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자국 소설의 첫 만남 10
김애란 지음, 정수지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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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만 ‘쉬는 날들’일 수 있는 그런 연휴가 다시 다가온다. 쉬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연휴를 위해 ‘칼’을 들어 온갖 식재료에 ‘칼자국’을 남길 이들의 고단함을 생각한다.

 


긴 세월, 자루는 몇 번 바뀌었으나 칼날은 그대로였다.

​날은 하도 갈려 반짝임을 잃었지만

그것은 닳고 닳아 종내에는 내부로 딱딱해진 빛 같았다.

​어머니의 칼에서 사랑이나 희생을 보려한 건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그냥 ‘어미’를 봤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자식이 아니라 새끼가 됐다.

 

어머니의 칼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 안에서는 오랜 시간 한 가지 기술을 터득한 사람의 자부와

먹고 살고 있다는 안도와 단순한 일을 반복할 때 나오는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어머니는 좋은 어미다.

​어머니는 좋은 여자다.

​어머니는 좋은 칼이다.

​어머니는 좋은 말[言]이다.

 

어머니의 몸뚱이에선, 계절의 끝자락, 가판에서 조용히 썩어 가는 과일의 달콤하고 졸린 냄새가 났다. 세계는 고요하고 몸은 녹진녹진했다.

 

내 컴컴한 아가리 속으로 김치와 함께 들어오는 어머니의 손가락맛.

 

부엌에서 어머니가 이런 저런 것을 재우고, 절이고, 저장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새끼답게 게으르고 건방져지고 싶었다. 어머니가 바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방바닥에 자빠져 티브이를 보거나 문지방에 기대 잔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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