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이금하 1
명전우후 지음, 이지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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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왓챠플레이에서 드라마를 방영한다고 해서 2편을 연이어 보고 책을 펼쳤다. 꼭 드라마를 먼저 봐서는 아닌 듯한데,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들이 실제 인물들인 것 마냥 생동감과 존재감이 대단했다. 역자의 표현력도 중요한 공로가 있을 것이다. 17세, 고교시절, 첫사랑. 연애소설……. 이런 내용을 지금에 와서 잘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자신에 의심(?!)도 들었지만, 어쩐지 10대 시절을 실감나게 떠올리게 해주는, 혹은 그 시절의 느낌을 다시 비슷하게 느껴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쌀쌀한 날의 달달한 간식이나 선물 같은 이야기를 읽어 본 기억이 없는 듯해서(단지 기억을 잘 못하는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주책없이 설레면서 읽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일은

바로 너와 함께 천천히 늙어가는 일

소소한 행복들을 내내 간직해두었다가

나중에 흔들의자에 앉아 천천히 이야기하고 싶어


그 나이에 느낀 감정이 변하지 않고 계속 간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고, 만약 계속 간다면 그것 또한 무척 행복한 일이라고.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을 만난 후부터 당신은 어디에나 존재해요.


표지 색감을 보면 나이가 든 나로서는 살짝 억울해서 클리셰처럼 느껴고 싶을 만큼 대비를 이룬다. 푸릇푸릇한 청춘이라 파릇파릇한 표지. 예상과 달리 1권을 당황할 만큼 오래 시간을 들여 읽었다. 484+488(1, 2권 페이지 수)이 적은 분량은 아니지만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 술술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국가도 시대도 캐릭터도 모두 다른데 어쩐지 얼마 읽지 않아서부터 자꾸만 나의 10대와 그 세계의 친구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20여년이 지나서 그때 받은 편지들(편지를 봉투와 함께 모으는 습관이 있다)이 갑자기 떠올라서 찾아 읽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멍하니 잠시 쉴 시간도 필요하고, 마음이 조금 답답해져서 창을 열면 서늘해진 가을바람이 창가를 타고 마음에 들어와 머물러서 회환과 오한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했다.


진짜 두려운 건 자신한테 지는 거야……. 자신의 길은 자신이 결정해야 해. 다른 사람이 네 감정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쉽게 실망하고 상처받게 돼.


사랑은 두 사람 사이의 일인데 나는 지금 왜 굳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애쓰는 걸까?

 

과시는 자신감 결여의 표현이다. 내가 믿지 못하는 건 도대체 무얼까? 허뤄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점점 늘어났다.

 

일 년 중 단 하루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세월이 이토록 오래 무탈하게 쌓여갔는데, 아직도 남아서 떠오를 여지가 남은 장면들이 그 세월을 살아남았을 줄이야. 다른 어림직도 계산도 아무 것도 없이 오롯하게 순정한 감정들로만 채워진 관계들, 그런 친구들이 소중하고 좋아서, 만나서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한 만큼 헤어지는 게 매번 아쉽던, 그래서 혹시 소식 모르고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일이 생길까봐, 그럴 경우,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꼭 어디서 만나서 생사를 확인하자, 이런 약속도 나누었다. 아무도 그 당시에는 그 약속을 어길 거라 생각지 못했(을 거라 미루어 짐작)지만, 나는 결국 해외에 있으니까,란 핑계를 핑계 삼아 그날 그곳에 나가지 않았다.


반지로도 사랑이 떠나가는 것을 붙잡아 둘 순 없어

누가 좀 말해주지

사랑이 이처럼 쉽게 끝나버린다는 것을​


매번 수화기를 들면 의례적인 안부 인사를 전하고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고 나면 금세 침묵이 찾아왔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적당한 화제를 찾을 수 없었다. 미래는 너무 멀고, 현실은 너무 무거우며 과거는 너무 제한적이었다.

 

“감정이란 게 매몰 비용이야. 꼭 그 사람의 모든 게 다 좋아서 이러는 건 아냐. 그저 너무 많은 걸 쏟아 부어서 회복하기 어려운 것뿐이야.”

“매물 비용인 걸 알면서 계속 투자하겠다?” ……

“응 그게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니까.” ……

“다 털리고 파산하긴 싫으니까.”

 

“나도 그런 말을 했었지. 근데 사랑하지 않을 때 했던 말들은 다 무효야.”


사랑스러운 만큼 질투와 시샘이 나는 눈부시고 뜨겁고 아련하고 눈물 촉촉한 그 해 여름이야기가, 실제로 어느 해 출근길 마지막 횡단보도를 못 건너고 눈물이 쏟아지던 황망한 그 시간을 리플레이 시키는 바람에, 내게는 무릎을 꿀리는 막강한 위력으로 다가왔다. 책을 읽는 내내 겁이 났다. 잃어버렸든 버려버렸든 그 이야기, 그 시간.


그녀의 삶은 마치 새롭게 펼친 일기장처럼 공백의 상태였다. 하지만 어제 쓴 글씨가 너무 진해 종이에 배겨서 오늘 펼칠 이 페이지에 패인 흔적이 남았다. 자칫 지난날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새로운 이야기로 그 모든 것을 가릴 수 있진 않을까?


나뭇잎이 분분히 덜어지던 그 계절, 듣고 싶었던 약속을 끝끝내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을에는 더 이상 선택을 미룰 수 없었다……. 선택의 저울 앞에서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따라 자신의 판단의 추를 움직여야 하는 걸까?...... 어차피 닥칠 일은 언제고 닥치게 마련이고, 떠나간 것은 결국 구름과 연기처럼 희미해지기 마련이었다.


일 권을 읽고 나서 접힌 귀들을 다 펴보니 내용이 이러하다. 호되게 감정의 소용돌이를 빠져 나왔더니 2권은 다른 의미로 당황스러울 만큼 재밌게 편안하게 읽혔다. 어쩌면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고(혹은 하고 싶지 않고), 잘 이해가 되지 않던 그 때의 나를 이제야 이해해보고자 천천히 일 권을, 허뤄를 알아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각자의 기억은 각자의 것이고, 기억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미화되고, 자신에 관해서라면 언제나 변명할 이유가 자동 생성된다는 점을 익히 아는 지라, 내가 아무리 절실하게 '작은 진실들'을 알고 싶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해 새로 알게 된 내용도, 극적인 반전과 더불어 새롭게 이해되는 사건도 없지만, 난, 혹은 내가 사는 이야기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하나를 지켜내는 일도 참 자주 실패하는 나약한 존재란 생각은 든다.


이제 우리 각자 높이 날아오르는 거야. 지난 일은 그냥 지나가 버리도록 내버려둔 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잖아.

 

그만하자.

헤어지자.

잊어버리자…….


첫사랑의 추억이 강렬하고 잔뜩 남아 있는 독자들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어야 할 것이고,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를 믿는 분들은 더 조심하셔야 한다. 볕이 눈부시지만 한 줄기 바람에도 마음이 긁히는 가을이라 더 그러하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았다. 만남도 헤어짐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수많은 인파 속에서 당신과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해도 말이다......"

 

난 너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너와 함께 이 길을 끝까지 갈 꺼야.
........................................

 

*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혹은 치아'로 번역되어야 할 부분이 '이빨'로 표기되어, 저항을 해보았지만, 몰입에서 강제로 빠져 나와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아닌 분들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표기법'이 문제가 아니라, '이빨'에선 왜인지 매번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고질병이 있다.

 

이토록 대단한 번역 작업을 하셨는데, 이런 웃기는 이유를 들어 지적을 해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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