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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속성 - 사람은 어떻게 시장을 만들고 시장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레이 피스먼.티머시 설리번 지음, 김홍식 옮김 / 부키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정보가 완벽할 수 있는 방식은 단 하나뿐이지만 정보가 불완전할 수 있는 방식은 무수히 많다.
경제, 경영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가, 뜻밖에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호감’이 생겼다. 한 학기 배정된 윤리학 수업 중에 윤리학의 태동이 경제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이다. 혹시 저만 몰랐나요.
내가 오래 이미지로만 이해했듯이 경제는 상거래 기술만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 애초에 경제관념이 필요했던 이유는 인간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둘러보고 재화가 한정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나눠 쓸 것인가, 이것이 경제학의 최초의 과제였던 것이다. 나눠 써야할 근거와 방식을 정하려니 ‘윤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무지와 오해로 인해 속물적이고 천박해 보이던, 왜 굳이 대학 내에 학문 대접 받으며 존재하는지 정확히 몰랐던 경제학이 순식간에 삶에 근원적이고 중요하고 본질적인 가치와 의미와 역사를 가진 주제로 격상되었다. 인간을 살리는 일, 살림살이 - 일인 가정이건 국가이건 글로벌 공동체이건 - 를 이해하려면 경제를 알아야했다.
게다가 경제학은 언어로 수학을 사용한다. 인류 사회에서 어떤 근거(윤리)로 한정된 재화를 최선의 방식으로 나누어 최적의 생존을 도모할 것인가, 란 주제를 수학으로 표현하다니. 감동적이고 감탄스럽다.
폴 새뮤얼슨은 〈경제 분석의 기초〉를 통해 경제학을 더 이상 말이나 추측이 아니라 엄밀한 수치와 공식에 근거한 과학적 학문으로 자리 매김하는 수학 혁명을 이끌고, 경제학이 세상을 지배하는 길을 연다.
경제학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을까: 수학 혁명과 게임 이론, 일반 균형 이론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근본적인 진실은 그것과는 무관한 잡동사니에 가려 있기 마련인데, 경제학자들은 그 잡동사니를 걷어 내는 데 필요한 도구로 수학을 사용했다.
달리 말해 그들은 수학 덕분에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아가 그처럼 ‘군살을 걷어 내는’ 수학적 접근 덕분에 경제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세상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를 제시할 수 있었고, 이후 여러 세대의 기업가들은 이론의 뼈대에 근육을 붙이는 식으로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도구를 확보했다.
수학을 도입하는 이 변화 덕분에 경제학은 결국 세상을 장악할 수 있었다.
최초나 근원 타령하는 환원주의적 이야기는 그만하고 책으로 돌아오면, 저자들은 현재, 현대 사회의 전자상거래에서 플랫폼, 공유경제에 이르는 경제의 변화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묻는다. 그리고 그 이유가 기술(테크놀로지)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즉 기술결정론을 주인공에서 조연으로 재배치한다. 특히나 지난 반세기 동안 희소한 재화가 배분되는(우리가 원하는 물건을 얻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착상(아이디어), 즉 경제 이론이 변화를 주도한 동인이라고 논증한다.
기술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기술은 우리가 겪어 온 변화의 여러 동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기술 못지않게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 온 일련의 혁신과 통찰이다. 그 혁신과 통찰이란 지난 반세기 동안 학술적인 경제학 연구에서 출발해 희소한 재화가 배분되는(즉 우리가 원하는 물건을 얻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착상을 말한다. 그러한 착상들은 겉으로는 단지 기술의 변화로 보이는 것들의 밑바탕에서 경제적인 틀을 짜는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저자들은 일군의 경제학자들에게 의견을 구해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가장 중요한 경제학 논문들을 엄선했다고 한다. 얄팍한 연구 기간을 돌아봐도 이런 통시적 관점과 고찰은 어느 이론이든 불필요한 논쟁을 줄이고 시각을 선명하게 하는데 언제나 성공적인 도움을 준다.
즉 이 책에서는 경제 이론들이 현실 세계를 어떻게 설명해 왔는지, 그리고 역으로 그 이론들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럼으로써 위대한 현대 경제학자들의 획기적 착상들이 단순히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현실에 적극 개입하고 시장을 설계해 실험하고 우리 삶과 세상을 변혁하기까지 이르렀는지 설득력 있게 입증한다.
경제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유일무이한 절대적 무대는 시장이다. 그러다 보니 터무니없는 오용과 왜곡들도 가득한 대상이기도 하다. 초기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 적용되었다고 오래 널리 믿어져 왔던 가장 유명한 구절, 자유 시장과 보이지 않는 손 Free market and an invisible hand.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언급한 내용은 이것이다. 어떻게 이 구절에서 마치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신탁을 받은 듯이 시장에 대한 온갖 루머들이 양산되어 왔는지 경이로울 뿐이다.
* 누가 이런 번역을 했을까…….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큼 아름다운 문장들로 쓰였다는 평가를 받는 명저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들을 때마다 슬프다.
이에 비견할 수 있는 것으로는 스피노자와 멸망 하루 전 사과나무를 심겠다, 는 구절이 있다.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에도 없고 네덜란드 철학자도 금시초문인데, 한 때 대한민국 초등학생들은 다 알고 있(다고 믿)었다. 한 학부생이 근거를 찾아 줄 수 있냐고 해서 지도교수와 하루 종일 원서들을 뒤적거렸던 어느 슬픈 날이 떠오른다. 애초에 누가 조작 배포한 겁니까.
다시 정신 차리고, 저자들은 현재 우리 사회에도 크게 시장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고 본다. 하나는 시장을 만악의 근원으로 보는 시장혐오주의, 다른 하나는 시장을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시장근본주의다.* 극단적이라는 점에서 둘은 서로를 지탱하는 한 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 ~주의라고 하는 것들 중 지나치게 말끔한 이분법을 이루는 것들 - 즉 고민도 숙고도 없으니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들 - 은 애써 이해하려하지 말고 그냥 내다 버리자. 그게 낭비 없는 현명한 상책이다(순전히 사적 경험입니다).
이에 저자들은 혁신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구축된 시장들과 그 영향력이 우리 삶을 완전히 에워싸고 정체성에게까지 미치고 있으니,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장에 사용당할 것인가, 시장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라 본다.
시장이 순전히 이롭기만 할 때는 거의 없다.
세상은 시장이냐, 아니면 포로수용소식 명령과 통제냐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시장이 모든 사회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다.
효율의 낙원이 도래하더라도 반드시 모두가 평등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시장이 만병통치약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효율이라는 미덕이 소리 소문 없이 은연중에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변하게 되면,
사회로서의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다른 가치들이 냉대를 받는다.
기업을 경영하든 창업을 하든 투자를 하든 집을 사고팔든 온라인 쇼핑을 하든 매일같이 우리는 오늘날 진행 중인 “거대한 사회적 실험”의 최첨단을 살고 있는 셈이다. 시장 혁명은 단지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만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마저 바꿔 놓을지 모른다. 이렇듯 시장이 주도하는 급변하는 경제 환경과 불확실한 미래를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려면 우리에게는 매 순간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힘과 안목이 필요하다. 이 책은 바로 그 길을 알려 주는 유익하고 간단명료한 “이용 약관”이다.
재밌는 내용들이 한참 더 이어지는데, 순전히 분량을 적합하게 줄여 쓰지 못하는 능력부족으로 글을 맺습니다.
곳곳에서 위트와 재치가 담긴 문장들로 진심으로 재밌어 하며 읽을 수 있게 배려하는, 잘 읽히는 <시장의 속성The Inner Lives of Markets: How People Shape Them-And They Shape Us>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