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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생긴다. 유괴/납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웠던 ‘스톡홀름 증후군’ 증상을 내가 가질 줄이야.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연쇄살인범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주인공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공감과 애정을 느낀다. 102세가 될 때까지 ‘자력구제’에 의해서 목숨을 지키고 살아남아야 했던 여성의 이야기가 기막히고 슬프고 무서운데 ‘재미있고 통쾌하다’. 폭력적인 내용들이 묘사되는 부분에서는 심장이 막 떨렸지만, 적지 않은 분량인데 어느새 끝이다. 102년을 살아낸 한 인간의 삶이 펼쳐지는데, 지루하기는커녕 전력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호흡이 멈추고 끝에 이르는 극강의 흡인력을 가진 작품이다.
첫인상은 한 세기를 시난고난하며 살아 온 눈물콧물 다 빠지는 분위기일 거라 짐작했는데, 일단 이렇게 웃길 수가 없다! 격변하는 현실 속 파란만장 인생을 이렇게 묘사하는 필력이 압권이다. 나는 곧 이 ‘할머니’에게 반했다. 살아오며 직/간접적으로 겪은 모든 체증을 빵!빵 날려 주는 처음 만나는 주인공 유형의 여성이었다. “Dam, that woman's fine!(Luther)” 이런 분위기가 여태 재밌는 줄 모르고 살았던 프랑스 소설의 유쾌함인가, 뭔가 막 엄청난 손해를 본 것처럼 억울한 기분이 살짝 들었다.
배경은 무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시작한다.
인생은 짧아, 이것아......
세상의 규칙 따위...... 아무 상관없다고......
살아야 해...... 할미 말 들어!"
"아내를 때리고, 고문하고, 파괴하는 남편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아......"
"넌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내보일 수 있니?
정의와 법은 정략결혼처럼 서로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야."
하지만 뤼시앵은 설득력 있는 반대 논리를 펼치는 대신, 보다 충격적인 논리를 선택했다. 요컨대 베르트의 따귀를 갈겼다. 부족한 지성을 크게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선조들의 방식. 남자들은 늘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바꾸겠는가?
"자, 이제 알겠어? 아내에게 응당 자상하게 대하는 대신 구타를 일삼으면, 아내가 당신 무덤을 파면서 신바람이 난다는 걸? 이래도 자기가 얼마나 잘못된 남편인지 깨닫지 못한다면야."
"그날 이후로 그 더러운 나치 놈이 매일 밤 내 머릿속에서 맴돌거든. (...) 레지스탕스들은 나와 똑같은 일을 하고서 훈장도 받고, 용감하다고 떠받들리지만 말이다."
"난 그걸 전쟁범죄라고 보는데. 아니면 전쟁에 의한 정당한 범죄거나. 내 행동이나, 전장을 피로 물들인 우리의 용감한 병사들의 행동이나 다를 바 없다고."
1952년엔 여자를 노예화하는 것은 하등 범죄가 아니었다. 그들을 일명 가정주부라고 불렀으니까.
"어, 그래. 우리 여자들은 말이야. 선택의 호사를 누리지 못해. 우린 무엇보다 애 낳는 기계라고. 물론 그것도 모든 기능이 정상일 때 얘기지만! 출산과 살림, 우린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못해! 하지만 난 달라. 이젠 시대가 바뀌었고 난 평등을 원해. 그러니 당신도 집세를 부담해."
"여자가 권리만 주장했다하면 그 즉시 생리대를 들고 나오니, 이거 원. 저질에, 비루하고, 생산적이지 못하기 짝이 없네."
전쟁 속에 태어나 전쟁을 치르고 살아남은 베르트는 불평등과 불법으로 덕지덕지한 사회를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과격하고 과감하고 충격적으로 파괴해 버린다. 마치 ‘좋은 게 좋은 건 니들이나 좋은 거지’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는 남자의 머리통을 루거 총으로 날려버리는 행위로 대표되는데, 이때 머리통이 날아간 남자들이란, 1. 강간범인 나치군인, 2. 가정폭력범이자 위선자인 첫째 남편, 3. 성적으로 모욕을 일삼고 불임을 폭력의 정당화 수단이자 공격의 수단으로 삼던 두 번째 남편, 4. 부부강간과 미성년자 강간범 세 번째 남편, 5. 제 쥐꼬리만한 재능을 이유로 여성을 마구 착취해도 된다고 비하를 일삼던 네 번째 남편, 6. 스스로를 구원자라 여기던 망상증 다섯 번째는 스스로 죽음, 7. 베르트의 유일한 사랑인 루터를 인종차별의 희생자로 살해한 인간쓰레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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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법치주의에 반하는 삶을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가능한 그럴 것이지만, 소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처벌을 받지도 않는 ‘백 번 죽어 마땅하고도 남을 인간들’이 한 개인의 인생에도 이렇게 끝없이 등장하는 일이 과연 픽션뿐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고 두렵다. 미제의 역사적 범죄들에 대한 연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대한민국의 일본군성노예로 고통 받은 한국의 할머니들의 삶이 피할 수 없이 교차된다.
그래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덕분에 나는 울기보단 자주 크게 웃으며 책을 끝까지 읽었고, 마지막 베르트의 선택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긁히는 듯 아팠다. 그 모든 위태로운 시절을 견뎠으나 끝내 유일한 사랑을 멍청한 인간들의 생각 없는 폭력으로 잃고 만 베르트의 힘겨운 인생이 절망적이게 숨 막혀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에 베르트 못지않은 한 세기를 살아낸 수많은 할머니들이 한 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지도 못하고 한 분 두 분 떠나시는 현실이 몸서리쳐지게 죄스러워서 그러했다. 그분들도 이처럼 단 한번이라도 속 시원한 순간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페미니즘 스릴러’라는 소개는 작품에 훨씬 못 미치는 명칭이다. 설마 한 인간의 전 생애를 설명하는데 페미니즘과 스릴러로 충분하겠는가. 치장도 포장도 불필요한 날 것 그대로의 화법과 사건 전개, 마치 내 삶에 부끄러움이란 한줌도 없다는 할머니 심정을 녹취한 듯한 문장들이다. 프랑스어 원서는 모르겠으나 역자의 필력 또한 대단하다는 존경심이 든다. 이 책이 승승장구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키길 바라는 마음 한편에는, 한국 사회의 온갖 위선들이 교양과 전문지식의 탈을 쓰고 또 힘을 받아 떠들어 댈 일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나는 확신한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독자들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통쾌함을 경험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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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 따라 이 소설의 결말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열린 결말인지 해석이 다를 것이란 생각이 든다. 통상 희극보단 비극이 깊이 공감할 힘이 있고, 독자를 변화시킬 여지가 있다고 믿지만 역시 맘 깊숙하게 슬픔이 차오르고 한동안 기운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02세를 생존한 베르트를 알게 되고 그를 보내고 이제 나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제대로 생존하기 위해’ 갈 길은 까마득하지만, 법을 고치고 제도를 정비한 후에도 차별적 요소들이 더 이상 사회에 만연하지 않도록 끝장을 내려면, 함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작을 업데이트하는 일은 매번 살짝 힘겹다.
표지의 색감이 불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생명력이 가득하고 아름다워 한참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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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허브티와 위스키를 준비해둬, 곧 갈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