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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도시 ㅣ SG컬렉션 1
정명섭 지음 / Storehouse / 2020년 11월
평점 :
여긴 사고가 나면 안 되는 동네야.
제가 있던 군대도 사고가 나면 절대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아무튼, 여긴 사고가 나서는 절대로 안 되는 곳이야.
여긴 대한민국이나 북한이 아닌 제3의 공간, 아니 제3의 도시라고.
추리문학계간지를 읽고 처음으로 읽는 한국추리소설작품이다. 저자는 이토록 많은 활동을 하셨고 명성이 높은 분인데…… 역시 한국추리소설작가가 한 분도 기억이 안 난건 그저 온전히 내 탓이다. 가보지 못한 곳일지라도 낯설지 않은 ‘개성’, 현실에서도 남과 북 모두의 사연이 많이 버려지고 남겨진 개성공단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 추리의 소재인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 소설이다. 로맨스도 막장도 없다.
제가 조사한 공장들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일정하게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지속해서 원재료나 완성품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내에서 회사를 운영 중인 친척의 부탁으로 위장취업(?)을 해서 회사물품 도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용된 강민규가 주인공이다. 실제 이럴까 싶게 현장 묘사가 현실감이 있다. BBQ, 피자마루, 헬스클럽, 당구장, 우리은행출장소, CU편의점까지 있지만, 책과 인터넷이 없는 곳이고 오직 달러만 사용가능하다. 그러니 잔돈은? 쿠폰으로 적립해 준다. 한참 이런 디테일에 빠져 개성공단 안내문을 발견한 것처럼 열심히 읽었다. 정서적, 물리적으로 가까워서인지 도중에 자연스럽게 지도에서 검색할 뻔했다.
개성 공단은 북한 땅에 있고, 대한민국의 자본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유통되는 돈은 원화나 북한 돈이 아닌 미국 달러였다.
개성 공단에 들어가려면 특별한 곳에서 국정원 직원에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통일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영상을 보는 것으로 사전 교육은 끝이었다. 반세기 넘게 대치 중인 북한으로 가는 사전 준비가 고작 그 정도라는 사실에 강민규는 처음으로 충격을 받았다.
입출경 절차를 밟는 것까지 포함해서 한 시간 반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목적지를 향해 걷는 사람들에게 이곳이 얼마나 그곳과 가까운지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서울에서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 곳이지만, CCTV도 유전자 검사도 할 수 없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도난만이 아니라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범인을 찾고 잡고 처리해야하는가? 아니 할 수 있을까? 특수한 공간, 현재 진행형인 역사, 공조가 불가피한 상황,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가는 장치들만 해도 긴장과 몰입이 잘 되는데, 작가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쉴 새 없이 독자들에게 트릭들을 던져 주며 반전에 반전을 연주한다.
거짓말은 항상 크고 작은 균열들을 가지고 있다.
그걸 찾아내면 진술한 사람의 거짓말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고, 결국 진실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용의자가 진술할 때 일단 믿는 척하면서 경청하는 게 추리의 시작 단계다.
물론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었지만 그건 오재민 소좌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겼다.
급수가 그리 맞아 보이진 않지만, 북한호위총국의 오재민 소좌와 위장취업자 강재민이 탐정처럼 사건을 추적한다. 허가된 시간은 단 3일! 모든 사람이 다 범인인가, 싶은 순간을 지나 추리 소설의 절정 반전이라 할 수 있는 플롯으로 범인이 밝혀진다. 나는 범인 찾기에 실패했다.ㅠㅠ 이 범인이 깜찍한 점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그 파장을 감추는 데에 남과 북 모두 관심이 있을 거라는 것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아주 교묘하게 그 틈에 숨어 있다. 참으로 시사적이다.
의욕이 넘치는 건 좋은데 여긴 개성 공단이라는 걸 명심하게.
개성 공단은 남북한 사이에 놓인 외줄입니다.
재미있게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떨어지기를 바라는 쪽도 많죠.
이럴 때 사소한 실수라도 하게 되면 큰일로 번집니다.
“모든 가능성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래도 남는 것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진실이다.”
“셜록 홈즈가 한 얘기군!”
귀에 익은 목소리에 깜짝 놀란 강민규가 눈을 뜨자, 반쯤 열린 문 너머로 오재민 소좌의 모습이 보였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온 오재민 소좌가 씩 웃었다.
“놀라긴, 공화국에서도 셜록 홈즈 책이 나온 적이 있다고 했잖아.”
설정도 재밌고 기발하고 전개도 탄탄하고 배경과 스토리 스케일 역시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다. 전혀 예상 밖으로 범인 추적 과정에서 과단성과 유머가 뿜뿜이다. 북한 군부 절대 권력자가 남한 흥신소 직원이랑 함께 수사하는데 반발도 농담도 막 한다. 빨간 늑대 얼굴에 뿔도 나고 무기도 소지한 악마의 화신을 반공포스터로 그려본 세대라서 조마조마 불안불안 두근두근한 부분들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범인을 못 찾아 분해서인지 뭔가 아쉽단 생각이 든다. 이마저 작가의 의도인지 이 둘은 다른 모습으로 해후한다. 다음 편 출간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