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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해석 -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 / 김영사 / 2020년 3월
평점 :
목차를 보며 거짓말의 정체와 진실의 정체가 가장 궁금하였다. 특히나 나처럼 눈치 0단인 사람, 남의 일에 관심이 적어 관찰력을 키울 기회가 적었던 사람은 도무지 거짓말도 진실도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래서 거짓말은 소망성취 용이고 진실은 드러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사적인 관계에 도움이 되는 팁을 주고자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충격적인 사회적 사건들과 결과적 부정의에 대한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상호작용, 본성, 통념을 분석하는 강렬하고 진지한 내용이다. 마치 가벼운 읽을거리를 집어 들었다가 상념과 편견이 박살나는 기분을 맛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다가 평소라면 관련성이 적은 특정 사회의 일에 대해서는 당장 굳이 읽어서 알아 두고 싶은 생각이 잘 들지 않는데, 글래드웰의 글은 완전히 새로운, 몰랐던 소재들을 엮어내는 재주가 탁월해서인지 이러저러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특히나 역사적 인물들 - 히틀러와 동시대 다른 유럽 국가의 수반들 - 에 관한 사례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지보다 못한 판단결과에 아연실색하게 되었다.
백인 남자 경찰관이 샌드라 블랜드라는 흑인 여자 운전자의 차를 멈춰 세운다.
차선 변경 깜빡이를 켜지 않았다고 몇 가지 질문을 하는 과정에서 운전자가 담뱃불을 붙인다.
감정이 고조되고 장시간 입씨름을 하게 된다.
이 둘의 대화는 경찰차 계기반 위 비디오카메라에 녹화된다.
경찰관이 샌드라 블랜드를 차 밖으로 끌어내는 장면에서 끝난다.
사흘 뒤 샌드라 블랜드는 유치장에서 목숨을 끊는다.
저자는 묻는다. 이런 비극은 왜 생겼는가. 충격과 혼란을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답변이지만 실제로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냥 인류는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자 할 때는 말을 거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낯선 사람이 아는 사람이 되기까지 대가나 희생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마치 동어반복처럼 헷갈리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좀 더 읽어 나가면 우리가 판단할 때 오류를 범하게 하고 착오를 일으키게 하는 요인들을 차분하게 설명한다.
중앙정보국 간부들은 스파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판사들은 피의자를 파악하지 못하며, 총리들은 적수를 파악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낯선 이의 첫인상과 씨름한다. 사람들은 몇 달씩이나 낯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씨름한다. 누군가를 한 번만 만나도 씨름하고, 낯선 이를 여러 번 만나도 씨름한다. 사람들은 낯선 이가 과연 정직한지 평가하기 위해 씨름한다. 낯선 이의 됨됨이를 놓고 씨름한다. 낯선 이의 의도를 놓고 씨름한다. 혼란스러울 뿐이다. 69
그러나 아무리 물러서서 생각해봐도 샌드라 블랜드와 같은 오해와 비극적 결말은 불가피하게 치를 수 있는 대가라고 쿨하게 접어줄 수는 없는 종류이다.
또한 타인을 신뢰하는 본성 또한 포기할 수 없다. 모든 타인들이 살인자라고 가정하면 누구도 집 밖을 나갈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 수반되는 위험이 아무리 끔찍할 지라도 여전히 진실이 디폴트 값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 사회가 작동을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속 시원한 해결법이 모든 문제에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편인데도 마치 인간이란 인간 사회 속에서 실은 옴짝달싹못하고 살아가다 오해로 인해 판단미숙으로 인해 망가지고 파괴되기도 하는 존재인가 싶어 마음이 갑갑해진다.
그리고 신뢰가 결국 배신으로 끝나는 드문 경우에 진실을 기본 값으로 놓은 것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비난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 177
우리는 진실을 말하는 학생을 제대로 맞히는 데 우연보다는 훨씬 유능하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학생을 제대로 맞히는 데는 우연보다 훨씬 무능하다. 우리는 이 모든 동영상을 살펴보고 “진실, 진실, 진실”을 추측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면담 시에 진실을 말하는 이를 잘 알아보고 거짓말을 하는 이를 몰라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기본 값으로 갖고 있다. 우리의 가정은,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정직하다는 것이다. 101
심호흡을 하며 읽어 내려오다 보니 설마 중간에 빠뜨리고 읽었나 싶어 책을 뒤적여볼 정도로 글래드웰은 당혹스럽고 현실적인 조언을 최선의 결론인양 전한다.
우리는 몇 가지 단서를 설렁설렁 훑어보고는 다른 사람의 심중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고 여긴다. 낯선 이를 판단하는 기회를 덥석 잡아버린다. 물론 우리 자신한테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은 미묘하고 복잡하며 불가해하니까. 하지만 낯선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책에서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를 설득할 수 있다면, 이런 사실일 것이다. 낯선 사람은 쉽게 알 수 없다. 75
질문은 이어진다. 그럼 우리 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타인과 의사소통을 이어가야 하는 현실에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결국은 태도의 문제인가. 조심스럽고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낯선 사람은 일종의 위험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그 사람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친절한 사람인지 위험한 사람인지, 재미있는 사람인지 지루한 사람인지,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인지 행복한 사람인지 판단을 하지요. 하지만 정확한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런 식의 판단을 내리는 데 굉장히 서툽니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런 약점이 있다고 해서 낯선 사람과 대면하는 걸 마냥 피할 수만은 없겠지요. 세상에서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일들은 대부분 과감하게 다른 사람과 말을 터보면서 시작됩니다. 그 첫걸음은 마음을 열고 새로운 사람과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6
돌고 돌아 같은 질문이 반복되는 것처럼 초조하게 읽으며 이리저리 혼란스럽게 엉클어진 끝에 어쩌면 나는 이 천재적인 글 솜씨를 가진 작가가 전하려는 말이 많은 이들이 실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래서 억울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실천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도 없는 행위의 부재일뿐이니까.
단지, 다음번에 내가 닥친 상황 속에서 글래드웰의 타인의 해석이 전한 충고들을 기억할 여유가 있다면 알면서도 이전에는 왜 실천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한번 쯤 열심히 찾아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