가 황무지 고지대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중략. 실종된 여자아이의 어머니가 상표와 디자인을 확인했다. 과학 수사팀의 조사에 몇 주가 걸렸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중략. 포괄적인 수색 작업이 벌어졌지만, 더 이상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114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이제 열일곱 살이 됐을 테고, 경찰에서는 현재 모습을 컴퓨터로 합성한 이미지를 공개했다.
5년
제임스 브로드는 결국 로하에게 베키 쇼 이야기를 했다.
제임스는 이제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실종 전해 여름에 모두가 그 아이를 만났다고, 그는 말했다.
6년
아버지는 린지가 떠나면 빨래는 누가 하냐며 대학 이야기 자체를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남자 형제들은 에든버러에서는 영어를 거의 쓰지도 않는데, 뭐 하러 영문학을 배우겠다고 거기까지 가냐고 물었다. 중략. 그리고 자신이 떠나고 나면 어머니가 자신이 하던 집안일까지 모두 떠맡게 될 거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그 문제를 상의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도를 많이 했지만, 아이가 정상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정상’ 같은 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중략. 남편이 이런 사실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보통은 술을 마시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거칠게 닫는 식이었다. 아니면 그냥 쉬는 쪽이었다.
7년
미리 알리지도 않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존스씨가 말했다. 개인 보일러실이 아니잖아요, 존스 씨, 절대 못 물러납니다. 그가 말했고, 기술자들은 다른 날 다시 오겠다고 했다.
실종된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사진에서 여자아이는 카메라로부터 고개를 반쯤 돌리고 있어 마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것처럼, 어디 다른 곳에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스무 살이 되었겠지만, 그녀는 늘 여자아이라고 칭해졌다.
전남편을 본 사람들은, 그가 그런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몸집이 아니었고, 그런 유형의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심지어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난 후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 말들 때문에 그녀는 한동안 그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중략 그는 늘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의 얼굴에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팔이 두 번 부러졌고, 어깨가 탈골된 적도 한 번 있었다. 병원에서는 그런 부상에 대해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없으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람들이 그녀를 야단스럽고, 시끄럽고,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가 살을 빼고, 체력을 기르고, 옷을 가려 입고, 큰 소리로 웃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음식을 먹지 말고, 다른 친구들을 사귀고, 더 좋은 엄마가 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로한이 왜 떠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그때 로한은 열두 살이었다. 어떤 상황인지 아이가 그녀보다 먼저 파악한 것 같았다.
8년
8년째가 되니 읽는 나는 더 초조해진다. 마치 집중력을 흐리기 위해 고의로 배치된 장치들처럼 몇몇 인물들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결국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정리되는 인물이 없다. 삶에 깔끔하고 분명한 일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었냐는 냉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규칙적인 자판 소리만 계속되는 문장들에서 여전히 대화와 설명은 구분되지 않고, 이 소설은 주인공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일상과 확연히 구분되는 ‘사건’이었던 실종 역시 언제부턴가 태연한 일상인지 여전히 사건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른다. 실종된 부모의 대화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감정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
아동 포르노 혐의로 기소된 남자 이야기를 다룬 지역 뉴스가 나왔다. 중략. 경관 한 명이 본 사건은 실종된 여자아이와는 관련이 없다고 했다. 법원 건물로 들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나왔다. 머리 위에 스웨터를 덮어 쓰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존스씨의 얼굴을 알아보는 일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9년
작가는 행동과 상황만 관찰하고 묘사한다. 실종된 건 소녀만이 아닌 듯하다. 모두가 실종 상태인 듯 살아간다.
마틴은 차를 타고 버려진 채석장으로 가서 망치로 자신의 컴퓨터를 박살 낸 다음, 불에 타서 형체만 남은 조각들을 자동차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아이들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여전히 폐는 작지만 아이들의 몸은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중략. 그는 자신이 그 세 사람을 받치고 있는 것 같은, 그 거실과 집을 받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대단히 능력 있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과, 이런 상황을 전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실종된 여자 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여전히 살아있다면 지금은 키가 거의 180은 됐을 것이다. 중략. 사건은 계속 수사 중이라고 대변인이 말했다. 검은색 진과 방한 조끼, 후드 달린 흰색 상의는 이제 너무 작을 것이다. 당시의 신발을 신으면 솔기가 터질 것이다.
10년
존스는 잠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 어떤 짓도 저는 하지 않았어요. 실수였다고요. 컴퓨터가 뭔가 잘못된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 다 필요 없으니까. 그는 힘을 주고 선 채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순간 그녀는 두려웠다.
여자아이가 실종된 지 10년이 지났고,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후드 달린 흰색 상의와 진청색 방한 조끼 차림이었다. 지금이면 스물세 살이 됐을 것이다.
몇 번이나 이 문장을 썼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문장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에 홀린 듯 자꾸 쓰며,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란 서글프고 아픈 문장들이 반복되는 기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일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결국 이 소망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11년
제임스는 여자 친구를 황무지로 데려가 실종된 여자아이 사건을 이야기해주었다. 여자 친구는 귀 기울여 듣고 나서, 제임스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람들이 늘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12년
건물들은 전소했고, 다음 날 아침까지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실종된 여자이이의 아버지가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는 알리바이가 확실한 것 같았다. 경찰이 확인했다. 그 남자에게 그런 걸 물어보러 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마틴이 말했다.
13년
실종된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화재 문제로 다시 한 번 조사를 받았고, 체포되었다.
그들은 주차장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질 예정이었고, 세 명은 먼 길을 가야 했다. 아직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실종된 여자아이는 아직 잊히지 않았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리베카, 베키 혹은 벡스였다. 그 아이를 찾아보았다. 중략. 소용이 없었다. 여전히 모두들 그 아이에 대한 꿈을 꿨다.
실종 당일에 그 아이를 찾는 꿈들이 있었다. 어스름 무렵에 황무지에서 아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부모에게 데려다 주었다. 꿈속에서 여자아이의 부모는 감사하다고 짧게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침대에 누운 잭슨씨는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 고요했고, 모두 빛났네.
기억은 저무는 해와 더불어 매년 더 흐려지고, 남은 기억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른 장면들로 저장된다. 모두가 범인인가 싶은 순간들도 있고 모두가 이 사건과는 무관한 다른 비밀을 숨기느라 전전긍긍한 건가 돌발적인 의심이 들기도 한다.
문장으로도 만나지 못한 실종된 소녀는 끝까지 이야기의 주인공도 되어 보지 못하고 어디로 사라진 걸까, 마음이 많이 아프다. 매번 다른 아이들처럼 나이를 먹고 머리카락이 자라고 키가 자라고 있을 거란 문장들은 업데이트 되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서 나타나지도 찾아 데려오지도 못했다. 구체적인 실물 증거가 아무 것도 없으니, 상상 속에서마저 존재할 수가 없다.
소녀가 실종되고, 그 부모의 목소리가 실종되고, 마을 사람들의 삶에는 실종된 소녀의 이야기가 채워졌다. 빼앗긴 기억 없이도 우리 모두가 상실하며 살아가는 것들은 무엇일까, 얼마나 자주, 많은 것들을 잃고 잊고 삶은 이어지는 걸까.
밤이면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있을 만한 곳에 관한 꿈을 꾸었다. 아이가 황무지를 따라 걸어가는 꿈에서, 아이의 옷은 젖어 있고 피부는 거의 파란색이었다. 맨 처음 아이를 발견하고 담요로 감싸서 안전하게 데려오는 꿈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