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여자들 스토리콜렉터 82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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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쯤 뒷면 나는 살인자가 된다.

 

물론 내가 훨씬 이전부터 더 꼼꼼하게 고민했더라면 이런 상황에 빠지지도 않았겠지만, 그랬더라면 오늘 저녁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짓 따위는 하지 않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겠지. 그리고 릴리아나는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는 것도 모른 채 계속 살아 있었을 텐데. 10

 

생각을 억제한다. 이래선 안 된다. 과제를 끝내야 한다. 12

 

<이름 없는 여자들>은 불법 채류자 외국인 여성의 이야기다. 청소하다 살해당하고 이름도 사는 곳도 국적도 모르는 한 여성의 삶을 재구성하면서 플레밍 수사관과 단의 일주일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복지선진국이라 불리는 북유럽 - 특히 덴마크 - 의 실상과 사람들의 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외국인 여성 노동자를 둘러싼 거대한 불법 거래 네트워크(Human Trafficking)는 어디까지 뻗어 있을까? 의지할 곳이 없고 생계 해결이 절박한 이들은 자신을 도와준다고 생각해서, 혹은 그것이 유일한 동아줄이라서 그 손을 잡지만, 사업의 본질과 성격상 그 끝은 수많은 폭행과 죽음이다. 왜 그걸 모르냐고 피해자들을 안타까워하는 한편 한심해할 수도 있지만, 사소한 희망이라고 필요한 이들에게 해결책 없이 정신 차려라, 현실을 똑바로 보라, 는 말만큼 안 먹히는 것도 없다.

 

생계에 도움이 안 되는 그깟 이름은 없어도, 일자리와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해 준다면 일정 정도의 착취는 정당한 것인가. 자신의 나라 덴마크에 대한 포장 의지가 전혀 없는 작가의 의도에 부응한 이야기 전개에서 섬뜩할 만큼 다른 인간을 사물화하고 대상화하는 이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 여성들은 모두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죠. 외국 여성이라는 것, 크리스티안순에 몰래 숨어 산다는 것, 그리고 덴마크에서 추방당할까봐 무서운 나머지 어떤 형태든 관청에 도움을 청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어요. 295

 

이곳이야말로 그런 여성들이 도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도시 아닌가요. 사회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395

 

코로나19로 인해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제대로 조망 받지도 축하받지도 못한 3.8 여성의 날에 헛헛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해서 때론 시시한 이유들로, 때론 그냥 우울해서 손에서 자꾸만 놓았다 태풍급 강풍이 인간들이 만든 것들을 뒤흔드는 소리를 들으며 겨우 다 읽었다.

 

주제가 무겁지만 사회고발르포가 아닌 추리소설이라 트릭들을 푸는 재미도 있고 전체적으로 작가가 고발하고자 했던 의도를 범죄 이면의 이야기를 만나면서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 전개 속도에 따라 하나씩, 혹은 부분적으로 여러 개의 범죄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해결의 실마리를 주거나 중심에서 해결하는 이가 존재한다.

 

교차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삶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내용이 공감과 동일화하는데 도움을 주며, 유별난 괴물이라기보다 친근한 정도로 평범한 캐릭터들이 현실감을 더 하는 차분하면서도 치밀한, 가끔 바람 소리를 무시하고 집중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소설이다.

 

한 때 외국인 여성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에 근무한 적이 있어 그때는 전혀 몰랐던 작가가 반갑기도 했다. 민주적이고 복지제도가 훌륭하고 평등사상이 일상화된 그곳에서 ‘우리’가 아닌 ‘타자’를 대하는 분리주의적 방식을 드러낸 소설이 엄청나게 널리 읽히고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읽었다. 문제점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완벽한 사회란 어디에도 없을 터라, 그래도 비판과 고발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위험해 보이진 않는다.

 

공동 생활권으로 묶여 더 이상 딴 나라 사정이 남의 일이 되지 않는 이런 시국에 함께 사는 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기에도 적당하고, 마음이 한시도 편하지 않아 스트레스가 쌓여가는 시기에 재밌는 추리소설 작품을 읽는 계기로도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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