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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과 똑같은 고민을 하는 나에게 - 늘 같은 곳을 헤매는 나를 위한 철학 상담소
마리 로베르 지음, 김도연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9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신만의 고민상담사가 있는 걸까......‘누구도 누구의 인생을 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는 고민상담사를 기대해본 적이 없다. 오래 전 ‘정신과상담’ 신청을 했다가, ‘왜 완전한 타인에게 가장 어렵고 내밀한 이야기를 설명해야하지?’란 생각에 황당하고 서럽고 분해서 시간 내내 울고 (계산하고) 나온 적이 ‘상담’과 관련된 유일한 기억이다. 제일 듣고 싶지 않은 시답잖은 위로는 “다 그렇게 살아.” 그래서 뭐?
인정하고 포기한 지 오래 되었지만 기성세대가 되었을 뿐, 도무지 ‘어른’은 언제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눈먼 장님이 될까 두려워 자연과학대를 나와 철학과 대학원을 진학했다. 텍스트를 질리도록 읽은 이외에 그래서 일상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는 딱히 자랑할 만한 게 없다.
그런 씁쓸한 자각 중에, 『1년 전과 똑같은 고민을 하는 나에게』의 원제가 너무도 재기발랄해서 덕분에 웃었다(칸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KANT TU NE SAIS PLUS QUOI FAIRE).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편의 소제목이 [나는 왜 1년 전과 똑같은 실수를 하는 것인가]인 점을 생각해보면, 가히 철학 전공자가 선택할만한 위트 있는 제목이다.
그리고 상상도 못해본 직업, 프랑스에는 ‘철학 상담소’가 있다는 것에 놀라움과 반가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낀다.(혹시 알고 계셨던 분~!) 가장 필요한 철학자를 ‘처방’해줄 수 있다니! 그런 직업이 있다는 것이 소설처럼 들리지만,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정말 그때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해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인문학은 인생 망치는 확실한 전공이라 공공연히 비웃고, 돈과 시간이 있는 이들이 시간 낭비하는 선택이란 비난도 없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이 특히 철학이 인생과 인간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진지하게 유통될 수 있을 것인가. 아마존의 누군가의 서평처럼, 일상의 ‘생존키트’라 불릴 날이 올 것인가.
철학 사상을 알아간다는 건 지식을 쌓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철학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알려주며, 우리에게 닥친 일들을 한 걸음 물러나 제3자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10
이 신기한 책은 12명의 철학자들 - 밀, 에피쿠로스, 아리스토텔레스, 니체, 스피노자, 플라톤, 파스칼, 레비나스, 하이데거, 칸트, 베르그송, 비트겐슈타인 - 의 주요 개념을 소개하며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와 고민을 상담하고 해결하는데 목표를 두는, 야심찬 철학현실응용 보고서이다.
철학자들은 욕망을 절제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진정한 욕망이 뭔지 알아내는 것.
그것이 미덕이라고 말한다.
마리 로베르
저자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고민은 ‘나를 모르기 때문에 시작된다면,’ 그런데 ‘욕망은 죄가 없다면, 그래서 욕망하는 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면(스피노자),’이런 이야기에 동의할 수 있다면, 이 책에서 친절하게 소개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우선 들어보는 것은 절대 시간낭비가 아닐 것이다.
더 나아가 관심가는 철학자들의 원 저작을 함께 읽는 즐거운 독서모임들이 생겨났으면 좋겠단 꿈을 꾼다. 그런 모임들이 언젠가는 대한민국의 ‘철학상담소’로 정착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지 않고 다른 이름이더라도 수 세기에 걸쳐 일생을 바쳐 태어난 모든 철학들이 기피되지 않는 사회를 목격하는 일은 그야말로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선물일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이 익숙하고 분명히 그들의 저서를 읽었으나,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은 스스로를 원망하며, 지금 이 순간에서는 다른 이야기보다 더 오래 나를 붙잡아두는 구절들을 발췌해본다.
에피쿠로스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문제는 행복하지 않다는 두려움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이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외부 세계에 덜 의존하고, 적게 가졌더라도 자족하며 존재의 기쁨을 최대한 누리는 것이다.(중략) 그의 야망은 오로지 단순한 욕구를 충복하며 살아가는 것, 가능한 한 가장 소박한 취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40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은 앎과 행동 사이에 있다. 흥청망청 살다가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더 나은 모습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현재 자신과 투쟁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올바르게 행동하겠다는 의지를 계속 다지다 보면, 일상생활에서 하는 모든 행동이 어느새 그 의지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꾸준히 반복하는 일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단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라고 말한다. 59
니체는 사람은 저마다 자신 안에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에너지가 우리를 더 멀리 가게 하는 ‘힘을 가진 의지’이다. 니체는 생명이란 본능적으로 성장하려 하고, 생을 지속하면서 힘과 능력을 축적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힘을 향한 의지가 부족하면 생명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 75
현자는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주변의 것들을 제대로 알고, 무엇이 자신을 괴롭히는지 이해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불쾌한 기분을 갖지 않고 흥분하지 않기 위해 욕망을 표현하는 순간부터 욕망의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95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위한 설계도를 만든다. 그러나 '현재'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쉽게 배격한다. 마치 '현재'의 삶이란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자들에게만 주어져 있다는 듯이 말이다.125
파스칼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에 주목한다. 인간은 모든 일이 잘되고 있을 때는 행복과 충만함을 붙잡아두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을 즐기는 대신 영속적인 불안감에 잠식당한다. 127
우리는 타자를 통해 우리의 이타성을 확인한다.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반드시 그들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관계의 위기나 우리가 느끼는 배신감, 변화의 시간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같다. 그들을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타자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바로 주고받는 애정이 비대칭일지라도 때로는 우리의 헌신이 보상받지 못한다고 느낄지라도 말이다. 145
그리고 역시 마지막은 우리가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건 어제와 다른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죠(72) 니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