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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댄스 댄스 - 상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지도와 영토>>를 읽은 후 한동안 무욕망증이라고 말해야 할지 무기력증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그런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읽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반디 코엑스점을 찾았던 10월 중순의 어느 날. 그 넓은 책의 매장이 황무지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책꽂이 사이사이를 무턱대고 걷다가 문득 ‘하루키라면 읽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장편소설 중에는 <<1Q84>>와 <<댄스댄스댄스>>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상태였으므로, 나는 “댄스댄스댄스”를 선택했다. “1Q84”보다 먼저 나왔기 때문에 읽어야겠다 라는 식의 의무감 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댄스댄스댄스”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루브감이 지금 읽어야 할 책은 이 책. 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이루카호텔의 꿈을 꾸고 이루카호텔을 찾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름은 곧 상징이다. 물론 모든 상징을 다 읽어낼 수 없고 사람마다 느끼는 상징코드는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핀호텔이라고 불러도 될 이름을 굳이 이루카호텔이라고 부르고 싶은 화자의 심정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 짐작했다. 호텔의 여직원 유미요시를 만나고 그녀의 집까지 배웅했을 때 ‘나(화자)’는 그녀와 잘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느끼는데, 그럼에도 문 앞에서 발을 돌린다. “공정한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 말 “공정한 게 아니다”에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이 소설에 빠져 들 수 있었는데…
“오디세이아”를 읽은 적은 없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자기의 왕국에 돌아왔을 때 구혼자들의 압박을 받고 있던 페넬로페를 구하기 위해, 바로 등장해서 모든 것들을 일거에 해결하지 않고 ‘시합’을 벌여 자기가 최종 승자가 되어 페넬로페 앞에 나타난다는 에피소드는 알고 있었다. 그 에피소드를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생각해보니 ‘이타카’의 주인이고 ‘페넬로페’의 남편인 오디세우스가 자기의 권리를 바로 드러내지 않은 까닭은 자기의 아내, 10년간의 전쟁과 다시 또 10년에 걸친 길고 긴 귀환 과정을 겪은 자신보다 어쩌면 더 고생했을 페넬로페 앞에 바로 등장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라고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공정한 게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러자 ‘이루카호텔’이 바로 “이타카”이고, 유미요시는 페넬로페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댄스댄스댄스”는 현대적 오디세이고, 공정한 게 아니다. 라는 자세, 그런 윤리적 태도가 소설의 어두운 배경이 되는 고도자본주의 사회를 헤쳐 나가는 주인공들의 기준 같은 것이 되지 않겠는가 짐작하게 되었다. 이타카를 먼저 찾아 이타카를 확인한 후 모험을 거쳐 다시 이타카로 리턴하는 것. 소설은 이런 구조다. ‘이타카(고향)’와 ‘모험’, ‘리턴’. 자기계발서와 헐리우드 애니메이션에 진저리 칠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들. 그런데도 물론, 지루할 리가 없다.
2.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에 보면 융의 글이 인용된 것이 있는데,
“만일 우리가 무의식도 의식과 함께 공동의 결정 요소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의식적인 요구와 무의식적인 요구를 가능한 한 함께 고려하며 살 수 있다면, 아마도 개인성 전체의 무게 중심이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개인성의 중심은 자아, 그러니까 의식의 중심에 있지 않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가상 지점에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중심이 ‘자기’가 될 것이다.”
<<고독의 위로>>의 부제 ‘A Return to the Self’는 그러니 “댄스댄스댄스”의 주제의 어떤 핵심을 똑 떨어지게 말해주는 듯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아(ego)’가 아니라 ‘자기(the Self)’로의 리턴 이라는 것.
왜 자기로의 리턴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두 가지의 문제. 또는 두 종류의 상실을 겪고 있다. 친한 친구의 자살과 아내와의 이혼으로 인한 ‘관계’의 상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서 어떤 만족감도 얻지 못한다는 것, 자기 일과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가 하는 일은 잡지 같은 것들에 맛집 기사 같은 중요하지 않은 글을 써서 납품(!)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일을 ‘문화적 눈 치우기’ 라고 폄하하듯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일에 대한 불만족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은 좋은 인간관계에서 온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렇지만 앤서니 스토는 ‘관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개인의 ‘고독’이라고 말한다. 고독을 통해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이 발현되고 그것이 일이나 개인의 취미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말하고 있다. “댄스댄스댄스”의 ‘나’는 유미요시(미래의 연인)와 유키(모험의 동반자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딸 같은) 그리고 ‘고탄다(오랜만에 만나 새로운 우정을 느끼는 친구)’를 통해 적지만 진실한 인간관계를 회복한다. 그리고 바로 이 소설(댄스댄스댄스)을 직접 씀으로써 눈 치우기가 아닌 창작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물론 이런 과정을 이처럼 재미없게 설명하진 않는다. 음악에 맞춰 한 발짝 한 발짝 꾹꾹 눌러 스텝을 밟듯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진지하게, 때론 경쾌하게. 누구보다도 잘.
3.
중요한 것은 모험이다. 댄스의 스텝을 밟는 것.
신화 속 모험이라면 괴물들과의 혈투가 되겠지만, 현대의 모험은 이미 상식이 되어버려 누구도 반박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가치체계-이 소설에서는 고도자본주의-에 반하는 것이 모험이 될 터이다.
삿포로에서 도쿄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는데 눈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했을 때, 그가 자동차를 렌트해 유키(雪)를 태우고 함께 공항 주변 도로를 빙글빙글 돌며 드라이브를 하는 장면. 이 장면은 이 모험의 가장 아름다운 상징이고, 내가 제일 좋아하게 된 장면이다. 이 드라이브가 이뤄낸 것들은 놀라운데 1)효과와 효율을 무시하고 (기름을 낭비하며) 그냥 돌고 돈다는 것 자체가 고도자본주의 사회가 최고로 치는 가치체계를 저버리고 있다는 점 2)현재 유행되는 록음악과 옛 음악이 섞이는 것처럼, 폐쇄적인 유키의 마음이 살며시 열리며 그와 유키 사이의 진실한 관계(물론 이것은 아빠와 딸과의 관계 같은 것이다)가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는 점 3)이 장면을 공중에서 본다고 상상하면, 이 드라이브 코스는 무한의 표지처럼, 크게 휘둘러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심분리기처럼 보인다는 점. 그래서 시시한 것, 사소한 것들을 모두 걸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 4)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나’의 곁의 눈-유키(雪), 그리고 빙글빙글 드라이브, 크게 울리는 록음악, 마치 천지가 혼연일체 되는 것 같은 커다란 해방감 같은 것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5)’좋은 것은 적다’는 그의 말이 주는 울림. 진실하지 못한 인간관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소설 속 ‘나’와 독자인 ‘나’의 답답함을 순간적이나마 확 뚫어주고 있다는 점. 소수의 좋은 사람에 인간 관계를 집중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한 번 홀딱 빠져보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들게 했다는 점. 이런 기분들을 한꺼번에 환기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멋진 드라이브. 나에게는 올해의 한 컷.
4.
소설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공정한 게 아니다’라는 문장부터였지만, 나의 무욕망증, 무기력증의 해소는
“그녀는 방 한가운데 서더니 밝은 청색의 윗도리를 소리도 없이 쑥 벗고는, 주름이 잡히지 않게끔 라이팅 데스크의 의자 등받이에다 걸쳐놓았다. 그러곤 걸어서 내 곁으로 오더니 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앉았다. 상의를 벗고 나니,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약해서 상처받기 쉬운 여자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하얀 블라우스는 말끔하게 다림질되어 있었다. 5분 정도를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껴안고,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얹고 눈을 감은 채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눈이 거리의 음향을 빨아들이면서 언제까지나 내리고 있었다. 음향이라는 게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라는 장면을 읽고 나서였다. 성욕이 회복됐다. 뭐든 어떠한 욕망이라도 하나가 깨면 다른 것들도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높은 법이다. 이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사운드(침묵의 사운드)가 계기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소설 속 문장은 소설 안에서만 작용되는 법칙은 아닌 것이다. (이 장면을 읽고 나서 ‘사랑의 미래’와 ‘고독의 위로’를 샀다. 읽고 싶고 사고 싶은 마음이 돌아왔다.)
5.
헤닝 만켈의 <<이탈리아 구두>>를 읽고 하루키의 ‘우물’에 대한 것을 떠올렸었는데, 우물만큼이나 ‘전화’가 중요하다. 상대방에게로의 도달 (불)가능성. 사랑의 (불)가능성. 하루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 두 개만 꼽으라면, ‘우물’과 ‘전화’라고. 이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6.
나는 아내보다는 ‘딸’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유키의 어머니 아메(雨)의 남자 딕 노스가 죽었을 때 유키에게 그가 한 말, “사람은 회한이 남지 않도록 사람과 접촉해야 해. 공평하게, 되도록이면 성실하게,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사람이 죽으면 간단히 울면서 후회하곤 하는 인간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 개인적으로.” 이런 말을 나도 내 딸에게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완전 감정이입 했다. 유키 라는 존재는 관계와 일에서 상실감을 느낀 ‘나(화자)’에게 부과된 큰 책임 같은 존재지만 또한 큰 위로 같은 존재다. 부성애라고 부를 만한 부드럽고 친밀한 감정. 이 흐믓함은 사랑하는 연인에게서도 얻지 못할 것.
두서없이 적어 내려왔다. 하지만 유기적인 이야기보다 순간적인 느낌들이 소중했다. 이 느낌이 이 소설에서 내가 얻은 ‘좋은 적은 것’이다.
하루키는 형태와 이야기. 둘 모두를 잘 다루지만 형태 쪽에 더 무게중심을 둔 작가다. 이루카와 양사나이, 아메와 유키, 유키 엄마의 남자와 유키 아빠의 남자, 쓰바루와 마세라티, 유행하는 음악과 한때 유행했던 음악, 제대로 된 요리와 정크푸드, 전화와 우물, 뼈와 불구, 키키와 메이와 준, 자본주의의 습성을 대표하는 듯한 경비(비용처리)와 매춘, 천재와 범재, 도쿄와 삿포로와 하와이, 고탄다와 나와 양사나이 등등. 어떤 상징성을 내포한 것들로 형태를 구축한다. 그런 것에 능하다.
더 훌륭한 것은 그런 형태들이 그저 굳게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키스 자렛이 『쾰른 콘서트』 PartⅡ A에서 들려준 것, 오르막길에서 굴러 떨어지는 음표들을 붙잡아 다시 위로 끌고 던지고 올려 붙이는 듯한 격렬함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 나(개인이라는 개념어가 아니라 Only라는 의미에서의 실존적 개인)에게만 딱 맞는 충격과 울림을 전해 주는 느낌. 텍스트와 텍스트 바깥의 나라는 존재 사이의 경계가 순간 사라지는 기분. 줄탁동기(啐啄同機)의 느낌. 갓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