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다림에 비해 너무나 빨리, 기대에 비해 너무나 빨리 읽어버린 책.
여름의 무더위가 지나도록 그 상큼함이 그치지 않는 추리전집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고 아쉽다.
평온하게 이어지는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주적인 힘들이 신비롭게 균형을 맞춘 기적인지는, 그 일상이 깨어져봐야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은 극적인 사건일 필요도 없다. 가장 흔한 예로 가족 중 누가 아프다면 단박에 일상이 산산조각날 수도 있다.
평범하길 원했지만 평범할 수 없어서 평범한 척이라고 하며 살아야했던 이들의, 누군가의, 우리고 우리의 살아가는 순간들.
레몬, 레몬, 레몬.
여름에 레몬사탕을 입에 물고 무더위 짜증을 부리는 대신 만약 비교적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면, 제대로 그 순간을 감사하며 다시 읽을 것이다.
레몬, 레몬, 레몬.
입 안이 아니라 머릿속에 레몬의 맛과 향이 퍼지는 듯하다.
가제본에 이은 단행본 뒷 부분 마지막 인용을 올린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식당 주방에서 일한다는 그들 남매의 엄마는 난쟁이였다. 선우를 좀 더 가혹하게 눌러놓은 것처럼 작았다. 그 엄마를 보자 이상하게도 내가 앞으로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졌다. 내가 살아갈 방향도 정해졌다. 일단 엄마에게서 독립할 것이다. 엄마는 어떤 일에도 연루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다시 엄마에게 돌아갈 것이다. 145
결국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 라고 다언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 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선을 긋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닌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179
죽음은 우리를 잡동사니 허섭스레기로 만들어요. 순식간에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179
그해에 일어난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어쩌면 다언의 삶이 끝난 후에도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끔찍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190
소리는 이렇게 귀로 듣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소리는 소리일 뿐이다. 194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198
찰나에 불과한 그 순간순간들이
삶의 의미일 수는 없을까. 199
내용이 결말이 레몬의 의미가 궁금하시다면 책을 읽으셔야 한다.
어찌나 앙증맞고 재미난 지 누구에게라도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무더위가 몰려 오는 여름에 [레몬] 한 권 맛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