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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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계기로 마침 <시그널> 드라마를 다시 몰아서 보고 신기하게도 이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과 다르지 않은 아픈 질문, "거긴 좀 다릅니까, 그래도 20년이나 지났으니…… 돈 많고 권력 있다고 개차반 짓을 하고도 멀쩡하게 사는 그런 세상은 아니겠지요……."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 거라고, 그 메시지를 멈추지 않는 드라마를 이젠 영락없는 기성세대가 되어 복잡한 마음으로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누군가에게 손 내미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빛이 모두 꺼졌지만 두 눈만은 여전히 빛나는 채로 그는 찾아온 모든 사람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것이 한 인간에게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습니다. 251

 

실제로 대학운동권의 끝자락에 대학에 입학한 나는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낯선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투옥, 고문당한 선배들도 있었고, 군대에 끌려가고 집에 끌려가서 연락이 되지 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더 윗세대인 부모님 대에는 흔적 없이 실종된 이들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내 개인의 삶을 뒤돌아보면 금방인 것 같으면서도 참 긴 세월이었다 싶은 기분이지만, 실제로 20~30년 전이란 기술변화의 내용에서는 충격적일 정도로 급변해왔지만, 정치, 경제 민주화의 시선에서는 참으로 더디고 무거운 몇 걸음 정도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몇 걸음을 걸어나기 위해 치러야했던 무수한 대가들은 얼마나 버겁고 두려웠는지, 그 시기를 운 좋게 살아남은 나와 같은 이들은 이제 체력도 열망도 거의 바닥이 난 채로 일상의 평온함이 깨지는 것만이 너무나 두려운 일이 되어, 대부분의 남은 체력과 노력을 거기에 바치는 매일이고, 그나마 이런 짓까진 하지 말고 살자,란 하한선을 지켜내는 일에도 힘이 듭니다.

 

가끔 그래도 마음이 부대끼어 그저 몇 번 후원을 하는 일로 혼자만의 안전한 참여활동을 하는 것이 고작이고,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나라도 한번이라도 더 해보자,가 새해에 마음속으로만 되뇌어보는 다짐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별 하는 일 없이 사는데도 늘 힘은 듭니다. 힘들지 않은 삶이 어디 하나라도 있었냐 하면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엄살은 부리지 말고 견뎌야 하겠지요.

 

이토록 깜냥이 작은 나 같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사람이 사는 일이 언제나 조금 덜 힘들고 조금 더 행복한 게 궁극적으로는 맞는 거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조금 더 줄이고 조금 더 희생한 분들은 언제나 있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제까지 알고도 모르고도 얼마나 많이 자주 무임승차를 한 삶이었을까요.

 

그런 분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한 일이 아니었으니 적어도 그런 선택에 대한 평가만은 제대로 해드리고 비록 지금은 말뿐이지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너무나 두렵게도 폭력적이고 악랄하고 의도적인 인신공격들이 생각보다 도처에 흔하지만, 미리 겁을 집어먹고 움츠려든 나와는 달리 그 전쟁터에서도 꿋꿋이 할 일 다 해서 조금씩 구태와 적폐를 밀어내고 치워내는 분들이 과문한 제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겁니다.

 

그들은 그들의 교훈이 당신 내면에 자리 잡아, 당신 자신이 했던 것과 그들이 말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당신이 더는 구분할 수 없게 되기를 바란다. 불법적인 연행 불법적인 감금 불법적인 시간의 탈취 이런 낮 이런 밤이 열흘 스무 날 삼십 일 넘게 이어지는 동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낮으로부터 밤이, 밤으로부터 낮이 나뉘지 않고, 그들로부터 당신들이, 그들의 말로부터 당신들 말이 완전히 구별되지 않는 고통은 당신들이 이 방을 나간 뒤에도 계속되어, 그 고통이 당신들을 서서히 지치게 하고 쓰러지게 하고 병들게 하고 무너지게 하고, 당신들 모두가 죽어 없어진 뒤에도 이 방의 불빛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들의 밤 당신들의 악몽은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129

 

아무리 너덜너덜해졌더라도, 비록 이젠 전생의 일이었던 듯 일관적으로 지켜내지 못한 기억들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그것들은 허구가 아니고 창작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어서 지탱해주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책을 읽은 큰 딸에게는 자기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궁금하고 재밌는 에피소드처럼 글 내용이 느껴지나 봅니다. 이해하지 못한 내용들에 대한 큰 고민이 없는 것은 한편으로는 행이지만, 이 소설을 읽고 한 유일한 감상평이 엄마랑 소품 만드는 바느질 체험이 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한편으로는 더 이상 이런 이야기들이 당장의 나의 현실이 아니라 미안하면서도 다행이고 감사하고, 그리고 저렇게 기쁜 소소한 일들이 내 아이들의 삶에서 멈추지 말고 자주 있기를 불안한 마음으로 빌고 싶은 기분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서사는 더 아름답고 더 천진하고 더 희망차게 미래를 상상한 방식이 되기를 기원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말뿐이라 죄송하지만, 삶을 이어서 이제껏 넘겨주신 모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할 수 있는 한 온전하게 아름다운 한 자투리를 그렇게 넘겨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일 또 내일이 오면 한 사람이라도 눈물 덜 흘리고 젖은 얼굴 마르는 그런 세상이길 끝까지 함께 응원하고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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