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위로, 앤서니 스토, 이순영, 책읽는수요일

고독의 위로라니, 이 책을 산 게 “사랑의 미래” 다음날이어서인지 두 권의 책 제목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의 미래”.. 동네 어른들이 아무개의 ‘미래’를 들먹일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지 않았나. 하나는 ‘어우, 그 녀석. 하는 걸로 봐선 나중에 크게 될 것 같아’ 하는 기대 섞인 반응. 나머지 하나는, ‘쯧쯧, 저 놈의 자슥은 나중에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하는 염려하는, 걱정하는 반응. 그리고 아마도 현실에서 더 많이 사용되는 경우는 후자의 경우가 아닐지… ‘사랑’이란 놈의 미래를 걱정하게 하는 뭔가가 ‘사랑’에게 있다는 말. 그 말은 ‘사랑’의 현재가 불안하다는 소리.

“고독의 위로(비록 번역서의 제목이지만)”.. 절망에 빠져 멍하니 있을 때, 잡아 끌듯 나를 일으켜 세워 가까운 포장마차에라도 앉혀놓고 소주 한 잔 내밀며 ‘마시자’ 라며, 복잡한 얘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 알아줄 것 같은 ‘고독’이라는 이름의 따뜻하고 듬직한 친구.

불안한 사랑과 듬직한 고독. 이라는 느낌과 기대로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예상대로 ‘사랑’의 현재는 불안했고 미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억만 남았다. 하지만 이 기억이 뭐에 소용될 수 있을까. 또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사랑에는 방해가 되기 쉽고 나이 들어 추억으로나 소모되는.. 사랑의 경험은 새로운 사랑이 왔을 때 ‘더 잘해야지’라는.. 하아… 되지도 않을 다짐만 하게 만들진 않았을까…

“고독의 위로”는 포장마차와 소주와 입김 나는 추운 겨울 밤의 그 ‘고독’이 아니었다. 고독이란 것이 어떤 ‘소용’이 있는지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설명이었다. 자기계발서의 언어와 매우 비슷한. 확실히 나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같은 내용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고독의 위로”는 분석적이었다. 꽤나. 그러니 내 친구 ‘고독’의 직업은 정신과 의사여서, 뭐랄까 강남 사거리 어느 자리에 새로 개업한 의사선생을 만나는 기분이 꽤나 들었다는 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기대가 워낙 삼천포였어… 하지만, 그의 조언이 나쁘진 않았다. 소용이 없진 않았다. 아니 아니…. 꽤나 도움이 되는 말들이었다.



 

 

 

내 생의 중력, 홍정선 강계숙 엮음, 문학과지성사

“내 생의 중력”이라는 시집의 제목과 엮은이 강계숙의 해설에서 말 한 ‘자의식’과 ‘자화상’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다가 문득 어. 하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 나는 ‘내 생의’ 중력이라고 느낄만한 것들이 매우 소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중력이란 것이 무거운 것에서 더 많이 느껴지는 힘이긴 하지만, 모든 것들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던가. 내 생의 중력이 있다면 모든 것들에게, 무거운 것과 깃털처럼 가벼운 것에게도 작용하고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멈칫했다. 죽음과 사랑, 기쁨과 슬픔, 좌절과 성공 같은 무거운 것들도 있겠지만, 막힌 싱크대 수채 구멍을 어떻게 뚫어야 하나, 오늘 맬 넥타이는 뭐로 하지 하는 사소한 것들에게도… 내 생의 중력은 작동되고 있을 터인데 말이다. 아, 그렇다면 문제는 100톤의 무게인데 10킬로로 생각한다든가 10그램짜리인데 100톤으로 느낀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겠구나. 여기 문지 시인선 301호부터 399호까지의 시집에서 뽑은 시들도 독자들에게 아마 그럴 것. 어떤 것이 100톤인지, 10그램인지에 대한 느낌과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실은 나로서는 그렇게 무게가 많이 느껴지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 내가 보기에 나는 확실히 늦게 반응하는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이 선곡한 여러 작가들의 짬뽕 컴필레이션에는 별로 반응하지 못하고, 한 작가의 것을 하나 하나 읽는 그 누적의 어느 순간. 임계치를 넘어서는 그 순간에만 제대로 뭔가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새삼 느꼈다.



 

 

 

개념어 사전, 남경태, 들녘

유기적인 맥락을 따져가며 읽기 힘들 때, 사전은 좋은 선택이다. 전에 읽었을 때 뭔가 미진한 것이 남은 것 같아 오랜만에 다시 읽었는데, 이제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사계절

“개념어 사전”으로는 부족하여, 다른 이의 개념 얘기를 듣고 싶어 샀더니, 또 강신주. 정말 책 많이 내는구나… 함께 구입한 진중권의 “아이콘”과는 방향이 아주 다르지만 어쨌든 내가 원한 건 ‘개념’ 설명.

소설의 ‘이야기’가 육류 요리라면, 철학이나 과학의 ‘개념’은 채소다. 육류 요리만 먹기는 너무 힘들다. 아삭아삭한 로메인 상추나 샐러리, 오이 같은 것이 땡기 듯 ‘개념’을 섭취하고 싶은 계절.

저자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 보다는 개념의 용례만 주의 깊게 보았다. 나쁘진 않았으나, 이 사람 이렇게 계속 나가다간 쉽게 질리겠다 싶었다. 다 읽었는데도 아직 섭취 부족. “아이콘”까지 내리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댄스 댄스 댄스 - 상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지도와 영토>>를 읽은 후 한동안 무욕망증이라고 말해야 할지 무기력증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그런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읽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반디 코엑스점을 찾았던 10월 중순의 어느 날. 그 넓은 책의 매장이 황무지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책꽂이 사이사이를 무턱대고 걷다가 문득 ‘하루키라면 읽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장편소설 중에는 <<1Q84>>와 <<댄스댄스댄스>>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상태였으므로, 나는 “댄스댄스댄스”를 선택했다. “1Q84”보다 먼저 나왔기 때문에 읽어야겠다 라는 식의 의무감 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댄스댄스댄스”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루브감이 지금 읽어야 할 책은 이 책. 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이루카호텔의 꿈을 꾸고 이루카호텔을 찾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름은 곧 상징이다. 물론 모든 상징을 다 읽어낼 수 없고 사람마다 느끼는 상징코드는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핀호텔이라고 불러도 될 이름을 굳이 이루카호텔이라고 부르고 싶은 화자의 심정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 짐작했다. 호텔의 여직원 유미요시를 만나고 그녀의 집까지 배웅했을 때 ‘나(화자)’는 그녀와 잘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느끼는데, 그럼에도 문 앞에서 발을 돌린다. “공정한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 말 “공정한 게 아니다”에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이 소설에 빠져 들 수 있었는데…

“오디세이아”를 읽은 적은 없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자기의 왕국에 돌아왔을 때 구혼자들의 압박을 받고 있던 페넬로페를 구하기 위해, 바로 등장해서 모든 것들을 일거에 해결하지 않고 ‘시합’을 벌여 자기가 최종 승자가 되어 페넬로페 앞에 나타난다는 에피소드는 알고 있었다. 그 에피소드를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생각해보니 ‘이타카’의 주인이고 ‘페넬로페’의 남편인 오디세우스가 자기의 권리를 바로 드러내지 않은 까닭은 자기의 아내, 10년간의 전쟁과 다시 또 10년에 걸친 길고 긴 귀환 과정을 겪은 자신보다 어쩌면 더 고생했을 페넬로페 앞에 바로 등장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라고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공정한 게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러자 ‘이루카호텔’이 바로 “이타카”이고, 유미요시는 페넬로페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댄스댄스댄스”는 현대적 오디세이고, 공정한 게 아니다. 라는 자세, 그런 윤리적 태도가 소설의 어두운 배경이 되는 고도자본주의 사회를 헤쳐 나가는 주인공들의 기준 같은 것이 되지 않겠는가 짐작하게 되었다. 이타카를 먼저 찾아 이타카를 확인한 후 모험을 거쳐 다시 이타카로 리턴하는 것. 소설은 이런 구조다. ‘이타카(고향)’와 ‘모험’, ‘리턴’. 자기계발서와 헐리우드 애니메이션에 진저리 칠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들. 그런데도 물론, 지루할 리가 없다.


2.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에 보면 융의 글이 인용된 것이 있는데,

“만일 우리가 무의식도 의식과 함께 공동의 결정 요소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의식적인 요구와 무의식적인 요구를 가능한 한 함께 고려하며 살 수 있다면, 아마도 개인성 전체의 무게 중심이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개인성의 중심은 자아, 그러니까 의식의 중심에 있지 않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가상 지점에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중심이 ‘자기’가 될 것이다.”

<<고독의 위로>>의 부제 ‘A Return to the Self’는 그러니 “댄스댄스댄스”의 주제의 어떤 핵심을 똑 떨어지게 말해주는 듯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아(ego)’가 아니라 ‘자기(the Self)’로의 리턴 이라는 것.

왜 자기로의 리턴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두 가지의 문제. 또는 두 종류의 상실을 겪고 있다. 친한 친구의 자살과 아내와의 이혼으로 인한 ‘관계’의 상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서 어떤 만족감도 얻지 못한다는 것, 자기 일과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가 하는 일은 잡지 같은 것들에 맛집 기사 같은 중요하지 않은 글을 써서 납품(!)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일을 ‘문화적 눈 치우기’ 라고 폄하하듯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일에 대한 불만족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은 좋은 인간관계에서 온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렇지만 앤서니 스토는 ‘관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개인의 ‘고독’이라고 말한다. 고독을 통해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이 발현되고 그것이 일이나 개인의 취미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말하고 있다. “댄스댄스댄스”의 ‘나’는 유미요시(미래의 연인)와 유키(모험의 동반자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딸 같은) 그리고 ‘고탄다(오랜만에 만나 새로운 우정을 느끼는 친구)’를 통해 적지만 진실한 인간관계를 회복한다. 그리고 바로 이 소설(댄스댄스댄스)을 직접 씀으로써 눈 치우기가 아닌 창작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물론 이런 과정을 이처럼 재미없게 설명하진 않는다. 음악에 맞춰 한 발짝 한 발짝 꾹꾹 눌러 스텝을 밟듯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진지하게, 때론 경쾌하게. 누구보다도 잘.


3.
중요한 것은 모험이다. 댄스의 스텝을 밟는 것.
신화 속 모험이라면 괴물들과의 혈투가 되겠지만, 현대의 모험은 이미 상식이 되어버려 누구도 반박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가치체계-이 소설에서는 고도자본주의-에 반하는 것이 모험이 될 터이다.

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는데 눈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했을 때, 그가 자동차를 렌트해 유키(雪)를 태우고 함께 공항 주변 도로를 빙글빙글 돌며 드라이브를 하는 장면. 이 장면은 이 모험의 가장 아름다운 상징이고, 내가 제일 좋아하게 된 장면이다. 이 드라이브가 이뤄낸 것들은 놀라운데 1)효과와 효율을 무시하고 (기름을 낭비하며) 그냥 돌고 돈다는 것 자체가 고도자본주의 사회가 최고로 치는 가치체계를 저버리고 있다는 점 2)현재 유행되는 록음악과 옛 음악이 섞이는 것처럼, 폐쇄적인 유키의 마음이 살며시 열리며 그와 유키 사이의 진실한 관계(물론 이것은 아빠와 딸과의 관계 같은 것이다)가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는 점 3)이 장면을 공중에서 본다고 상상하면, 이 드라이브 코스는 무한의 표지처럼, 크게 휘둘러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심분리기처럼 보인다는 점. 그래서 시시한 것, 사소한 것들을 모두 걸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 4)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나’의 곁의 눈-유키(雪), 그리고 빙글빙글 드라이브, 크게 울리는 록음악, 마치 천지가 혼연일체 되는 것 같은 커다란 해방감 같은 것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5)’좋은 것은 적다’는 그의 말이 주는 울림. 진실하지 못한 인간관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소설 속 ‘나’와 독자인 ‘나’의 답답함을 순간적이나마 확 뚫어주고 있다는 점. 소수의 좋은 사람에 인간 관계를 집중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한 번 홀딱 빠져보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들게 했다는 점. 이런 기분들을 한꺼번에 환기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멋진 드라이브. 나에게는 올해의 한 컷.


4.
소설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공정한 게 아니다’라는 문장부터였지만, 나의 무욕망증, 무기력증의 해소는

“그녀는 방 한가운데 서더니 밝은 청색의 윗도리를 소리도 없이 쑥 벗고는, 주름이 잡히지 않게끔 라이팅 데스크의 의자 등받이에다 걸쳐놓았다. 그러곤 걸어서 내 곁으로 오더니 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앉았다. 상의를 벗고 나니,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약해서 상처받기 쉬운 여자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하얀 블라우스는 말끔하게 다림질되어 있었다. 5분 정도를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얹고 눈을 감은 채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눈이 거리의 음향을 빨아들이면서 언제까지나 내리고 있었다. 음향이라는 게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라는 장면을 읽고 나서였다. 성욕이 회복됐다. 뭐든 어떠한 욕망이라도 하나가 깨면 다른 것들도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높은 법이다. 이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사운드(침묵의 사운드)가 계기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소설 속 문장은 소설 안에서만 작용되는 법칙은 아닌 것이다. (이 장면을 읽고 나서 ‘사랑의 미래’와 ‘고독의 위로’를 샀다. 읽고 싶고 사고 싶은 마음이 돌아왔다.)


5.
헤닝 만켈의 <<이탈리아 구두>>를 읽고 하루키의 ‘우물’에 대한 것을 떠올렸었는데, 우물만큼이나 ‘전화’가 중요하다. 상대방에게로의 도달 (불)가능성. 사랑의 (불)가능성. 하루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 두 개만 꼽으라면, ‘우물’과 ‘전화’라고. 이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6.
나는 아내보다는 ‘딸’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유키의 어머니 아메(雨)의 남자 딕 노스가 죽었을 때 유키에게 그가 한 말, “사람은 회한이 남지 않도록 사람과 접촉해야 해. 공평하게, 되도록이면 성실하게,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사람이 죽으면 간단히 울면서 후회하곤 하는 인간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 개인적으로.” 이런 말을 나도 내 딸에게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완전 감정이입 했다. 유키 라는 존재는 관계와 일에서 상실감을 느낀 ‘나(화자)’에게 부과된 큰 책임 같은 존재지만 또한 큰 위로 같은 존재다. 부성애라고 부를 만한 부드럽고 친밀한 감정. 이 흐믓함은 사랑하는 연인에게서도 얻지 못할 것.


두서없이 적어 내려왔다. 하지만 유기적인 이야기보다 순간적인 느낌들이 소중했다. 이 느낌이 이 소설에서 내가 얻은 ‘좋은 적은 것’이다.

하루키는 형태와 이야기. 둘 모두를 잘 다루지만 형태 쪽에 더 무게중심을 둔 작가다. 이루카와 양사나이, 아메와 유키, 유키 엄마의 남자와 유키 아빠의 남자, 쓰바루와 마세라티, 유행하는 음악과 한때 유행했던 음악, 제대로 된 요리와 정크푸드, 전화와 우물, 뼈와 불구, 키키와 메이와 준, 자본주의의 습성을 대표하는 듯한 경비(비용처리)와 매춘, 천재와 범재, 도쿄와 삿포로와 하와이, 고탄다와 나와 양사나이 등등. 어떤 상징성을 내포한 것들로 형태를 구축한다. 그런 것에 능하다.
더 훌륭한 것은 그런 형태들이 그저 굳게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키스 자렛이 『쾰른 콘서트』 PartⅡ A에서 들려준 것, 오르막길에서 굴러 떨어지는 음표들을 붙잡아 다시 위로 끌고 던지고 올려 붙이는 듯한 격렬함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 나(개인이라는 개념어가 아니라 Only라는 의미에서의 실존적 개인)에게만 딱 맞는 충격과 울림을 전해 주는 느낌. 텍스트와 텍스트 바깥의 나라는 존재 사이의 경계가 순간 사라지는 기분. 줄탁동기(啐啄同機)의 느낌. 갓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11-10-3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읽고나니 예전의 저는 <댄스댄스댄스>를 (조금 읽은 부분이나마) 잘못 읽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큐팔사가 끝나면 다시 도전해 봐야겠어요. 형태와 이야기 모두를 잘 다루지만 형태에 더 무게중심을 둔 작가, 이 평은 저도 공감해요. 예전엔 하루키가 너무 스타일에만 치중하는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일큐팔사를 읽고있는 지금은 하루키가 다루는 형태나 이야기보다, 환갑을 넘긴 원로작가 하루키의 세계관이 궁금해지고 있어요. 좀 더 확장된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요.

<지도와 영토>를 아직 못 끝냈어요 ㅜㅜ


dreamout 2011-10-31 22:28   좋아요 0 | URL
1Q84는 어서 읽어 보라는 얘기를 나올때부터 들었는데, 사놓고 첫문장 조차 안 읽고 있어요. ㅋ

지도와 영토든 어떤 책이든 안 땡기면 내비두는 겁니다~ ^^

다락방 2011-11-0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는 [댄스댄스댄스]를 두번이나 읽었는데도 이런식으로 느껴보지 못했을 뿐더러 리뷰는 써볼 생각도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리뷰를 읽고나니 저는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하루키를 몹시도 애정하고 있고 그의 번역된 모든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하루키의 모든글을 제대로 이해하고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제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의 소설속에 숨어 있는 그 모든 유머들이지만-이 책 댄스~ 에서도 초콜렛과 날짜변경선을 좋아하느냐고 되묻는 그런 질문같은 것들- 그것 말고도 더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요즘에 들고 있어요. 제가 본 것 말고 더한것. 미처 제가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 그런게 하루키의 글에 있을 것 같아요. 아, 다시 읽고 싶어요.

dreamout 2011-11-01 21:22   좋아요 0 | URL
전 하루키 소설의 유머를 잘 느끼지 못해요. 틀림없이 그런게 있다는 건 알겠고 그것 자체도 뭔가 환한 부분이 있는 건 알겠는데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도 그의 다른 소설 읽을 날이 기다려져요. 저에게도 아주 많이 남아 있는 작가예요.
 

어제 날짜로 끝난 문학동네 이벤트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중 관심 있던 작품은 이미 다 구입해서. 구입하지 않은 책들은 여전히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이렇게 글을 남기는 이유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서 앞으로 펴낸다면 주저없이 구입할 의사가 있는 책들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다. 번역되어 나오기를 학수고대 했건만 깜깜 무소식인 작품들에 대해서 문학동네가 '문학동네'니 만큼 선도적으로 좀 내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전하기 위해서다. 최근에 그토록 고대하던 <<한밤의 아이들>>과 <<달려라, 토끼>>를 내주었기 때문에 기대가 더욱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1. Alan Hollinghurst, The Line of Beauty : 2004년도 부커상 수상작이다. 상당히 시간이 흘렀음에도 번역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게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한국에선 장사가 안될것 같아서인가. 아니면 무슨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게이들간의 섹스장면이 좀 과한가.. 세계문학전집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컬렉션 아닐까. 민음사와 펭귄과 열린책들과의 차별성을 돋보이게 할 만한 컬렉션 아닐까.  

2. John Irving, A Prayer for Owen Meany : 존 어빙의 책은 꽤 많이 번역되어 있고, 나도 사이더하우스나 일년 동안의 과부는 갖고 있다. 다만 아직 읽진 않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존 어빙의 소설이라면 이 작품부터 읽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언젠가 쿤데라가 지인에게 곰브로비치의 소설을 읽어보라고 추천했더니 포르노그라피아나 페르디두르케가 아닌 다른 작품을 골라 읽어 안타까워하자 그 지인이 말하길 곰브로비치에게 할당된 시간은 다 썼다라는 의미의 말을 했다던데... 이 작품은 그네 나라에서 존 어빙의 대표작으로 지칭되는 책이니만큼 나도 이 작품부터 시작해 보고 싶다. 그래서 쿤데라 지인의 안타까움을 비켜갔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3. Thomas Pynchon, Gravity’s Rainbow : 오래전 절판된 작품들 빼고, 현재 민음사에서 <<제49호 품목의 경매>>만 나와 있는 토머스 핀천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이 문학동네 컬렉션에 든다면 꽤 멋지지 않을까. 어떤 내용인지 궁금한.. 첫 손가락 또는 둘째 손가락 정도 꼽는 책.  

4. Saul Bellow, Herzog : 그래도 노벨상을 받은 작가다. 민음사의 <<오늘을 잡아라>>는 너무 약하지 않나? 이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라던데.. 역시 궁금.  

5. James Joyce, Ulysses : 같은 번역자의 작품이 범우사와 생각의나무에서 나와 있다. 그런데 왠지 범우사의 책엔 손이 안가고 생각의나무에서 나온 율리시즈는 딱 보는 순간 '장서가'를 위한 책이지 '독자'를 위한 책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독자를 위한 책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내 준다면 정말 좋지 않을까. 세계문학전집 첫번째 책을 톨스토이로 한 것은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100번째 책으로 이 작품을 내놓는 것은 어떨까. 분량으로 봐서는 한 4권 정도로 분권되어 나온다면 적당할 것 같은데.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면 150번째 작품으로라도...  

볼라뇨의 Savage Detectives와 반스의 2011년 부커상 수상작 The Sense of an Ending은 열린책들에서 내줄 것 같으니 됐고, Howard Jacobson의 The Finkler Question이나 Tom McCarthy의 C도 왠지 다른 출판사에서 내줄 것 같아서 뺐다.  

5권이다. 많지 않다. 걔중 몇권이라도 좀 생각해 보시길.. 혹 내놓을려고 준비 중이라면 하루라도 서둘렀으면 하고 바래본다. 문학동네에서 내놓을 계획이 없다면 다른 출판사 직원들을 만날때 얘기라도 좀 해줬음 좋겠다. 내 취향은 아주 평범한데, 나 같은 사람이 원할 정도라면 어느정도 시장성은 있는 것 아니겠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2011-10-26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은 작품들은 이미 다 사버려서 문학동네 이벤트에 관심없었던 1인입니다 -_-;;

dreamout 2011-10-26 22:43   좋아요 0 | URL
ㅎㅎㅎ 네. 저와 같은 분들이 꽤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
 
사랑의 미래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시를 하고 말하는 게 낫겠다. 1은 저자가 ‘날카로운 가시 같은 문장들’이라고 느꼈던 시어들. 각 글들의 맨 처음에 인용/제시되어 있고 (물리적으로) 왼쪽 페이지에 전시되어 있다. 2는 저자 자신의 문장들. 그와 그녀라는 인물을 통해 에세이 같은 픽션 같은 그렇지만 또한 詩를 갈구한 문장들.

41개의 1, 그 중 몇몇은 전부터 좋아했던 그 중 몇몇은 읽었던 것이었지만 기억나지 않았던 그렇지만 대부분은 알지 못했던, 1은 좋았다. 詩에서 떨궈 나온 몇 줄의 詩 파편은 파편이지만 詩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그러한 파편이었고 나는 순간적으로 멈췄고 파고 들었고 아득했고 먹먹했다. 허수경과 이성복과 쉼보르스카와 김행숙과 등등등.

2에서 자주 보이는 낱말들. 이를테면,
오직, 무력감, 환멸, 영원, 파국, 환상, 절망, 부재, 유일, 확신, 봉인, 완벽, 절연, 주술, 현존, 순수, 악마적, 참혹, 원초적, 미학적, 낭만적, 명멸, 완성, 황폐한, 소멸…
저자의 말대로 ‘낭만적 과장법’이라 부를 만한 단어들. 이는 우리가 사랑을 얘기할 때 어쩔 수 없이 토해내는 말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을 빌미로 쓴 2의 언어들은 유리잔의 깨진 파편처럼 날카로워 찌르는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온기와 냉기. 그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시를 보았을 때 느끼는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냉기나 좋은 이야기를 읽었을 때 느끼는 털목도리 같은 온기. 그것이 없었다.

10월의 한가한 토요일에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열로 조금은 비닐하우스 같은 답답함을 느꼈던 홍대의 스타벅스. 그곳 창가와 가까운 자리에서 읽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 유리잔의 파편들은 내 맨발에 피를 흘리게 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내 발바닥은 이미 쇳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밟고 지나가니 유리파편들은 전부 가루가 되어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를 테면 고도(Godot)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대답이라면
도착할지 안 할지 알 수 없는 대답이라면

바틀비는
도래했으나 원하지 않은 대답
예상치 못했던 대답
어떤 것도 해결하지 않는 대답
같은 건 아닐까.

중요한 건 북극성처럼 너무 멀리 있어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존재는
그 존재로 인해
여기의 존재들을 변화시킨 다는 거
방황하게 한다는 거
관계하게 한다는 거
희구하게 한다는 거
스스로를 바라보게 한다는 거.

나와 나의 상황을 선명하게 드러내게 한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