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의 후손
박숙자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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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제목과 저자를 짝 지어 외우는 그런 학습 방식이 어떤 교육적 의미와 효과가 있었는지 참 어리석고 안타까운 마음뿐이지만, 당시에는 그저 외우라니 열심히 외웠다. 그런 학창 시절이 지나고 나니, ‘정보’로 알고 있는 책들의 목록은 길었으나, 실제 읽어본 책은 드문 그런 어른이 되었다. 박숙자님의 [하멜의 후손]은 내게 그런 ‘책정보’ 중 하나인 [하멜표류기]를 떠올리게 했고, 나는 [하멜의 후손]이 더 재미있을 것이 분명하나, 과거의 기행적인 교육의 폐혜를 하나 극복해보겠다는 ‘사명감(?!)’에 [하멜표류기]를 먼저 읽어 보기로 결심했다.

 

표류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하멜과 그 일행은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조선을 향한 것이 아니라,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태풍으로 인해 제주도에 표착한다. 병영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임금 알현하고(요즘은 난민관련부서가 있지만 당시는 왕조의 특성 상 모든 결정과 재가는 임금이 직접!) 여수로 가서 탈출을 시도하고 그런 고난의 나날을 보내는데 이는 소설의 구성과 내용과도 거의 유사해서, 현실에서나 소설에서나 비슷하게 기구하고 딱한 삶으로 표현된다.

1653년 8월 16일, 악몽과 같던 그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토록 견고하고 아름답던 스페르베르호가 암초에 몇 번 부딪혔다고 해서 그렇게 어이없이 부서지다니! 선원 64명이 이 배를 믿고 넓디넓은 바다를 항해하며 삶의 터전으로 삼고 아끼며 사랑하지 않았던가? 한정된 공간에서 같이 먹고 생활하며 서로 의지하는 가운데 다투기도 하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던 동료들이 파도에 떠밀려 해변에 시체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하멜은 기가 막혔다. 54

 

하멜은 결국 13년간 조선에 머무는데, 이때 쓴 글이 하멜표류기이며, 이는 하멜이 관심 가는 주제로 자의로 글을 쓰고자했던 것이 아니라, 밀린 월급을 청구하기 위한 증거자료로 제출할 목적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횡령과 배임과 세금유용이 판치는 21세기 대한민국을 목격하고 사는 입장에서 17세기에도 꽤나 분명한 구체적 증거자료를 요청한 점이 부럽기도 했다. 보고서 성격이라 무미건조하고 사실 위주로 쓰여서 기대한 것처럼 흥미롭거나 재미가 있지는 않다는 평가가 주이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점들도 있었다. 어쨌든 17세기 서양인의 눈으로 본 조선의 모습이란 처음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스님들과 사이가 가장 좋았는데 그들은 매우 관대하고 우리를 좋아했으며, 특히 우리가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의 풍습을 말해 주면 좋아했다. 그들은 외국 사람들의 삶에 대해 듣기를 좋아했다. 만약 그들이 원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밤새도록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 것이다. 49

 

50~60년 전에 그들은 담배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때 일본인들이 그들에게 담배 재배술과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일본인들은 그 담배씨를 남반국에서 가져왔다고 말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남반코'라고 부른다. 이 나라에서는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여자들은 물론 네댓 살 되는 아이들도 담배를 피운다. 123

 

또한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난민허가 받기가 가장 어렵다는 대한민국인데, 효종이 하멜과 일행들에게 "그대들의 신변을 보호해주겠고, 여생을 마칠 때까지 적당한 식량과 의복을 지원해주겠다."는 평생지원을 약속한 것이 조선의 복지에 대한 공부가 없는 나로서는 그저 놀라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멜과 동료들이 목숨을 걸어가며 탈출을 시도한 점이 거부감 없이 잘 이해가 된다. 고향에 가고자하는 마음이야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두 책을 번갈아 읽다보니 일반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이유말고 하멜이 조선을 떠나야했던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물으며 상상하며 쓴 책이 [하멜의 후손]인 것처럼 느껴졌다. 가장 큰 차이점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설에서는 하멜이 무당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 후손이 살아가는 모습까지 보여 준다는 점이다. 그러니 하멜을 제외하고는 모두 허구의 인물들이다. 소설이지만 개인사뿐만이 아니라, 역시 배경이 근대사의 큰 역사적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서 시기라 역사적 정보가 풍부하여 역사이해 참고도서의 역할도 하는 장점이 있다. 등장인물들이 사투리를 쓰는데, 이는 걱정했던 것보다 가독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나의 할아버지 남건열은 1936년에 출생하여 일제 때 유년기를 보냈고, 해방과 나라의 분단 그리고 끔찍한 6.25 전쟁 등, 변화무쌍한 시대를 다 거치신 분이야.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다복한 인생을 사셨지. 물 건너 삼신리 선이의 딸과 결혼하여 오동리에서 조용히 살았어. 그분의 부친 남민석, 그러니까 나의 증조부가 일본에서 가져온 돈으로 마련한 논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군색하나마 단란하게 삼 남매를 길렀지." 207

 

오랜만에 역사소설과 역사서 두 권을 뒤적이며 재밌게 시간을 보냈다. 정설은 아니라고 하지만, 만약 하멜과 그 일행들의 후손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독성이 좋은 역사소설이라 부모님께 한번쯤 권해드리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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