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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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끝이 아니다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그리고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중략부모님의 아들조부모님의 손자증조부모님의 증손자유고슬라비아의 아들인 나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우연히 독일로 피난을 왔다아버지작가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모든 게 나일까? 438

 

제목 때문이었을까이례적으로 내용이 궁금하여 활짝 펼치지 않고 표지를 한참 보았다표지의 용이 마치 인간으로서의 근원적 출신 정보를 모두 담고 있는 유전자의 형태처럼 보인다저자의 이름이 흩어지는 용의 육체 가운데에 적혀 있는 것은 어떤 고정의 의미일까아니면 꽃들이 흩어지고 날리듯 무상한 흐름의 의미일까출신으로 차별받은 선명한 기억이 없음에도 출신이라는 말이 폭력적으로 들려서 목이 막히는 기분이다.

 

할머니우리 할머니 크리스티나가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할 때 나는 기억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86

 

소천하신 조모님이 나를 손주가 아니라 재종질녀로 부르기 시작한 때가 다시 떠올랐다마치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문득 떠오르듯 단편파편시간의 비순차적 전개감정의 고조와 다채로운 색감들이 작법의 제한 없이 지면의 제약 없이 흘러넘친다장편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 새 저자의 에세이를 읽는 듯한 기분에 잠시 읽기를 멈추고 긴 호흡을 하기도 했다.

 

우리를 이곳저곳으로 이끈 달콤쌉쌀한 우연들이 출신이다. 89

사람들과 아무 상관없는 소속감이 곧 출신이다. 89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사실조차 처음 알게 되었다한 세계가 그렇게 사라졌는데 내 세상엔 영원히 기억될만한 천둥번개와 같은 울림이 전해지지 않았다니한 번도 가 본적 없는 공간에 대한 향수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게도 생겨났다. ‘나라를 잃었던’ 그 시기에 내가 살지 않았음에도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배워서 알게 된 것처럼소설 속의 시대와 배경과 인물들이 자주 내가 아는 시대와 배경과 인물들을 떠올리게 했다. ‘해외 동포라는 친밀한 단어로 불리지만여태껏 잊고 살았는지 찾으려 하지 않았는지 모를 이들도 떠올랐다내게는 자주 방문해서 익숙하고 여전히 여러 좋은 친구들이 사는 독일 하이델베르크가 이민자들에게는 어떤 터전이 되었을까도 가능하면 더 정확히 생생히 상상할 수 있으면 하고 바랬다.

 

내가 만들어내는 허구의 세계는 창작인지기억으로 이루어진 열린 체계로이 체계는 실제로 일어난 일에 맞닿아 있다고. 28



이 이야기는 기억이 소멸되는 시점에서짧은 시간에 사라져버린 한 마을에서망자들의 현존에서 시작되었다. 40

 

저자의 세계는 그리움과 공상과 사색으로 가득하다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 저자는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려 한다이는 단순한 허구라 말할 수 없다내가 기억하는 지난 시간들과 함께 한 모든 이들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허구가 아닌 것처럼그 기억 속 일화들이 얼마나 미화되고 치장되고 선별되어 나에게 남아 있는 지와도 무관하게 그것들은 모두 현재의 나에게 실재하는 세계이고 내가 기억하는 한 그렇게 살아남을 것이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해서 행복해하는 사람도 드물다그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도망치는데때론 그 어떤 무엇으로부터때론 실존적 존재로부터 도망친다이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건 때론 무거운 짐 같고때론 선물 같기도 하다. 86

 

목적지도 없이아직 거리 이름도 강 이름도 모르는 세상을우리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이곳엔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도우리가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167

 

무엇을 할 것인가어디에서 살 것인가는 나의 20-30대를 관통하던 가장 중요하고 고통스런 질문이었다그 둘은 때론 서로 결합되어 한 번의 결정으로 정착되기를 강요했고때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괴리로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공항만 봐도 멀미가 날만큼 세계의 절반을 돌아다녔지만 나는 결정을 하지 못하는 자신과 여지를 보여주지 않는 현실로부터 뿌리 없이 날려가듯 그렇게 도망을 다니며 시간을 견뎠는지 모른다결국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은 곳에서 사는 꿈을 끝없이 유예하다가어느 순간 잘 하는 일도 아닌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 모두의 고향은 우연에 의해 탄생한다. 166

 

나의 반항은 일종의 적응이었다중략그러나 소속감은 지지했다나를 원하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는 소속감을 갖고 싶었다. 295

 

나는 모국에서도 고향이 없다좀 더 정확하게는 소속감과 애정과 그리움을 느끼는 대상으로서의 장소가 없다필요할 때면 언제나 두 팔을 벌려 나를 기다려 주시던 분들이 돌아가시고 사회적 고아가 된 기분을 거듭 느끼며 가난한 어른이 되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그 때로부터 영원히 부재하나 유일하게 깊은 의미를 가지는 존재들로서 그리운 그 분들이 나의 유일한 고향이었을 지도 모른다그래서 사람을 고향으로 삼고 만 내 정서는 그분들의 세계가 사라지자 내 기억 속에 튼튼한 집을 짓지 못하고 물리적 공간마저 탄생시키기 못한 능력의 부재로 귀결되었는지 모른다.

 

분명히 내 감정은 묵직했고 읽는 내내 의미를 찾아 몰입했지만 또한 놀이동산의 조명들과 기구들과 방문객들의 반응처럼 다채롭고 떠들썩한 재미난 입말들도 상당한 분량이며, 이는 저자의 지적이고 성숙한 사고와 현실 대처에 대한 지혜로운 여유를 잘 보여주기도 한다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오랜 시간 잔잔하게 이어지는 누군가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는 특별한 경험과도 같은 신기한 책이다웃다가 울다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기도 했다저자의 기억인지 소설 속 인물들의 기억인지 더 이상 구분이 안 가는 것도 더 이상 문제가 안 될 만큼 장면들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다시 책을 투르르 넘겨보니 저자는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대답을 350쪽이 넘는 분량으로 계속 설명했다적어도 저자에게는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해지지 않았을까 싶다출신과 고향은 하나가 아니다.



오랜 사색과도 같은 독서의 끝에 숨을 고르고 잠시 멈출까하는 순간상상도 못하게 유쾌한 엔딩, ‘용의 보물이 등장한다이야기의 백미라 느껴지는 부분을 망칠까 두렵지만이런 형식의 엔딩이야말로 저자가 망각과 기억을 동시에 불러 오면서 전개한 이 소설의 발걸음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라고 공감한다요소요소가 충실하고 정성스런 장편이 엔딩이 제일 재밌고 유쾌하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가.

 

표지의 뒷장을 쳐다보는 내게 남은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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