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4
후지이 다케시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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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 후지이 다케시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 보완하여 책으로 펴낸 것이다. 책에는 머리말이 추가되고 결론은 본론 요약을 제외하면 거의 다 새로 썼다. 대충 훑어보긴 했지만, 본론에서는 제출된 박사학위 논문과 큰 차이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35천 원이라는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riss’라는 사이트에서 저자의 학위논문을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니(후지이 다케시,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0), 이쪽을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후지이 다케시는 서론에서 이렇게 묻는다.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건국되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후지이 다케시가 조선민족청년단(이하 족청)을 통하여 재구성한 한국의 해방 8의 정치 공간은 그들 생각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로 매끄럽게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 책에서 족청계를 분석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사상적 특징 때문이다. 1945년 등장하여 1953년에 정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족청계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 위치한 존재였으며, 거시적으로 봤을 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가시화되는 가운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다양한 편차를 내포하면서 결합되는 양상의 주변부 수용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이 뒤섞인 족청계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이범석, 안호상, 양우정이었다. 이 3명의 공통점은 파시즘과 관계를 가지면서 형성된 민족주의였다는 점이다이범석은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훈련위원회 훈련단에서 훈련을 받으며, 장제스의 파시즘에 영향을 짙게 받았다. 이범석은 해방 이후 조직한 족청의 구체적인 운영 방식에도 장제스의 방식과 훈련단의 모델을 많이 참조했다. 안호상은 독일 유학 시절 히틀러와 나치즘에 깊은 인상을 받고, 칸트와 헤겔을 연구하며 실천에 대한 이론의 우위를 주장하는파시즘과 장제스식 역()행철학과도 친화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양우정은 1931년에 전향한 사회주의자인데, 그 전향 논리가 흥미롭다. 양우정은 유물론과 유물사관에 의문을 품고는 민족주의와 일본 파시즘과 그 논리를 공유하는 가족주의 사상으로 전향했다.

 

족청의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이범석이다. 따라서 족청의 이념은 이범석이 영향을 받은 장제스식 파시즘과 유사할 수밖에 없었다. 족청의 이념은 파시즘과 상당한 친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범석은 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 대 민주주의 전쟁으로 보는 공식적인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고, 오히려 패배한 독일·이탈리아·일본 측이 가졌던 전쟁 인식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동시에 이범석은 분명한 제3세계주의적 경향을 띤 민족주의자였으며, 반제국주의적 성격 역시 존재했다. 그리고 안호상 등을 통해 족청에 접목된 나치즘의 영향으로 족청은 반공주의면서도 반자본주의라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이후 족청계가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된 뒤, 어떤 이는 족청계의 파시즘적 행태, 다른 이는 “‘공산당적수법을 비판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족청계는 좌익/우익’ ‘반공/자본주의라는 이분법 구도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층위와 성격을 지녔다. 그리고 이러한 족청과 족청의 이념이 구체화된 것이 일민주의이다.

 

일민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기는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안보의 공백이 발생한 지점과 겹친다. 이승만은 공산당과의 싸움이 아직은 사상적 싸움이라고 규정하면서, 사상적 싸움의 수단으로 민주주의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일민주의를 만들었다고 설명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한 내 좌익들의 사상적 전향을 이끌어내는 매개체로써 일민주의가 사용된 것이다. 전향은 폭력적 강압과 유도한 세트로 구성되었는데, 일민주의가 유도를 맡았다. 그리고 이 일민주의를 통한 전향으로의 유도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가 양우정이었다. 양우정의 공산주의 비판의 핵심은 민족주의를 기축으로 한 반공주의였다. 그는 민족을 강조하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더 나아가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까지 비판한다(물론 비판의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대한민국 헌법이기에 자본주의 비판은 다소 애매해진 부분은 있었지만). 일민주의를 통한 전향은 공산주의의 이항대립항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민족과 국가(대한민국)로의 전향이었다. , 일민주의는 좌익들을 포섭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물론 전향이 사상적 전향만이 아니라 지리산지구 토벌 작전과 같은 폭력적 강압에 의한 전향도 있었음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파시즘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일민주의와 족청계는 미국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50, 일민주의보급회를 조직하는 등 이범석은 일민주의를 통해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려 했지만, 경제 원조를 두고 이범석과 안호상을 경계한 미국의 압력으로 이범석 당시 부총리와 안호상 당시 문교부 장관이 사퇴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1952년 발췌개헌을 둘러싼 국회와 이승만 정부 사이의 갈등 속에서 족청계와 일민주의는 다시 정치 무대의 중심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일민주의는 이전에 계급성과 배타적 민족주의 성격이 상당히 희석된 협동주의의 형태로 재등장했다. 족청계와 이승만이 속한 원외자유당이 농민을 위한 당임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양우정식의 논리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었으며, 미 대사관이 안호상을 경계하는 마당에 일민주의의 인종적 성격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조되었으나, “미국을 따라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협동주의로 성격이 바뀌었다.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이라는 사태에서 미국은 이범석을 예의주시했다. 미국은 당시 이미 고령이었던 이승만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 이범석이 권력자가 될 것을 우려해, 이승만과 이범석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이범석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 작전은 먹혀들었고, 그 결과가 이범석의 부통령 낙선이다. 1953년 초, 휴전 반대운동으로 잠시 족청계와 일민주의가 부활하는 듯했으나, 이범석이 이승만의 권유로 외유를 나간 사이 족청 출신 장관을 갑자기 해임하고, 자유당 중앙당부에서 이범석과 안호상, 양우정 등을 제명함으로써 권력의 중추부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족청계는 일순간에 무너졌다. “이범석은 경찰의 엄중한 사찰 대상이 되었으며, 1956년에 공화당을 조직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지만 예전 같은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안호상은 19546월에 한 연설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양우정은 19541월에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지만 정치계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이제 더 이상 족청계가 정치 세력으로 부활하는 일은 없었다.

 

후지이 타케시는 서론에서 “‘반공=친미라는 냉전적인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며 결론부에서는 냉전에 대한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주장을 반증하는 것이 반공적이면서도 냉전적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적이었던 사상을 가진 족청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족청계의 몰락은 하나의 상징이다. 족청이 재기불능 상태가 된 것은 미국발 냉전 체제가 한국에 완전히 공고화되었음을 의미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진영 논리가 자리 잡으면서 족청계와 그들의 사상은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냉전적 이분법인 진영 논리가 강조됨으로써 첫째 전향 사회주의자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축소되었고, 둘째 경제적 민족주의는 쇠퇴하였다. 여기서는 조봉암 같이 제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마지막 셋째 설립부터 여성과 학생, 농민 등을 포섭할 정도로 막강한 대중적 동원력을 지닌 족청의 몰락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던 대중 동원의 정치 공간이 한국전쟁 휴전과 더불어사라졌다. 대중이 직접 정치의 주체로 나설 공간이 냉전과 함께 소멸된 것이다.

 

이러한 시사점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냉전적 이분법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그리고 이러한 본격적인 냉전 질서의 시작점인 휴전 체제의 성립 이전과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은 해방 공간의 유동성을 앗아갔고, 그 결과는 아직도 '이것 아니면 저것' 식으로 진영을 가르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냉전에서 벗어나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족청계는 1953년 말경에 권력 중추부에서 제거당하는데, 그에 이어 자유당이 의회정당으로 거듭나고 헌법에서 ‘국가사회주의적’ 조항이 약화된 사실로 상징되듯이, 그들의 몰락은 역사적 전환기였던 ‘해방8년’의 종언, 즉 냉전이 남한 체제 내부에까지 관철되면서 대중이 직접 정치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소멸한 것과 궤를 같이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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