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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ㅣ 창비세계문학 5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설준규 옮김 / 창비 / 2016년 11월
평점 :
벌써 셰익스피어 400주기가 훌쩍 넘었다. 비극 속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모든 것을 걸고라도 해야 할 일을 시도할 것인가로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간에 대해 깊숙이 들여다보는 이 작품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그 쓸쓸하고 황망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열광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고 공연되는 독보적인 작품이다.
오래 전 영국 유학 당시 문학 전공이 아니었음에도 어느 날 우연히 방문한 중고서적에서 상당히 오래된 셰익스피어 전집을 구매한 적이 있었다. 세월을 오롯이 품은 외관이 비밀의 방을 열고 들어오라는 듯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지만, 문제는 내게 익숙한 시대가 아니라 셰익스피어 집필 당시의 영어로 쓰인 문장들이라 영문학을 전공한 영국인 친구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결국 끝까지 읽어 내지 못했다. 단어들이 생경해서 자주 찾아봐야하는 언어 수준으로는 천재의 자유자재 언어 구사와 시적 효과들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으로 인해 부동의 책장 장식으로 존재하는 클래식한 판본을 볼 때마다 아쉬워하다 설준규 교수가 무려 십 여 년에 걸쳐 상세하고 깊이 있게 번역했다는 소개에 다시 제대로 읽어 보고 싶어 졌다.
“세상 관절이 다 어긋났어. 오, 저주스러운 악연, 내 굳이 태어나 이를 바로잡아야 하다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때로는 우유부단해서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하는 인물, 어쩌면 독자가 가장 공감하고 싶지 않거나 어려운 캐릭터일지 모른다. 물론 그 지난한 과정을 읽어 가면서 인간의 삶이란 것이 이렇지, 이렇게 사소한 일들에 좌절하고 사소한 실수들로 전체를 망치기도 하는 것이지, 라고 마음이 편해질 가능성도 있지만, 이런 태도와 시각의 변화는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서 좌절과 포기와 인정을 거듭하는 경험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연스럽게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전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시대적 한계에 갇히는 메시지로서만 의미가 평가되는 것은 부당하다. 흔히 하는 말로 속이 다 썩어문드러질 지경인데도 괜찮은 척 견디는 모습이 지금에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빈부격차와 불공평, 부정의에 휘둘리는 일도 여전하다. 인간으로 사는 한 왜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현재에도 별 다를 바 없이 되살아나는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악몽 같은 질문들이다.
얼핏 모순처럼 혹은 단순히 구도 상의 대비처럼 강조되어 보이는 점은, 스토리와 갈등 구조의 강렬함과는 별개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련의 장면들 속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햄릿의 인간 유형과 행동이 오히려 그 이유로 인해 시대를 거듭하며 해석과 분석과 설명과 평가를 재생산해 오면서 절대 사멸하지 않는 생명력을 얻어 날이 갈수록 명작과 거작의 칭호를 굳히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햄릿을 유명하게 만든 것이 작품 밖에서 작품을 읽고 의미를 풍부하게 만드는 독자들의 임무가 된 것처럼 말이다. 회자되는 바대로 바로 그렇게 자유롭게 쏟아낼 수 있는 참여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고전을 부지런히 찾아 읽고 그래서 햄릿은 명작이 되고 걸작이 되어 살아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짧은 한 문장이지만, 분분한 해석이 시도되는 To be or not to be는 “죽느냐 사느냐”, “존재할 것인가 사라질 것인가”, 그리고 이번 책에서는 설준규 교수에 의해 “이대로냐 아니냐”로 번역되고 해석되었다. 나 역시 햄릿의 복잡한 상황과 난감한 선택들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된 이후로는, 단순히 이전에 통용되었던 (내가) 죽느냐 사느냐, 라고 묻는 질문은 아니지 않을까…… 이것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하다란 느낌을 가졌다.
그렇다고 이제 내 안에서 위 문장의 해석이 아주 명쾌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삶의 방식, 지속이냐 변화냐, 좀 더 진지한 철학적 숙고, 존재를 이어가는 것이 맞는가 아닌가, 이런 부가적 해석이 덧붙었다고 정리된다. 어쩌면 햄릿의 유의미한 현대적 가치는 이 한 문장을 붙들고 거듭 질문하고 고민하게 하는 힘에 있을 지도 모른다.
“이대로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 어느 쪽이 더 장한가, 포학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으로 받아내는 것? 아니면 환난의 바다에 맞서 무기 들고 대적해서 끝장내는 것? 죽는 것-잠드는 것, 그뿐.” 육신이 상속받은 가슴앓이며 수천가지 타고난 고통을 한번 잠들어 끝낸다고 한다면, 그것은 간절히 원할 만한 대단원. 죽는 것, 잠드는 것-잠들어, 혹 꿈이라도 꾸면-그래, 그게 걸려. 이 뒤엉킨 삶의 결박 풀어 던졌을 때, 저 죽음의 잠 속에 찾아들 꿈 떠올리면, 우리는 망설일 수밖에-그런 까닭에 이리도 긴 인생이란 재앙이 빚어지는 것. 누가 견디랴 세상살이 채찍질과 멸시를, 압제자의 횡포, 세도가의 오만불손을, 홀대당한 사람의 아픔, 느려터진 법집행을, 관리들의 방자함, 인내와 덕 갖춘 이가 하찮은 자들에게 당하는 능멸을, 벌거벗은 단검 한 자루면 만약 자신을 청산할 수 있을진대. 누가 견디랴 무거운 짐, 고단한 삶에 짓눌려 툴툴대며 진땀 흘리랴, 다만 죽음 뒤 그 무엇, 저 미발견의 나라, 국경 넘으면 길손 돌아오지 못하는 저 나라가 두렵기에, 의지는 갈피를 잃고, 미지의 고초를 향해 날아 달아나느니 차라리 지금 겪는 고초를 견딜 따름. 하여, 심사숙고 탓에 우린 모두 겁쟁이 되고, 하여, 결단의 타고난 혈색 위로 사념의 창백한 병색이 드리우며, 드높은 뜻 품은 중차대한 계획도 이런 까닭으로 물길 틀어져 실행이란 이름을 잃고 마는 것.
끝없는 언어유희, 동음이의어의 적극적인 활용, 자유자재로 말을 구사하는 햄릿은 마치 셰익스피어 자신이 적극적으로 투영되었거나 혹은 동일한 인물처럼 겹쳐진다. 주석이 없었다면 온갖 의문들로 머리가 채워지다 길을 잃고 말 수준이다. 그 점에서 이 친절한 번역서는 각주에 있어서도 더할 수 없이 친절하며 세세하게 설명되어 있어 완독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번역가의 능력인지 한글로 읽은 햄릿은 이래도 되는 건가 싶게 가독성이 증가해서 마치 단막극을 감상한 것처럼 짧은 시간에 끝이 났다. 그 속도감이 의아해서 잠시 책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단순하고 냉정하게 살펴보면 친족을 살해하고 연인을 방관하고 격정으로 인해 자신도 파멸시킨 인물임에도 한 사람에게 드러날 수 있는 다각적인 면이 워낙 처절하게 부각되어서인지 여러 명의 전형적인 자아들을 소개받은 느낌이 남았다. 웅장하고 우렁차게 완전한 비극으로 끝난 이야기, 고민에 빠져 머뭇거리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적막한 무대만이 이미지로 남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살아서 밝혀낸 것이 없음을 햄릿은 죽어 가는 순간에도 안타까워했을까, 죄 없는 사람들도 죽였는데 그들에게는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을까, 그리고 죽어서도 자신의 억울함만을 위해 아들을 고통과 파멸로 몰아넣은 유령의 정체는 햄릿의 판단처럼 정말 아버지가 맞는 것일까. 단 한 사람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 믿었던 호레이쇼 역시 부탁을 제대로 들어 주지 못했을 텐데 햄릿은 그래서 죽어서도 억울했을까, 아니면 살아서 겪은 갈등과 괴로움이 너무 커서 죽어 가는 순간 비로소 편안해졌을까.
찬사 받는 정당한 영웅도 마땅한 권리를 자력으로 찾아 온 권력자도 추앙받는 인격자도 행복한 삶을 누린 젊은이도 아니었던 햄릿, 이제 내 나이에서 바라본 그의 캐릭터는 가엽고 안쓰럽기 그지없다. 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과정의 오류는 얼마나 잦으며, 해야 하는 일 중에서도 할 수 없는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비극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장치로서의 햄릿이라는 인물을 파악하고 남긴 요한 볼프강 괴테의 말이 식은 무대처럼 무섭도록 스산하게 죽음으로 가득한 적막한 결론을 잠시 다독여준다.
엄청난 책무가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는 한 인간에게 부여되었음을 셰익스피어는 그리려했다. 중략. 아름다운 꽃들을 품어야 했을 값진 화분에 한 그루 참나무가 심어졌고, 뿌리가 뻗어나가자 화분은 산산조각이 난다. 사랑스럽고 순결하고 고결하고 극히 도덕적이지만, 영웅이 되는데 필요한 정신의 힘들은 지니지 못한 한 인간이 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짐에 깔려 무너진다. 중략. 불가능한 일을, 그 자체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수행하라고 그는 요구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