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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ㅣ 고전의세계 리커버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평점 :
철학 없는 과학의 위험한 맹목적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할 때였기고 하고, 존경하는 분이 지도해 주신다는 허락도 얻어, 정말 용감하게 자연과학 전공자가 과학철학도 아닌 분야를 공부하겠다고 대학원 진학을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그렇게 만나게 된 공리주의자였다. 밀의 공리주의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었지만, 얼핏 듣기엔 공리주의와 대척점에 있을 듯한 <자유론, On Liberty(자유에 대하여)>이 대표적인 철학서라 하여 그 이상한 모순처럼 느껴지는 철학서를 배워보고 싶었다.
영어로 된 책을 보신 분은 알겠지만, 분량이 많은 책이 아니다. 문장들도 깔끔하지만 술술 읽고 아하! 이해되는 내용이라곤 할 수 없었다. 서양사에서 논의된 자유에 관한 사상들이 통시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탓도 있고, 그저 ‘자유’라고 번역되는 문화에서 세분화되어 주체와 대상과 개념이 모두 변별력을 갖춘 ‘다양한 자유’에 대한 이해나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유와 권력의 다툼은 역사가 시작된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하다. 중략. 그런데 과거에는 이런 다툼이 백성, 또는 백성 중에서도 일부 계급과 정부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때 자유는 정치 지배자의 압제에서 보호받는 것을 의미했다. 중략. 한 사람이나 한 부족 또는 한 계급이 지배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세습 또는 정복을 통해 권력을 잡았는데, 어떤 경우에도 피지배자들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을 바로 자유 liberty라고 일컬었다.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의견이나 감정이 부리는 횡포, 그리고 통설과 생각이나 습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가 법률적 제재 이외의 방법으로 윽박지르며 그 통설을 행동 지침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경향에도 대비해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이 나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를 지녀야 한다. 설령 다른 사람의 눈에 어리석거나 잘못되거나 또는 틀린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런 이유를 내세워 간섭해서는 안 된다.
자유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이다.
이렇게 자유에 관한 항목들을 중심으로 읽어 나가다가 다시 36쪽으로 돌아가면, 밀이 이 책에서 ‘천명하는 자유에 관한 아주 간단명료한 단 하나의 원리’가 정리와 동시에 이해가 된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 개인이든 집단이든 -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사상서들이 자주 겪는 대접이긴 하지만, 밀의 자유론 역시 오독되고 오용되며 160여 년이 흘렀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은 지도 24년이 흘렀다. 어쩌면 지금에서야 충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내용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원래 이만한 수준의 철학서, 소위 명저란 시대적 한계 따위는 이미 사상이 배양될 때부터 초월한 통찰력이 담겨 있어서, 어느 시대에나 시의 적절하게 통역되어 읽힐 수 있는 것이다. 한글 번역서는 처음이라 문득 문득 완전히 낯선 책 같기도 했다. 촘촘히 명료한 개념들이 필요해서 여전히 쉽게 잘 읽히진 않는다. 함께 읽은 친구는 ‘삼 일이나’ 걸렸다고 해서 놀랐다. 나는 스스로의 읽기 능력에 심각한 의문을 키우면서 천천히 필사를 하면서야 겨우 다 읽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개인이 군중 속에 묻혀버린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제 여론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은 거의 진부하기까지 하다. 대중만이 권력자라는 말에 어울리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정부도 대중이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챙겨주는 기관이 되고 만다. 중략. 공중의 생각을 한데 묶어서 여론이라고들 하지만 그 공중이 언제나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 말은 미국에서는 백인 전체를 가리키지만 영국에서는 주로 중산층을 가리킨다.
여론을 빌려 자유를 구속한다면 그것은 여론에 반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나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옳지 못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의견의 자유도 무제한적으로 허용될 수는 없다.
공공 여론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다른 사람에게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고, 실제 대부분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의 쾌락이나 편의에 대해 그저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일이 자기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구실 아래, 그 사람을 위한다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수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통제권을 행사하려 한다.
누구든지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1859년 출판, 2020년 다시 읽다.
나는 그리고 사람들은 아직도, 혹은 다시 자유론을 읽을까.
당시의 밀이 제기한 자유에 관한 문제점들 중 일부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기 때문일까.
혹시 이런 문제들은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들인가.
이런 의문들이 떠나지 않는 한 나는 - 마치 회전목마를 탄 것처럼 - 계속해서 자유론을 다시 읽을 준비를 마친 그 상태로 돌아갈 것만 같다.
이전에 인류가 꿈꿨던 수많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조건들이 구비되었고 인프라도 구축되었지만, 2020년 대한민국은 현재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있다. 속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상태는 바람직하지 않다. 생산과 재생산, 광속 유포를 반복하는 가짜뉴스들이 그런 심리를 자극적으로 드러내준다. 사실도 진실도 중요하지 않다, 자기 확신을 재확신하는 믿고 싶은 이야기들에 비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