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박승찬 지음 / 누멘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박승찬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누멘, 2010

박승찬의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는 학문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12~13세기에 일어난 스콜라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을 탐구한다. 라틴 세계에서는 보에티우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 일부만 전해지다가, 12세기경부터 차츰 아랍권으로부터 그의 다른 저서들이 번역되어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수용은 12~13세기 중세의 학문 세계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바로 이러한 수용에 결과로 탄생한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대작 <신학대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제I부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의 역사’와 제II부 ‘토마스 아퀴나스가 수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앞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사상이 12~13세기에 어떤 과정을 거쳐 유입되고 어떤 반향을 냈는지를 탐구했다면, 제II부에서는 그 주요 사례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학문의 체계 정립’과 ‘신앙과 이성의 조화’ 탐구) 다룬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의미 있는 내용은 후자보다는 전자일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떠한 사상을 형성했는지보다도, 그가 그런 사상을 형성할 수 있었던 제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의 교류 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탄생한다는 내용을 건축가의 시선에서 풀어낸 유현준의 <공간이 만든 공간>도 추천한다)

중세 이전 라틴 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발하게 연구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한계점이 많지만,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일단 전집이 편집된 이후에는, 수사학 수업의 교재로 사용된 논리학 저술들을 중심으로 초기 그리스에서 관심을 가졌고, 오리게네스 등 초기 교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어느 정도 수용적이었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 내재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거부한다. 라틴 교부에서 주목할 사례는 아우구스티누스인데, 그에게 아리스토텔레스란 “자신의 사고를 드러내기 위한 입문적인 성격만을 지니는 것이었다.” 13세기 이전 서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거의 유일한 원천”인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확신하에 여러 주해서를 저술하였고, 현실태-가능태나 우유, 보편 등의 용어가 정립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의 사후 더 이상 그만한 “중개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은 12세기까지 “잊혀져 버렸다”. 다만 이러한 와중에도 그의 논리학 작품은 보에티우스를 거쳐 성 안셀무스의 신학에 영향을 미치는 등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기에 ‘완전히 잊혔다’라는 표현을 쓸 때는, 유의해야 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은 12세기 서양과 아랍의 접경지역인 스페인과 이탈리아 남부로부터 들어온 필사본을 번역하고, 이를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에 불타던”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보러 오면서 본격적으로 재발견되었다. 비록 위작까지 번역했다는 점, 번역자의 대부분이 아마추어 수준의 학실을 갖춘 인물들이었다는 점, 번역 자체의 오류, 그리고 널리 유포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이미 12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작품을 라틴어로 읽을 수 있었다. 13세기에는 모에르베케의 윌리엄(1215~1286) 같은 번역가의 영웅적 헌신으로 기존 번역 전체의 수정 작업과 이전에는 번역되지 않은 <정치학>, <시학>, <수사학> 등의 작품이 라틴어로 옮겨졌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핵심 주해서들을 정력적으로 번역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더불어 아베로에스와 그 이전 그리스의 주해서들까지 상당수 번역되어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이 극히 초보적인 단계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예리한 텍스트 비판 능력을 통해 텍스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꽃을 핀 13세기의 탐구 경향을 더 자세히 알아보자. 13세기 전반기에는 세 차례 걸쳐 아리스토텔레스 강의금지령(1215년, 1231년, 1245년)이 내려졌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확산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1255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작품을 수업에 사용하는 것을 허가하는 학사 규정이 파리대학에서 발표되었고, 그때부터 더욱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된다. 그리고 이는 중세 학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오캄 이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적 학문의 개념과 이상을 학자들은 수용하였고, 예비적 학문의 성격을 지닌 인문학부는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갖춘 “철학부”로 발전했으며, 자연과학 탐구의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중세가 아무런 발전이 없던 암흑 시대였다는 소리는 정말 아무 근거가 없는 소리이다.

13세기, 새로운 사상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정통 그리스도교 신학과 대립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신학적인 기획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들과 해석들을” 받아들였던 혼합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이다. 둘째는, 파리대학의 인문학부 교수들을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주해자 아베로에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혹은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이다. 마지막 셋째는, 심정적 적대와 무비판적 수용이라는 양극단을 피하고 그리스도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종합하려던 비판적 수용의 태도이다. 이 세 번째 유형에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스승 대 알베르투스가 있다. 여기서 잠시 알베르투스의 사상을 간단히 추려보자. 그는 ‘의역 주해’라는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해석해가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을 인용하면서도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 사상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알베르투스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으로 자리 잡은 플라톤-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새롭게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학문방법론을 통해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비난하거나 수용하는 대신, 그의 철학을 “전체적인 면에서 진실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일치하는 의미에서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토마스의 노력이 바로 <신학대전>이라는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대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직접적 배경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앞에서 말한 이상적인 종합을 이룰 수 있던 가장 본질적인 원인은 주요 원전과 주해서들이 충분한 정도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어에 능통하지 못했음에도 라틴어 번역을 통해서 그러한 애로사항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번역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 박승찬의 설명을 잠시 들어보자. “ 문화가 다른 문화를 받아들일 때, 단지 외부적인 조건들이 있다고 곧바로 그런 수용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수용과정에서는 단순히 어떤 내용들이 들어오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수용자가 이 내용들을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받아들이는지가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안셀무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12세기 이전부터, 신학자들은 신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성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고, 그러한 문제의식이 밑바탕을 이루는 상태에서 새로이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열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전부터 이어지던 신플라톤주의의 역할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

조선 후기, 서양의 사상을 수용할 때는 주로 청과 일본의 번역본을 통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아카넷, 분도출판사, 도서출판 길, 도서출판 숲, 책세상, 이제이북스 등. 해외의 고전과 원전을 원어 직역으로 출판하려는 출판사들이 많아졌다. 최초의 철학서적 번역이 1954년에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당시 제목은 <참회록>)이고, 그마저도 중역에 발췌본이었음을 생각한다면, 플라톤 전집이 번역되고(천병희/정암학당/박종현) <고백록> 라틴어 원전 번역만 5종이 넘으며(박문재, 성염, 선한용, 김기찬, 최민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원전 완역(이병창 역, 먼빛으로)이 이루어진 것은,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의 번역 수준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물론 미진한 부분은 아직 많지만).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단순히 번역만 많이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수용자인 우리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텍스트를 받아들일지다. 이제는 읽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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