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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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래, 죽음에 대해서.

그런데 내가 죽음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일단 이렇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혼자 있다.

나는 내가 언제 도착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주 오래되어서, 혹은 아직 오지 않아서.

그럼에도 이미 여기 혼자.

그럼에도 단 한 번도 혼자가 되지 못한 채로.

슬프다고 말하면 슬픔이 달아날까 겁이 난다.

무섭다고 말하면 말해지지 않은 무서움에 사로잡힐까 겁이 난다.

겁에 질린 내가 가장 위협적인 것으로 거듭난다.

이 모든 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면서 죽고 싶다는 열망이 의심받을까 죽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일이.

죽지 않겠다는 말로 죽고 싶은 마음을 이해받으려는 비겁함이.

죽는 일에 실패할까 죽기를 시도하지 못하게 하는 망설임이.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에 빠지면 정말로 죽어버리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이.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단번에 죽을 방법을 궁리하는 일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서 진짜로 두렵지 않을 때를 기다리는 일이.

지긋지긋하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죽을 수 있다는 확신이 무너질까 거듭 죽고 싶다 생각하는 일이.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여전히 때를 기다리는 일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면서 참고 있어서 참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는 일이.

하염없는 유예 속에서 미련 없이 끝장내리라 다짐하는 일이.

비우고 비운 다음에도 의미가 나를 향해 침투하는 일이.

이런 말을 하고 나면 이 모든 게 유순해지는 경험이 정말로 지긋지긋하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지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장 아메리 [자유죽음]

 

설득하지 않으려하는 태도는 감사한 일이다. 다만 작가가 끈질기게 매끄럽게 들려주는 언제 끝날지 도무지 모르겠는, 끝났다 싶으면 다른 변주가 시작되는 ‘죽음’이라는 주제의 연주는 각 장에 함께 실린 피아노곡들과 더불어 다채롭고 어둡고 깊고 날카롭게 화음을 발산한다. 그리고 그 내용들에게서 눈을 떼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마음을 다잡고 가다듬어 이 책이 이끄는 심연으로 딸려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하며 읽어 나갔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기사화된 여러 다양한 매체들이 감상자들에게 실제로 충격적일만큼 강렬하게 영향을 미쳐서 직접 행동으로 나아간 무시무시한 사례들을 상기하며 절대 그런 ‘경우’가 되지 않겠다고 삶의 의지를 말 그대로 태워 올렸다.

 

단순하고 명백한 답이 존재하는 지의 여부도 알 수 없고, 오롯이 혼자 자신 안에 갇혀서 치열하게 반복해야 하는 싸움인 경우, 필요한 도움을 바라기도 어렵고 언제 끝나는지도 알 수 없어 피로도가 훨씬 더 크고 힘겨울 터이다. 선명한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방향을 알 수 없이 사방으로 분열하는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일은 상상으로도 지치고 숨 가쁘다. 어떤 의미로 살아가는 일은 멈추지 않는 여러 고통을 느끼고 직면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좀 더 정직하게 그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런 식으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에 잡혀 살다가 문 밖에서 기회를 엿보던 죽음에게 결국엔 따라잡혀 소설이 끝나 듯 삶도 끝난다고 생각하면, 그건 절망일까, 그래도 희망이고 위안일까.

 

“나는 당신이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끝없이 죽음을,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이 고백은 새삼스레 더욱 뭉클하다. 각 장의 피아노곡 연주처럼 이야기 또한 유려하게 흐른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의 도착지가 작가의 이 한 마디라는 생각이 든다.

 

“삶이 정체되어 있다는 감정에는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현실적 조력이 필요하고, 그 조력 없이 개인의 의지는 자주 무력해진다. 나는 내 의지만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고, 내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 섣부른 희망으로 전달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이 말은 남겨 두고 싶다. 평생 변하지 않는대도 괜찮다. 그러나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어쩌면 인류 공통의 증상처럼 작가도 가끔은 급격한 불안과 긴장을 느끼고 일상의 많은 시간을 학습된 무기력과 싸우는 데에 소모한다고 한다. 나도 그러하고 내 지인들도 그러하다. 그리고 미처 이야기를 듣지 못한 다른 이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한 삶의 길에서 작가는 글쓰기를 즐거움으로 받아 들여, 운명에 따라붙는 잔혹성이 아니라 오히려 혹독한 삶에 파묻혀 자신을 파괴하지 않도록 붙드는 이유로 삼는다.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쓴다,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

 

“자기 안에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물론 이 책이 길을 제시해주지는 않겠지만, 본인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어요. 물론 자기가 느끼는 고통은 고유한 고통이죠. 다른 것들과 비교될 수 없는 고통이지만, 이와 유사한 종류의 감정들을 사람들이 많이 느끼고 산다는 것. 그게 위안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요.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는 사람, 아주 힘들어하고 자기 자신에 빠져들어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읽어 줬으면 좋겠어요.”

 

반어와 역설이 가득한 문장들이 작가인지 주인공인지 두 사람 모두인지의 내면에 폐쇄적으로 들어가 있는 느낌, 그 문장들이 그려내는 풍경이 얼핏 보였다가 곧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로 바뀐다. 비록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정제된 문장으로 써나간다.

 

이제야 고백컨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95

 

내용과 문장이 철저할 정도로 숨김없이 표현되어 압도되는 즈음에 위의 문장이 등장한다. 끝까지 감당하고 읽는 가는 독자의 몫이 된다. 어쩌면 작가는 이를 짐작하고 마지막에 작가의 말을 상당히 길에 실었을 지도 모른다. 혹시 자신의 엄중한 상황으로부터의 피난처로서 혹은 위안이나 구원으로서 이 글을 택했다면 그런 종류의 역할을 없다. 적어도 작가는 독자들을 자신의 감정을 쏟아 부을 쓰레기통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독자는 오히려 서운할 수도 안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다. 당신을 볼 수 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여기에 있다. 과잉의 고통이 있다. 119

 

나이를 먹는다고 사는 일이, 시대가 덜 힘겨워지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일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다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을지라도 버티고 견디고 살아가야 한다. 설사 그 고통 속에 끊임없이 변주되는 음악이 들릴지라도 말이다. 참 어렵다. 기력이 다한 낙엽처럼 쓸쓸히 자신의 삶을 읊조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혹시나 열렬하게 죽고 싶기도 하지만 그만큼 살고 싶은 심정을 지닌다는 것은.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도중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삶. 135

21장은 소제목에도 내용 전체에도 가로줄이 그어져 있다. 목차를 볼 때에도 그랬지만 심장이 달칵거리며 겁이 난다. 일말의 익숙한 희망도 없는 죽음에 관한 도무지 자비 없는 이야기.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마음이 서늘해서 뜨거운 커피를 자꾸만 내려 마셨다.

 

십 대에 암수술을 하고 꽤나 감성적일 뿐 아니라 진지해져 있던 그 시기도, 대학원 때 <죽음에 관한 철학> 강의를 받으며 발제발표를 하고 나니, 지도교수가 “너희들은 젊어서인지 이런 주제를 전혀 이해 못하는구나.”하신…… 살짝 발끈했던 그러나 실제 나이가 들어간다는 일이 느끼게 해주는 죽음에 대한 늘 떨리는 미세한 불안과 확인을, 그때는 정말 전혀 몰랐던 것이 사실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새삼 든다.

 

어쩌겠는가, 이만큼 확실히 보장된 미래 사실도 없고, 시기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일이 살아가는 일의 정체인 것을. 그래서 가끔은 가족, 친구, 지인, 타인 누구에게도 아무런 기대도 원망도 판단도 보류되는 일이 종종 있다. 나이가 들어 성품이 너그러워지고 유순해진 것이 아니라, 매일이 마지막일지 모르는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12월 31일, 유독 상세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살아가버린 2019년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다시 2020년 또한 단 1분도 잠깐 멈춤을 할 수 없이 흘러갈 것이다.

 

벌써 내년을 빌어주는 마음 착한 이들의 문자들이 도착하고 있다.

 

즐겁고 신나고 맘껏 유명세를 누릴 작품들을 쓰는 점점 더 영리해지는 양지의 작가들도 사방에 가득한데, 마치 직업윤리에 철저하게 부응하는 양심고백을 하듯 이런 글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던 천희란 작가의 일상은 따뜻하고 가볍고 포근하고 웃음이 자주 머무르는 그런 것이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3개월을 내 안에 오래 감춰둔 두려움과 충격과 즐거움을 꺼내 볼 수 있도록 함께 한 소설Q 시리즈에 다시 한 번 경애의 마음을 보냅니다.

​매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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