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할머니, 미생물, 그리고 사랑 - - 한 인간의 삶을 통해 고찰한 인문·생물학적 생장에세이
이낙원 지음 / 밥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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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안에 들어 있는 무언가가 호흡하는 모든 것을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고 믿는다.

 

호흡기내과 의사로서의 경력에서 비롯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인식을 그대로 선명하게 보여주는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할머니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역사적 생물’로 그려지고, 그런 할머니의 존재는 저자의 마음속에 별과 사랑으로 새겨져 저자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하나의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다소 생소한 명칭인 ‘생장체’로서 스스로와 우주를 마주하게 하는 전개로 나아간다.

 

시간이 가면 바뀌는 것들이 있다. 후임자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영역이 줄어들고, 또 넘겨줘야 하는 것들이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의 물리적인 몸 그 자체이다. 언젠가 몸 자체를 후임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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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는 조부모님과 함께 산 조손들의 기억은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다. 나는 정기적으로 찾아뵙는 쪽이었지만 모두 소천하신 지금도 만남의 모든 기억들은 언제나 언제나 환한 빛과 따뜻한 볕과 그리운 음식 향들로 떠오른다. 언제나 기다려주고 반겨주는 존재. 실재로 그러했든 아니든...... 그렇게 기억되는 존재들은 드물고 살아가는 일은 그런 존재가 엄청 귀하다는 것을 죽도록 쓸쓸하게 절감하는 경험을 포함한다는 것을...... 한 겨울 칼바람에 얼어붙은 듯이 멍하니 깨달았던 지난 기억에 늘 마음이 시리다.

 

참 이상하고 더 서러운 것이 그렇게 조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이전에 역시나 따뜻한 추억들로 채워지고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공간이었던 본가의 집들도 마당도 나무들도 하물며 공기도 하나같이 생명의 빛을 잃고, 아무리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도 싸늘하니 어딘가가 망가지고 무너져간 경험이다. 아무리 과거란 미화되기 마련이라 할지라도 과장 없이 솔직하게 심정을 토로하자면, 그렇게 나는 완벽하게 행복했던 그 시기를 지나 돌아갈 옛 집도 그리운 분들도 잃고 심리적으로는 불안과 걱정이 많은 가난한 어른이 되어 뜻밖에 사회적 고아 같은 기분으로 늙어가고 있다.

 

할머니의 음식은 일용할 양식이었지만, 단순한 포만감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이상이었다……. 내가 먹었던 그 모든 것들은 내 기억 속에, 그리고 내 몸을 이루는 세포와 식성과 정서 속에 남아 있다. 

 

대한민국 할머니들의 인생사를 얘기하는 데에는 당연한 듯이 ‘파란만장’이란 표현이 등장하기에 사전까지 찾아보았다. 딱히 저 적확한 표현이 생각나진 않지만, ‘파란만장’ 정도로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할머니들의 인생 얘기에 한 자리 끼어들지도 못하겠다 싶게 사전적 의미가 공허하긴 했다. 다사다난 억척같이 살아내다 보답과 보람과 영화는커녕 인생무상의 결말을 보는 분들이 얼마나 많으실지……. 떠들썩한 지가 꽤 오래 되었지만 아직 유투브도 책도 접하지 않은, 그렇지만 피할 수 없어 이런저런 내용들이 무척 익숙해진, 2019년 베스트셀러임이 분명할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역시 [별, 할머니, 미생물 그리고 사랑]과 ‘파란만장’이나 ‘다사나단’에서 궤를 같이하는 내용이 많을 것이다.

 

늘 한결같은 애정, 근검절약 정신, 부지런함, 이타성. 왜 대개의 할머니는 비슷했을까? 중략. 절약과 헌신이라는 이 품성의 절반 이상은 시대가 강요한 성품일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전후의 가난 속에서 자식을 길러내는 여성으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 시대 할머니들의 성품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자랐고, 전쟁 후에 자녀를 길렀고, 근대 산업화시기에 할머니가 되었다. 인류 역사상 이토록 가파른 언덕을 올라간 세대가 또 있을까.

 

예전에 유달리 피곤했던 어느 날, 조부모님 얘기를 들으면서 재밌기보다는 ‘아, 저 이야기는 200번쯤 듣는 것 같아......’하고 시큰둥 흘려들었던 게 여태 기억이 난다. 살다보면 그런 ‘진짜 이야기들’을 들을 기회가 귀한 건 줄 모르고,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역사가 절로 움직거리고 마음도 더불어 움직이는 그런 이야기인 줄 모르고. 가사문학을 즐겨 낭독하시던 조모의 음성을 어느 날 녹취한 짧은 분량 말고는 이제 그분들의 음성은 영영 들을 수 없다...... 라고 쓰는데 눈물이 차오른다.

 

이렇게 조부모님 얘기로 징징거려도 가여울 나이는 이미 한참 지났는데,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성장의 시기를 한참 넘어 부모님도 잘 돌아볼 줄 알아야하는 시기임이 분명한데, 누구에게나 남은 시간이 얼마나 짧을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인데, 아직도 갈무리 못하고 짜증을 부리는 나를 보자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 ‘내 짜증을 남에게 알게 하지 말라’를 새해 결심으로 올리고 만방에 공표해서 그 부끄러움에라도 기대 철딱서니 없는 짓을 그쳐보자 했는데, 아무리 잘 봐줘야 조금 어조가 덜 상스러워진 듯하기도……. 그 정도.

 


어떻게 읽은 책인지 정리가 안 된다. 감정이 엉클어졌는데, 동서고금 가족을 연상시키거나 환기시키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게 복잡한 작용을 하는 건 분명하다. 그냥 그 상태로 정리되는 건 다시 주워 담고 안 되면 다른 결심을 하고 그래야겠다.

 

오래된 기억을 조용히 하나하나 찾아내어 차분히 옮겨 적은 그리운 이야기 한 가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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