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웃음의 나라 - 문화인류학자의 북한 이야기
정병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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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단어는 없는데 쉽게 상상이 안 되어 어려운 제목이다.

 

아마도 내 여권을 들고는 자유롭게 방문할 수 없는 나라라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는 곳이라 그럴 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본 적 없는 북한과 만나본 적 없는 북한 사람들이 나는 만나기도 전에 이미 낯설기만 하다. 언어가 같으면 - 마치 혈육에 대한 모든 신비주의적 믿음처럼 - 무작정 더 가까울 것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나는 같은 언어를 쓰는 타인들과 전혀 이해하고 이해받지 못했던 경험들이 있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금방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뿐 아니라 깊이 이해받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들여다보이는 이들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러니 그 오랜 세월을 공식적으로 ‘주적’으로 언명하고 적대적 감정을 의식화하는 교육을 받은 남북한 서로가 과연 분단선, 휴전선만 물리적으로 사라지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일은 정말 최선이자 바람직한 것일까.

 

 

애초에 실향이나 이산의 아픔을 겪은 당사자나 후손이 아니라 관념적인 수준에서 맴돌며 그나마 해온 생각도 점점 차갑게 멀어져간다. 그래도 남북정상적십자회담이나 북미정상회담을 비쳐준 영상들은 깜짝 놀랄 만큼 몸짓 하나가 다 유의미해 보였고, 그동안의 모습들이 얼마나 지난하고 낯 뜨거웠는지 미래세대는 그 세월을 웃으며 서로 얘기할 종전과 평화의 방향이길 기원했다.

 

경험도 이해도 비교할 이가 별 없을 듯한 영역이라 경력과 노력과 재능이 합해진 저자의 글이 당연히 독보적인 현장성과 흥미와 - 그동안은 종합적으로 판단할 양이 모자라기만 했던 - 정보량이 풍부할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그토록 단단한 공정성을 지닌 채로도 이토록 따스한 연민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 우선 놀라웠다. 문화인류학이란 원래 인간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니라 연민도 애정도 많은 건가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 개인의 의견이나 적용 가능한 이론보다는 현장의 모습들이 제일 궁금했는데, 수많은 현장의 섬세한 묘사들이 가득한 점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살면서 깨닫게 되는 놀라운 점들 중 하나가 한 번도 애써 ‘고정관념들’을 확립하려 노력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분야에 빠짐없이 끼어들어 기어코 스스로에게 방해를 받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역시 책을 읽으며 빈약한 고정관념들과 편협한 사고들을 스스로 짚어갈 수 있어 감사한 일이었다.

 

그리고 보니 나도 ‘그때 그 시절’엔 반공포스터를 열심히 그린다거나, 북한에 눈이 빨갛고 이가 날카로운 늑대들과 괴물 돼지가 살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좀 더 커서는 북한 사회에 대한 인상이 본인들이 내세우는 ‘주체성’과는 달리 ‘주체적인 사고’가 부족한 전체주의 사회로 고정되었다. 가짜정보와 이해부족과 연민부재 기타 등등의 빈약한 인상주의 합작품이랄까.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 정치와 정치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 문화인류학자가 아니라 현장 실천가로서의 생생한 공감들이 잘 드러난 내용들도 아주 유익하다. 나는 문화인류학이란 식민지쟁탈전과 자본주의 시장 확대의 시기가 지나고 시대성이 거의 소멸되었다고 내심 과거형 유물형 학문이라고 얕보는 속마음이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북한은 그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연구와 학문의 대상이기도 하겠다. 물론 많은 이들이 살아가는 곳이니 행여나 존중심을 잊고 대상화하는 일은 금물이지만. 내 좋은 한 친구는 북한관련 - 새터민 패널들과 드라마 등등 - 방송을 몇 개 알려주며 거기서도 생생하고 재미난 얘기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다른 수다를 떨다 그새 제목들을 모조리 까먹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 남녀북남?

 

아는 것도 배운 것도 즐기기만 하고 정책화하고 현실화할 아무 의무가 없는 독자라서 진심으로 속편하다. 많은 분들이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을 구상하고 제안하고 실행하느라 고된 근무를 하고 있겠지만 - 다른 분들에 비해 비교적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강경화 장관을 볼 때마다 반갑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 마음이 덜컥, 걱정이 된다. 그레이 헤어는 그 멋을 더할 뿐이지만 점점 패는 볼과 안색이…… - 매번 미루어 그 고됨을 잠시 짐작해보곤 잊는다.

 

내용이 낯설기도 흥미롭기도 유쾌하기도 불쾌하기도 애잔하기도 화가 치밀기도 했다. 어쩌면 모든 사회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군가에겐 비슷비슷하게 이러저러할 지도 모른다. 그 모든 노고로 쓰인 냉철하고 지적인 내용을 다 지나 다시 저자의 마음이 울리는 것 같은 구절로 돌아와 본다.

 

무기를 내려놓게 하려면 우선 그 마음을 알아주어야 할 것이다. 13

 

개인적 자선과 마찬가지로 국제원조도 대상국의 상태와 실력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참혹한 모습으로 도움을 청해도 가난한 걸인에게는 동전을 던져줄 뿐이다. 입성이 반듯하고 갚을 능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는 단위나 지원 방식이 달라진다. 실력과 배짱이 있는 상대가 '나'를 해칠 수 있는 힘까지 가지고 당당하게 요구를 한다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대기근 상황에서 발사한 미사일 광명성은 바로 그런 길을 가기로 했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24

 

외교도 정치도 사람이 하는 일, 어쩌면 당대의 연민 가득한 인문학자들이 이 길에 함께 하며 출판한 책을 읽을 기회가 올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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