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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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술술 읽히는, 속도와 집중력이 잘 맞아 달리는 소설 작품이 있는 한편, 자꾸만 멈춰야 하는 소설이 있다. 지루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누가 쳐다보지 않아도 흠칫 놀라며 울음을 꾹 삼켜야 하는 작품도 있고, 속절없이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고야 마는 작품도 있다.

 

[경애의 마음] 이 소설은 일면식이 없는 작가가 내 삶을 조용히 바라보고 담아낸 듯한 느낌을 주는 글이었다. 잘 알려진 시구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만, 흔들리지만 꿋꿋하고, 담담하고, 굳건하고, 담백한 그렇게 보내는 사랑, 이별, 아픔, 인생.

외롭지 말자, 같이 견디고 같이 나아가자,

잊지 말자, 지지는 말자,

따뜻하고 조심스럽고 공손한 위로.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야채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176

 

나는 이 문장에 왜 그리 깊이 흔들렸는지 모르겠다. 가장 절망했을 때 필요한 것이 잘 자고 잘 먹는 거,라는 공감이 있어서인가. 왜냐면, 전혀 못 자고, 전혀 못 먹는 고통이 분명 있으니 말이다.

 

참 이상하리만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선하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나도 평생 이런 착하고 선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서 뉴스의 폭력성과 가학성에 진심으로 놀라고 충격을 받는다. 이렇듯 선한 이들이 풀어가는 잔잔하고 따뜻한 이야기와 가치관들, 수없이 많은 배울 점들이 있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기우에 미리 한 가지 지적하자면, [경애의 마음]이 개인연애서사가 다는 아니라는 것이다. 각자의 삶이 그렇듯 소재가 다양하고 의미가 풍부하다. 특히, 부당함에 강단있게 맞서는 파업과, '조선생'으로 명명되는 동료가 들려주는 노동 윤리와 설화들은 가슴이 뻐근한 감동을 안겨 준다

 

정신적 독립을 이루려면 경제적 독립이 전제되어야 하듯이, '일자리, 밥벌이'라는 것이 '마음'의 문제에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일은요, 일자리는 참 중요합니다. 박경애 씨, 일본에서는 서툰 어부는 폭풍우를 두려워하지만 능숙한 어부는 안개를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안개가 안 끼도록 잘 살면 됩니다. 지금 당장 이렇게 나쁜 일이 생기는 거 안 무서워하고 삽시다. 나도 그럴 거요.”30

 

이 조용하고 따뜻한 소설은 의외로 공을 들여 시간을 들여 읽어야 머릿속에서 제대로 완결을 보여 준다. [경애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그 시간이 지나야 각자의 목소리로 정리될 것이다.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이 책을 읽고 포스트잇을 많이 붙였다. 그만큼 적어서 눈에 띄는 곳에 두고 읽어 보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그 인용을 일부 올린다.(스포일러 주의!^^)

 

처음에는 작고 깨끗하고 포근해 보이는 눈이지만 얼어붙었을 때에는 얼마나 쓰라린 느낌을 주는지. 그건 사랑이 사라지면서 남기는 날카로운 상처와 같았다.9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27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그려지는 것이 슬펐다. 35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대체 끝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실감하고 확신하는지 알 수 없었다. 끝이 만져진다면 모를까. 느끼는 것이고 상상하고 인식하는 것인데 지금 내가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끝을 말해. 60


설거지도 빨래도 요리도 하지 않는 일상에서는 오로지 오늘만 있는 것 같았다.

산주가 있었던 어제도 없고 산주가 없는 내일도 없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사이에서 되도록 현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경애의 마음만 있었다. 96


그러니까 인생은 손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포기해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마음의 번뇌와 갈등, 고통, 어떤 조갈증, 허기 같은 건 지병처럼 가져가야 하는 것이었다. 143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는 육체 너머의 것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랑은 멈춰진 기억을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사라진 누군가는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의 인생에서 다시 한 번 살게 된다는 것. 161


각오는 그렇게 대단치 않은 것들이 버려지는 가운데 무언가가 무언가를 거스르는 마음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169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만들어낸 것은 기회가 아니라 일종의 시험에 가깝다고. 285


"그래서 그놈, 아니, 그 사람에 관한 마음은 어때요?"

"그냥 있죠. 어떤 시간은 가는 게 아니라 녹는 것이라서 폐기가 안 되는 것이니까요, 마음은." 297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들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구원은 그렇게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시흥의 창고에서 생각했다. 307


이별이 분노나 실망감, 적의 같은 단일한 감정으로 이루어졌다면 오히려 품고 살아가기가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순간순간 전혀 반대의 감정이 몸을 부풀려 마음을 채우기에 아픈 것이었다. 316


요즘 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그걸 했던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합니다. 그 시간의 의미가 타인에 의해서 판결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320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349

 

 

[경애의 마음]으로 위로 받은 마음에는 한 가지 질문,을 가장한 소망이 남는다.

 

누구도 누구를 아프게 다치게 하지 않고 순하게 순하게 살 수 있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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