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앤 걸 클래식 컬렉션 1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고정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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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앤을 생각하면 그 독보적인 생명력으로 인해 언제나 꽃이 활짝 핀 햇살 좋은 봄날이 떠오르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표지 안에 다시 돌아온 [빨강 머리 앤]은 마치 가장 설레고 들떴던 크리스마스의 아침 같다. 발을 동동 구르며 온 집안을 한번은 달려 보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행복하고 따뜻했던 그 시기.

 

얼마나 내용이 정확히 기억날까 궁금하고 재밌는 기분으로 목차를 천천히 읽었다.

대실수, 상상력의 잘못된 사용, 허영심이 안겨준 절망. ''이다!

이런 주인공은 앤밖엔 없다!

 

그리고 앤만큼 그립고 반가운 레이첼 린드 부인, 매슈 커스버트, 마릴라 커스버트, 그린게이블스, 다이애나, 스테이시 선생님.

 

사실 어릴 땐 앤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하루에 딱 한 시간만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앞에서 화려한 색감의 장면들이 펼쳐지고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라는 주제가를 따라 부르는게 신났다. 너무너무 수다쟁이라 친구라면 싫을 것도 같았고 워낙 사고를 많이 쳐서 같이 혼날 것 같아 친해지기 싫은 친구처럼 느꼈다. 그래도 재미가 없는 건 아니라서 가끔은 아주 크게 웃기도 했고 앤이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래서 이다해 작가, 기자의 추천의 글 읽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고, 그때는 어려서 몰라서 몰랐던 것들이 이해되면서 비로소 앤의 처지가 슬프고 안타까웠다.

 

매슈를 처음 만난 앤이 "만나서 정말 기뻐요. 혹시 저를 데리러 오시지 않는 건가 겁이 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온갖 상상을 다하고 있었거든요"라고 말을 늘어놓는, 꽃이 하얗게 핀 벚나무에서 달빛을 받으며 잘 생각이었다고 쉬지 않고 말하는 '첫 만남'을 다시 읽는 지금은 울컥하는 마음에 잠깐 읽기를 멈추고 책장을 손으로 쓸어본다.

기다리고 거절당하는 일이 익숙한 앤은 환대가 아닌 거부를 근심한다. 상대방이 앤의 말을 기다리고 경청하지 않기 때문에 앤은 언제나 빨리 말하려고 한다. 하고 싶은 말을 늘 마음속에 가득 쌓아두고 있다.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만하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앤은 그 이유를 빨강 머리에서 찾는다. 하지만 빨강 머리와 마찬가지로, 앤이 겪는 어려움은 앤의 잘못이 아니다. 앤이 고아원에서 성장해야 했던 사실부터 시작해서. 8

 

극대화된 호감형으로 이미지화된 아역들이 계속해서 잡지와 텔레비전에 등장해서 매일 자신의 부족한 점, 못난 점을 상기시켜 주는 환경에서 자란 한국 사회의 여자아이들은 아마도 앤처럼 내면화된 깊은 상처가 다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앤처럼 꽉 차게 유년시절을 산 이도 없을지 모른다. 운이 좋으면 사랑은 받았을지언정, 응원과 격려는 충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또한 이 이야기는 머물 수 없는, 집이 될 수 없는 고아원에서 나온 앤이 떠나지 않아도 되는 곳, 집을 찾는 이야기라서, 원제는 <빨강 머리 앤>이 아니라 <그린게이블스의 앤 Anne of Green Gables>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지치도록 오랜 시간을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무려 지구 반 바퀴를 떠돌았고, 대게 그 두 질문은 한데 엮어지기 마련이라 결국은 이도저도 결정하지 못하고 도망 다닌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앤의 그 길고도 고달픈 여정이 이제는 가슴 저리게 느껴진다.

 

30여 년만에 다시 읽어 보는 앤에게서 나는 어린 내가 앤을 그다지 좋아할 수 없었던 나의 사회적 조건화를 반성한다. 앤은 그 어린 시절부터 살아서 좋은점들을 끝없이 발견해내는 능력을 갖추었지만, 나는 이제야 저체중을 유지해서 예뻐 보이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생존을 위한 운동이 더 시급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청순가련 따위 일고의 가치가 없고 그저 가까운 이들 모두가 건강하게 평안하게 일상을 꾸리는 일이 제일 중요해 보인다. 그래서 가까운 이들이 걱정하고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능한 자주 서로 즐겁게 함께 할 시간이 많기를 바란다.

 

나도 그 시절의 앤처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정말 행복해요. 지금 기도를 하라면 전혀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동화책으로, 애니메이션으로, 가장 최근까지 영화로 나를 즐겁게 웃게 해 줬던 ''을 이제는 우리 집 꼬맹이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꽃만큼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꽃보다 더 아름다운 표지디자인이 정말 감사하고 귀중한 마음이 들었지만, 역시 아직 이 책은 꼬맹이들보다는 한 번 더 ''를 위한 것이다. 꼬맹이들은 추억이 없으니 원하는 마음도 없을 것이지만, 나는 아직 ''과 더불어 살고 싶다.

 

476쪽이라는 분량이 한밤중까지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파티처럼 신나고 흥분되는 선물이다.

 

 

https://blog.naver.com/kiyukk/221627753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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