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4
후지이 다케시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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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 후지이 다케시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 보완하여 책으로 펴낸 것이다. 책에는 머리말이 추가되고 결론은 본론 요약을 제외하면 거의 다 새로 썼다. 대충 훑어보긴 했지만, 본론에서는 제출된 박사학위 논문과 큰 차이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35천 원이라는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riss’라는 사이트에서 저자의 학위논문을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니(후지이 다케시,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0), 이쪽을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후지이 다케시는 서론에서 이렇게 묻는다.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건국되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후지이 다케시가 조선민족청년단(이하 족청)을 통하여 재구성한 한국의 해방 8의 정치 공간은 그들 생각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로 매끄럽게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 책에서 족청계를 분석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사상적 특징 때문이다. 1945년 등장하여 1953년에 정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족청계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 위치한 존재였으며, 거시적으로 봤을 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가시화되는 가운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다양한 편차를 내포하면서 결합되는 양상의 주변부 수용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이 뒤섞인 족청계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이범석, 안호상, 양우정이었다. 이 3명의 공통점은 파시즘과 관계를 가지면서 형성된 민족주의였다는 점이다이범석은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훈련위원회 훈련단에서 훈련을 받으며, 장제스의 파시즘에 영향을 짙게 받았다. 이범석은 해방 이후 조직한 족청의 구체적인 운영 방식에도 장제스의 방식과 훈련단의 모델을 많이 참조했다. 안호상은 독일 유학 시절 히틀러와 나치즘에 깊은 인상을 받고, 칸트와 헤겔을 연구하며 실천에 대한 이론의 우위를 주장하는파시즘과 장제스식 역()행철학과도 친화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양우정은 1931년에 전향한 사회주의자인데, 그 전향 논리가 흥미롭다. 양우정은 유물론과 유물사관에 의문을 품고는 민족주의와 일본 파시즘과 그 논리를 공유하는 가족주의 사상으로 전향했다.

 

족청의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이범석이다. 따라서 족청의 이념은 이범석이 영향을 받은 장제스식 파시즘과 유사할 수밖에 없었다. 족청의 이념은 파시즘과 상당한 친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범석은 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 대 민주주의 전쟁으로 보는 공식적인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고, 오히려 패배한 독일·이탈리아·일본 측이 가졌던 전쟁 인식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동시에 이범석은 분명한 제3세계주의적 경향을 띤 민족주의자였으며, 반제국주의적 성격 역시 존재했다. 그리고 안호상 등을 통해 족청에 접목된 나치즘의 영향으로 족청은 반공주의면서도 반자본주의라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이후 족청계가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뒤, 어떤 이는 족청계의 파시즘적 행태, 다른 이는 “‘공산당적수법을 비판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족청계는 좌익/우익’ ‘반공/자본주의라는 이분법 구도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층위와 성격을 지녔다. 그리고 이러한 족청과 족청의 이념이 구체화된 것이 일민주의이다.

 

일민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는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안보의 공백이 발생한 지점과 겹친다. 이승만은 공산당과의 싸움이 아직은 사상적 싸움이라고 규정하면서, 사상적 싸움의 수단으로 민주주의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일민주의를 만들었다고 설명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한 내 좌익들의 사상적 전향을 이끌어내는 매개체로써 일민주의가 사용된 것이다. 전향은 폭력적 강압과 유도한 세트로 구성되었는데, 일민주의가 유도를 맡았다. 그리고 이 일민주의를 통한 전향으로의 유도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가 양우정이었다. 양우정의 공산주의 비판의 핵심은 민족주의를 기축으로 한 반공주의였다. 그는 민족을 강조하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더 나아가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까지 비판한다(물론 비판의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대한민국 헌법이기에 자본주의 비판은 다소 애매해진 부분은 있었지만). 일민주의를 통한 전향은 공산주의의 이항대립항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민족과 국가(대한민국)로의 전향이었다. , 일민주의는 좌익들을 포섭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물론 전향이 사상적 전향만이 아니라 지리산지구 토벌 작전과 같은 폭력적 강압에 의한 전향도 있었음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파시즘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일민주의와 족청계는 미국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50, 일민주의보급회를 조직하는 등 이범석은 일민주의를 통해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려 했지만, 경제 원조를 두고 이범석과 안호상을 경계한 미국의 압력으로 이범석 당시 부총리와 안호상 당시 문교부 장관이 사퇴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1952년 발췌개헌을 둘러싼 국회와 이승만 정부 사이의 갈등 속에서 족청계와 일민주의는 다시 정치 무대의 중심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일민주의는 이전에 계급성과 배타적 민족주의 성격이 상당히 희석된 협동주의의 형태로 재등장했다. 족청계와 이승만이 속한 원외자유당이 농민을 위한 당임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양우정식의 논리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었으며, 미 대사관이 안호상을 경계하는 마당에 일민주의의 인종적 성격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조되었으나, “미국을 따라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협동주의로 성격이 바뀌었다.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이라는 사태에서 미국은 이범석을 예의주시했다. 미국은 당시 이미 고령이었던 이승만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 이범석이 권력자가 될 것을 우려해, 이승만과 이범석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이범석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 작전은 먹혀들었고, 그 결과가 이범석의 부통령 낙선이다. 1953년 초, 휴전 반대운동으로 잠시 족청계와 일민주의가 부활하는 듯했으나, 이범석이 이승만의 권유로 외유를 나간 사이 족청 출신 장관을 갑자기 해임하고, 자유당 중앙당부에서 이범석과 안호상, 양우정 등을 제명함으로써 권력의 중추부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족청계는 일순간에 무너졌다. “이범석은 경찰의 엄중한 사찰 대상이 되었으며, 1956년에 공화당을 조직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지만 예전 같은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안호상은 19546월에 한 연설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양우정은 19541월에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지만 정치계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이제 더 이상 족청계가 정치 세력으로 부활하는 일은 없었다.

 

후지이 타케시는 서론에서 “‘반공=친미라는 냉전적인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며 결론부에서는 냉전에 대한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주장을 반증하는 것이 반공적이면서도 냉전적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적이었던 사상을 가진 족청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족청계의 몰락은 하나의 상징이다. 족청이 재기불능 상태가 된 것은 미국발 냉전 체제가 한국에 완전히 공고화되었음을 의미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진영 논리가 자리 잡으면서 족청계와 그들의 사상은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냉전적 이분법인 진영 논리가 강조됨으로써 첫째 전향 사회주의자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축소되었고, 둘째 경제적 민족주의는 쇠퇴하였다. 여기서는 조봉암 같이 제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마지막 셋째 설립부터 여성과 학생, 농민 등을 포섭할 정도로 막강한 대중적 동원력을 지닌 족청의 몰락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던 대중 동원의 정치 공간이 한국전쟁 휴전과 더불어사라졌다. 대중이 직접 정치의 주체로 나설 공간이 냉전과 함께 소멸된 것이다.

 

이러한 시사점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냉전적 이분법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그리고 이러한 본격적인 냉전 질서의 시작점인 휴전 체제의 성립 이전과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은 해방 공간의 유동성을 앗아갔고, 그 결과는 아직도 '이것 아니면 저것' 식으로 진영을 가르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냉전에서 벗어나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족청계는 1953년 말경에 권력 중추부에서 제거당하는데, 그에 이어 자유당이 의회정당으로 거듭나고 헌법에서 ‘국가사회주의적’ 조항이 약화된 사실로 상징되듯이, 그들의 몰락은 역사적 전환기였던 ‘해방8년’의 종언, 즉 냉전이 남한 체제 내부에까지 관철되면서 대중이 직접 정치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소멸한 것과 궤를 같이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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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박승찬 지음 / 누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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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찬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누멘, 2010

박승찬의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는 학문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12~13세기에 일어난 스콜라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을 탐구한다. 라틴 세계에서는 보에티우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 일부만 전해지다가, 12세기경부터 차츰 아랍권으로부터 그의 다른 저서들이 번역되어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수용은 12~13세기 중세의 학문 세계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바로 이러한 수용에 결과로 탄생한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대작 <신학대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제I부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의 역사’와 제II부 ‘토마스 아퀴나스가 수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앞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사상이 12~13세기에 어떤 과정을 거쳐 유입되고 어떤 반향을 냈는지를 탐구했다면, 제II부에서는 그 주요 사례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학문의 체계 정립’과 ‘신앙과 이성의 조화’ 탐구) 다룬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의미 있는 내용은 후자보다는 전자일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떠한 사상을 형성했는지보다도, 그가 그런 사상을 형성할 수 있었던 제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의 교류 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탄생한다는 내용을 건축가의 시선에서 풀어낸 유현준의 <공간이 만든 공간>도 추천한다)

중세 이전 라틴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발하게 연구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한계점이 많지만,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일단 전집이 편집된 이후에는, 수사학 수업의 교재로 사용된 논리학 저술들을 중심으로 초기 그리스에서 관심을 가졌고, 오리게네스 등 초기 교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어느 정도 수용적이었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 내재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거부한다. 라틴 교부에서 주목할 사례는 아우구스티누스인데, 그에게 아리스토텔레스란 “자신의 사고를 드러내기 위한 입문적인 성격만을 지니는 것이었다.” 13세기 이전 서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거의 유일한 원천”인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확신하에 여러 주해서를 저술하였고, 현실태-가능태나 우유, 보편 등의 용어가 정립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의 사후 더 이상 그만한 “중개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은 12세기까지 “잊혀져 버렸다”. 다만 이러한 와중에도 그의 논리학 작품은 보에티우스를 거쳐 성 안셀무스의 신학에 영향을 미치는 등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기에 ‘완전히 잊혔다’라는 표현을 쓸 때는, 유의해야 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은 12세기 서양과 아랍의 접경지역인 스페인과 이탈리아 남부로부터 들어온 필사본을 번역하고, 이를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에 불타던”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보러 오면서 본격적으로 재발견되었다. 비록 위작까지 번역했다는 점, 번역자의 대부분이 아마추어 수준의 학실을 갖춘 인물들이었다는 점, 번역 자체의 오류, 그리고 널리 유포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이미 12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작품을 라틴어로 읽을 수 있었다. 13세기에는 모에르베케의 윌리엄(1215~1286) 같은 번역가의 영웅적 헌신으로 기존 번역 전체의 수정 작업과 이전에는 번역되지 않은 <정치학>, <시학>, <수사학> 등의 작품이 라틴어로 옮겨졌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핵심 주해서들을 정력적으로 번역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더불어 아베로에스와 그 이전 그리스의 주해서들까지 상당수 번역되어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이 극히 초보적인 단계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예리한 텍스트 비판 능력을 통해 텍스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꽃을 핀 13세기의 탐구 경향을 더 자세히 알아보자. 13세기 전반기에는 세 차례 걸쳐 아리스토텔레스 강의금지령(1215년, 1231년, 1245년)이 내려졌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확산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1255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작품을 수업에 사용하는 것을 허가하는 학사 규정이 파리대학에서 발표되었고, 그때부터 더욱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된다. 그리고 이는 중세 학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오캄 이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적 학문의 개념과 이상을 학자들은 수용하였고, 예비적 학문의 성격을 지닌 인문학부는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갖춘 “철학부”로 발전했으며, 자연과학 탐구의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중세가 아무런 발전이 없던 암흑 시대였다는 소리는 정말 아무 근거가 없는 소리이다.

13세기, 새로운 사상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정통 그리스도교 신학과 대립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신학적인 기획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들과 해석들을” 받아들였던 혼합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이다. 둘째는, 파리대학의 인문학부 교수들을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주해자 아베로에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혹은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이다. 마지막 셋째는, 심정적 적대와 무비판적 수용이라는 양극단을 피하고 그리스도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종합하려던 비판적 수용의 태도이다. 이 세 번째 유형에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스승 대 알베르투스가 있다. 여기서 잠시 알베르투스의 사상을 간단히 추려보자. 그는 ‘의역 주해’라는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해석해가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을 인용하면서도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 사상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알베르투스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으로 자리 잡은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새롭게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학문방법론을 통해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비난하거나 수용하는 대신, 그의 철학을 “전체적인 면에서 진실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일치하는 의미에서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토마스의 노력이 바로 <신학대전>이라는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대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직접적 배경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앞에서 말한 이상적인 종합을 이룰 수 있던 가장 본질적인 원인은 주요 원전과 주해서들이 충분한 정도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어에 능통하지 못했음에도 라틴어 번역을 통해서 그러한 애로사항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번역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 박승찬의 설명을 잠시 들어보자. “ 문화가 다른 문화를 받아들일 때, 단지 외부적인 조건들이 있다고 곧바로 그런 수용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수용과정에서는 단순히 어떤 내용들이 들어오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수용자가 이 내용들을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받아들이는지가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안셀무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12세기 이전부터, 신학자들은 신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성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고, 그러한 문제의식이 밑바탕을 이루는 상태에서 새로이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열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전부터 이어지던 신플라톤주의의 역할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

조선 후기, 서양의 사상을 수용할 때는 주로 청과 일본의 번역본을 통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아카넷, 분도출판사, 도서출판 길, 도서출판 숲, 책세상, 이제이북스 등. 해외의 고전과 원전을 원어 직역으로 출판하려는 출판사들이 많아졌다. 최초의 철학서적 번역이 1954년에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당시 제목은 <참회록>)이고, 그마저도 중역에 발췌본이었음을 생각한다면, 플라톤 전집이 번역되고(천병희/정암학당/박종현) <고백록> 라틴어 원전 번역만 5종이 넘으며(박문재, 성염, 선한용, 김기찬, 최민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원전 완역(이병창 역, 먼빛으로)이 이루어진 것은,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의 번역 수준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물론 미진한 부분은 아직 많지만).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단순히 번역만 많이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수용자인 우리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텍스트를 받아들일지다. 이제는 읽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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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공동생활 디트리히 본회퍼 대표작 1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정현숙 옮김 / 복있는사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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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책을 읽을 때마다, 인상 깊은 구절에 밑줄을 긋거나 따로 독서 노트에 메모하여 독서의 감상을 보존하려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는 그러지 못했다. 농담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새겨들을 문장들로 가득 찬 책이었다.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들을 음미하며 읽느라 분량에 비해 읽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나 그만큼 깊은 책이었다.

기독교는 공동체의 종교이다. 공동체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아래 하나가 된다. 이 책은 그러한 기독교의 공동체 생활이란 무엇인지 탐구할 수 있는 책으로, 목회자 본회퍼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개인의 경건 생활은 물론 공동체 영성 함양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성 수양이라면,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나 사막교부의 금언집도 본회퍼의 <성도의 공동생활 >과 같은 유익을 준다. 그러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경우, 중세 수도사적 한계가 뚜렷한 편이고, 사막 교부들로부터는 신독의 가치를 배울 수는 있지만, 공동체의 가치와 생활과는 맞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회퍼의 이 책은 이들의 한계를 보완하여 개인의 영성 생활과 더불어 공동체 영성도 계발할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1장은 성도의 교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답한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을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몸과 몸을 부대끼며 함께하는 것은 신자들에게는 비할 수 없는 기쁨과 힘의 원천이 됩니다.” 성도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큰 은혜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본회퍼는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도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제”임을, 따라서 공동체 안에 개개인이 아니라 그에게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기 교회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뇌리에 깊게 박혔다.

2장 '함께하는 날'은 아침 경건 시간의 중요성과 그때의 공동 말씀 읽기, 공동 기도, 공동 찬송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본회퍼는 특히 시편 기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사람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편의 진정한 화자는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다. 이를 분명히 인지하고 시편의 기도를 드리면, 그 기도는 인간적 소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근거”한 기도가 되고, 응답의 약속도 받는다. 이외에도 공동 성경 읽기는 연독의 방식으로 읽을 것, 각 구성원이 교대로 읽을 것, 찬송을 부를 때는 단성 찬송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는 등의 구체적인 조언들이 뒤따른다.

3장은 홀로 있음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공동체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고, 오히려 공동체에 해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도의 교제 안에 있어야 하지만, 침묵하며 홀로 있을 수도 있어야 한다. 침묵이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침묵이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축복을 받은 후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매일의 성경 묵상과 중보기도와 개인적 기도를 위해서도 이 침묵은 꼭 필요하다.

4장은 공동체를 이루는 데에 있어서 섬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스리는 원리는 자기 정당화에서 나오는 폭력 행사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에 기초한 섬김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공동체 안에서 누구도 서로를 판단하며 정죄할 수 없고, 낮은 자리에서 지체를 섬기려는 모습만 남는다.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 남을 도와주는 것, 서로의 짐을 지어주는 섬김이 열거된다.

5장은 공동체에서 죄 고백의 중요성과 성만찬의 의미를 다룬다. 죄인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경건한 공동체”와 달리, 성도의 공동체는 죄인의 공동체다. 죄 고백과 용서 속에서 진정한 교제로 나아갈 수 있는 공동체다. 죄 고백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화해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기를” 원하고, 이것이 성찬이다. “거룩한 성찬의 교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완성 그 자체”이다. 성찬을 통해 성도들은 영원히 서로 함께 거하게 된다.


이처럼 이 책은 성도의 공동체란 하나님의 은혜임을 상기시키며, 성찬의 종말론적 의미를 강조하며 마무리된다. 코로나로 인하여 2020년 대한민국의 성도들은 얼굴을 볼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은 모일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리고 나아가 코로나 이외에도 여러 이유로 숨어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지체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코로나는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장차 다시 올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이다(고전 13:12, 새번역). 지금 다른 지체들은 떨어져 있어 볼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이 전염병이 수그라들 그날에는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모여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신앙생활과 내가 속한 교회 생활을 돌아보았고 남의 티눈은 보면서 내 눈에 들보는 못 보았던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 책을 읽는 데에 시간이 걸렸던 또 다른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계속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도 있다. 결론만 말하면,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를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우리 교회의 성도분들께 더 감사한 마음을 갖기로 결정하였다. 불만 가득한 교만한 마음도 내려놓으며 더 겸손해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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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켈하임 로마사- 한 권으로 읽는 디테일 로마사
프리츠 하이켈하임 지음, 김덕수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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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문명은 왜 야만에 압도당하였는가
피터 히더 지음, 이순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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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장 이브 보리오 지음, 박명숙 옮김, 강대진 감수 / 궁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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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로마의 역사- 전설 같은 건국에서 장엄한 몰락까지, 세계를 지배했던 초강대국의 이야기
사이먼 베이커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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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인주의 외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훈 옮김 / 책세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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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김석근 옮김 / 한길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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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과 반역- 전환기 일본의 정신사적 위상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 나남출판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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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과 전후 사이 1936-1957- 마루야마 마사오, 정치학의 기원과 사유의 근원을 읽는다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김석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2월
35,000원 → 31,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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