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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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소설과 번갈아 가며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을 바탕으로 한 팬픽 이야기가 교차 구성되어 있고, 매 시작에는 여성 아이돌이 부른 노래 제목들이 글의 제목처럼 달려 있다. 우리 집 꼬맹이 덕분에 들어본 아이유의 팔레트 말고는 처음 듣는 곡들이었다. 덕분에 글을 읽으며 음악을 함께 듣는 호사를 누렸다.

https://youtu.be/d9IxdwEFk1c

 

학창시절과 성장기 내내 담임교사나 아이돌 중 누구도 열렬히 좋아해본 적이 없고 팬픽(fanfic: 스타나 TV 프로그램, 영화, 소설, 만화, 음악 등 대중문화 작품들의 특정 팬들이 창작한 픽션 소설)이란 장르를 접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도 기분 좋은 조합인데, 팬픽에 익숙하고 아이돌들과 그들의 노래들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정말 기분 좋은 독서 경험일 듯하다.

 

한참 듣다보니 나에게도 신선하고 기분 좋게 다가오는 가사가 늘어난다.

 

갈 데 없는 기성세대 연령의 독자로서 더구나 텔레비전을 사본 적이 없어서 시청 기회가 아주 드물지만, 10대 초반부터 시작되는 다년간의 ‘연습생’ 시절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동/미성년 불법노동착취 르포 취재인줄 알았을 만큼 치열하고 고된 시간을 보낸다는 점을 알고 있다. 데뷔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연예계 특성 상 어쩌면 데뷔 전보다 더 치열한 경쟁에 휘둘리다 잊혀져가는 수순도 허다할 것으로 짐작된다.

 

준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열심히 하는 건 노력이고, 잘 하는 건 재능이니까.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재능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배웠다. 131

 

잘하지 못하는 건 열심히 하지 않아서인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 게 정말 열심히 한 걸까. 최선의 노력은 재능에 도달할 수 있을까. 재능에 도달하지 못하는 노력은 어떻게 되는 걸까. 준은 그 답을 알지 못해서 노력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134

 

다인의 동그렇게 커지던 눈을 기억한다. 그건 준이 처음으로 느낀, 무언가를 잘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또한 잘하고 싶다는 욕구였다. 찬란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득한 나락이었다. 준은 자신의 노래가 다인의 귀에 가닿지 못하고 흩어지는 순간을 상상했다. 준은 깨달았다. 초라해지는 거였다. 재능에 도달하지 못하는 노력은, 초라해지는 거구나. 135-136

 

물론 다른 직장인들은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경제적 보상이 따르는 경우들도 있지만, 사생활도 자기 생각도 자유로운 발언도 모두 그 대가로 치른 것이라면, 그에 더해 갖가지 악플과 오명에도 제대로 된 분노와 저항이 조심스러운 삶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랜 세월 견뎌야한다면 과연 그 단기적인 경제적 보상을 무엇과 바꾸었는지 불현 듯 생각이 들 것이고 그야말로 숨 막히는 삶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끊이지 않는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이 들리는 나날들엔 이런 우려 섞인 생각이 더 진해진다.

 

루비나는 무관심보다는 미움을 받는 게 낫다고 했다. 미움도 관심이 있어야 생기는 감정이라며 자신의 기사에 달린 모든 댓글을 읽었다. 나쁘다는 말로는 부족한 악한 댓글들을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마린은 동의할 수 없었다. 아이돌도 직업인데 왜 고행을 하듯이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06

 

그저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대답이 없는 질문들이었다. 질문이긴 한가. 요구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계속 웃다보니 웃는 게 편해져서 이런저런 손짓이나 눈짓 같은 걸 더했더니 그 모습이 또 귀엽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시는 건지”라고 할 수는 없었을 뿐인데. 107

 

몰론 팬 층도 당연히 다양하기 마련이고 이 책의 저자처럼 반짝이는 재능이 눈부셔서 사랑과 찬사를 보내는, 급기야 첫 소설을 팬픽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마음에 헌사하는 서로가 행복한 팬들과의 관계도 분명히 있다. 새삼스럽지만 뒤늦게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좋아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 뜨겁게 열렬히 몰두할 수 있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언제나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었다. 텔레비전이라는 걸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63

 

그렇게 외쳐야만 한다고 믿었던 사랑. 그런 사랑들. 167

 

<라스트 러브>의 본편은 무대 뒤와 화면 속 얼굴들 뒤에 숨겨진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냉정함과 시장에서 팔리지 않고 탈락 또는 소외되는 이들의 고민과 갈등을 상당히 생생하게 들려주지만 본격 고발 형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유행 아이템처럼 필요와 호감에 따라 쓰이고 버려지는 상품들이 개별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소비자이자 판관인 대중의 사랑을 받고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각종 위협에 무자비하게 노출되는지, 인간으로서 그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과 강박과 패배감을 아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함께 불러요.” 다인은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말은 없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끝은 올 것이다. “이제 기다리지 말아요.” 다인은 그 말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라고. 17

 

특별히 스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런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었다. 아주 많은 사람들.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다 헤아릴 수도 없고, 그래서 결국은 잘 모르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받고 싶었다. 열아홉 살의 루비나는 관심이라는 단어가 호의와 같은 뜻이라고 생각했다. 33

 

이런 이해가 더 널리 깊이 공유되는 분위기였다면, 적어도 “괜찮아요!”라고 웃으며 괜찮은 척 하다 끝내 자신을 놓아버린 어리거나 젊은 이들의 이면과 내면과 심정을 조금은 더 이해하고 헤아려줄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해진다. 모든 것이 쇼쇼쇼로 환원되고 거래되는 쇼 비즈니스라는 냉혹한 현실 사이사이에서 어떤 상상의 캐릭터이든 팬픽이라는 헌사에 담긴 다양한 사랑의 모양은 더욱더 눈부시고 애틋하다.

 

보고 있으면 괜히 웃음이 나고 그 순간엔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얼굴들. 이제는 볼 수 없는 얼굴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얼굴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얼굴들. 그 짧은 순간, 그래서 너무나 생생한 순간, 그때의 마음. 63

 

중략. 친구나 애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나에게 주는 건 좋은 음악과 볼거리가 전부인데, 어째서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돈과 시간을 바치는 게 아깝지 않았던 걸까. 저마다의 사정은 있을 테니 단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 그 사람들은 불행한 십대를 버틸 수 있게 한 존재였다. 중략. 현실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랑을 거부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 사랑을 거부한 적은 없었다. 거부당하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이 부족하거나 과하다 말하지 않고 언제나 고맙다고 답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랑이, 그런 사람이, 내 삶에 들어와 있는 게 좋았다. 그런 사랑과 사람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도록, 저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팬질이라는 걸 했다. 183-184

 

내가 쓴 최초의 소설이 팬픽이었던 것은 내가 사랑을 쓰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첫 책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서 기쁘다. 193

 

내 재능과 노력을 내가 자유계약을 통해 팔아먹고 살 수도 없는 시대, 고스란히 거대산업시스템에 팔아넘기거나 흡수되는, 단순하고 거칠게 표현할수록 더 잔혹하게 들리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노동력만 파는 것이지 노동을 파는 것이 아니라는 사회경제학 토론을 벌이던 오랜 세월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들의 계약서에 ‘시술과 수술을 동원해서라도 주기적으로 관리하야 하는 외모, 상황에 따라 연기 가능한 감정 노동, 유일한 사적공간과 거의 대부분의 사적관계에 대한 공개나 포기’ 항목이 사라지고, ‘오직 재능만’을 거래하는 공정거래가 이루어지고 미디어를 통한 소비형태도 그 재능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어서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어느 매듭을 풀고 잘라야할지 숙고를 거치지 않은 나의 생각과 얕은 고민은 떠돌기만 하나, 적어도 무소불위의 소비자가 되어 관심과 돈을 내어줄테니 대신 네 인생 전체를 세세히 엿보고 일일이 판단내리겠다는 태도는 무의식이라도 갖지 않도록 거듭 성찰해야겠다.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야기를 해주어 여러모로 바닥까지 우울해지지 않았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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