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선배가, 야근할 사람. 밥 먹자. 라고 한다. 아무도 동조를 안한다. 나는, 저는 오늘 야근 안해도 밥은 먹을래요. 라고 말한다. L선배, 팀장실 들어가 팀장께 저녁하시겠냐고 묻는다. 셋이서 함께 저녁 먹으러 가는 도중 팀장이 묻는다. 야근하냐?. 저는 오늘만은 야근 안할건데요. 우럭매운탕을 저녁으로 먹고 나서 사무실에 들어오니 7시. 팀장이 팀장실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안한다. 8시에 메신저에 ppt가 실려 띵 하고 날아왔다. 팀장이 보낸 쪽지. 아. 더이상 못하겠다. 나 오늘 먼저 들어갈께. 내가 보낸 파일에 하는데까지 더 해서 보자. 라고 한다. 응? 야근 안 하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일요일에 나오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하는 생각은 했지만, 한다. 팀장.. 퇴근한지 10여분 뒤에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주말에 내가 나갈지도 모르는데 어느정도 니가 해놓은거 이메일로 보내놔라. 라고 말한다. 그래. 프리젠테이션은 팀장이 하는 것이니 뜻대로 수정해 드려야겠지. 11시 20분. 일차완료. 팀장 이메일로 보내고 사무실을 나온다. 지하철을 타고, 환승역에서 갈아탈 때 간발의 차이로 놓쳐 15분을 더 기다려서 환승하고 집에 오다가, 아. 맞다. 편의점에 책 배송 와 있겠구나. GS25에 들러 아사히와 하이네켄 각 하나씩 들고, 안주는 오징어땅콩을 집어들고 계산대에 와서 택배 찾을 거 있어요. 라고 말한다. 계산대 위에 놓인 박스. 한쪽 귀퉁이가 젖어있다. 느낌이 안좋다. 뭐. 어쨌든 계산하고 나와서 집에 도착. 5분만에 대충 씻고 TV를 켜니 유로 2012. 폴란드:그리스 축구가 시작한다. 경기를 보면서 박스 테잎을 가위로 쭉 찢고 책을 한 권 한 권 살펴본다. 역시. 7권중 4권이 물에 불었다. 아. 하..... 피곤하다. 뭐 까짓꺼. 글은 다 보이니까. 무시하자. 라고 생각하지만, 뇌엔 피로가 더 몰려든다. 늘 그렇듯 노트북 열고 인터넷 연결하니 교환이 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건 배송업체의 문제로 보이는데 뭐. 일단 교환신청한다.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 모르는데도 벌써부터 네 권이나 되는 이 책들을 교환하기 위해 회사에 가져갈 생각을 하니 더 한 짜증이 올라온다. 에잇. 모르겠다. 생각 끄자. 그래. 일단 신청. 방바닥에 앉아서 빵빵한 오징어땅콩 봉지를 터트리고 아사히를 딴다. 들이킨다. 으. 쇳가루냄새. 정말 캔맥주는 나랑 안맞아. 도대체 왜 우리동네 GS25엔 병으로 된 아사히는 없고 캔만 있는 걸까. 아... 힘빠져. 라고 하는 순간 폴란드의 선수가 선취골을 터뜨린다. 멋진 헤딩골.. 다음은 병맥주. 하이네켄을 따다 잠깐 채널을 돌린다.

 

 

 

첨밀밀 이다.

아. 장만옥 이다.

이교 다!

 

이민국 직원들과 함께 공항으로 (추방당하러) 가는 도중의 장면이다. 여명이 자전거를 타고 뉴욕의 길거리를 달리는 것을 본 장만옥. 이민국 직원의 차를 뛰쳐나와 그의 뒤를 쫓아 달려간다. 다을 듯 말듯, 여명은 바보같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화면 바뀜)1995년. 이교가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자유의 여신상 앞에 있는 씬. 여명은 멀리서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본다. (화면 바뀜)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이 갑작스레 사망한 날.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한 두 사람은 과거의 추억에 잠겨 거리를 멍 하니 걷다 가전제품 매장 안 TV에 나오는 등려군의 모습을 바라본다. (등려군의 노래가 배경으로 깔린 채) 장만옥이 먼저, 여명이 나중. 여명을 알아차린 것도 장만옥이 먼저. 고개를 돌리다 여명을 바라보고 놀란 듯 아닌 듯, 알듯 모를듯. 울듯 말듯. 여명이 그때서야 알아본다. 이교. 웃음 짓는다. 등려군의 사망소식을 접했을 때 부터 이 장면까지의.. 장만옥의 그 표정. 그.. 표정.

 

 

그 모습을 처음 봤었던 그 언제적엔가, 얼마나 마음이 그랬던가... 저 표정. 정말 이렇게나 오랜만에 보는데도 사람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이 말 못할 감정은 어찌 이렇게 한치도 변함 없는지.

 

 

음력으로 쇠지만 5월 8일은 양력으로 내 생일이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때 이 별것 아닌 우연에 얼마나 감탄했는지. 영화를 보고 난 일 년후. 나는 사랑에 빠졌었다. 장만옥만큼이나 저릿하게 했던 사람. 눈가와 콧망울이 많이 닮았다고 말하면 웃겠지. 만, 장만옥보다 예뻤었다. 장만옥만큼 멋진, 말로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곤 말할 수 없겠지만..

 

이교 다. 장만옥이다.

오늘. 아니 어제의 하루를 마감짓는 그 순간에 거기, TV 안에서 울듯 웃음짓던 사람.

이교.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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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6-09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림아웃님. 이 글은 어쩐지 댓글을 다는게 실례일것 같지만 그래도 참 좋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지친 하루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가운데 첨밀밀과 장만옥 마무리라니. 전 오래전에 본 영화라 기억에도 없는데, 참 적절한 타이밍에 첨밀밀이 드림아웃님을 찾아간 것 같아요. 세상이 나를 아주 모질게만 대하는건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

dreamout 2012-06-10 01:02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
 

오전에 이 책의 리뷰를 다 썼는데 날려버렸다. 저장 버튼을 누른다는게 그만.

내일부터는 야근이 기다리고 있으니.. 몇 자라도 기록해 둬야겠다.

감각의 논리. 라는 개념어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에 관한 연구로부터 도출했다고 하는데, 비가시적인 힘들을 가시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답들 가운데 하나. 라고 베이컨의 그림을 논한 부분에서 크게 공감했다.

반복. 이라는 개념을 벌거벗은 반복, 옷 입은 반복이라고 표현한 내용(재미있다!),

의미의 논리. 에서는 사건=의미 라는 등식, 수전 손택의 투명성.과 같은 맥락으로서 여겨지는데, 해석(의 이중성)을 넘어 직접적으로 사건=의미에 가 닿을 수 있음을, 그것이 보다 강도 높은 것임을 개념어를 통해 나타내고 있는 부분. 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후에 들뢰즈의 저작들을 읽을 때 요긴하게 쓸 수 있겠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저)은 올해 읽은 가장 강렬한 책이다.

이건 따로 리뷰를 쓰고 싶다(별 내용은 없겠지만..). '읽기'의 혁명성에 대해,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기의 중요성에 대해, 성급함은 죄이다. 라는 명제에 대해, 혁명의 본질은 읽고 쓰는 것(그는 넓은 의미에서 이것을 문학이라 부른다)이고 폭력은 부수적인 것임에 대해, 각종 '종말'을 외치는 이들에 대해, 루터의 혁명과 무함마드의 혁명, 중세 해석자 혁명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뜬 기분이다. 분노하는 그의 어조에 완전 공감하며 폭풍처럼 읽어버렸다.

 

 

우선 알랭 드 보통의 '한 남자'를 읽었다. 한 남자의 결혼생활백서다.

그의 철학 중 한 가지는 이젠 좀 확실히 깨달은 기분이다. 삶의 수 많은 '모순'들은 우리가 같은 지층면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듯 하다). 대륙과 대륙이 부딪혀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터지는 것은 지표면이라는 위상에서나 중요한 사건일 것이다. 맨틀과 핵처럼 공시적이지만 다른 위상의 평면에서라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이런 식의 해석은 '모순'문제를 재정의 하는데 매우 핵심적이다. 그는 스스로의 문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그의 문장은 1층에서 글을 쓰다 손을 뻗어 2층이나 옥상, 또는 지하에 있는 것들을 꺼내서 쓰는 문장이다. 이런 것. 배우고 싶다.

 

 

대단한 내용은 없지만, 몇 몇의 문장에서 근엄한 철학서에서라면 얻지 못할 시원한 바람 같은 것을 느꼈다.

 

 

 

 

 

 

심야식당. 아.. 결국 이 책까지 사서 보게 됐구나.

심야식당.에서 봤던 메뉴들의 사진(실물)을 볼 수 있다.

첫 메뉴인 빨간 비엔나 소시지.에 나도 몰래 끌려 급기야 아까 GS수퍼에서 사들고 오고야 말았다. 조금 이따가 볶아서, 맥주 한 잔 해야지. 오랜만에 힐링캠프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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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5-2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심야 식당을 책으로도 드라마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거기에 나온 음식의 사진이라니 흥분될라고 해요. 그렇지만.... 전.......... 다이어트 중이니까.............( ")

dreamout 2012-05-29 23:28   좋아요 0 | URL
더구나 이 만화에 나오는 음식들은 대부분 만들기가 간단해서... ㅋ

... 2012-05-2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 주에 만화 심야식당 8과 9를 연달아 봤어요. 8권에서 오끼나와 음식이라고 여주볶음이 나온던데, 이걸 먹으면서 오끼나와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메도루마 슌의 <물방울>을 읽으면 환상이겠다고 생각했죠. 기어코 실물사진이 실린 책까지 등장했군요...

<세계철학 백과사전> 담아갑니다! ^^ 요즘 소설은 많이 안 읽으시나봐요?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이 끝?

dreamout 2012-05-29 23:35   좋아요 0 | URL
연휴 마지막날이었던 어제, 사유리(맞나...)가 오키나와에 가서 여러가지 특이한 음식들 소개해 주던데. 가보고 싶더라구요..

세계철학백과사전은 서점에서 한 번 보시고 판단하세요~ 선뜻 추천할 수는 없어서요. 보시고 필요하시면 그때 생각해 보셔도 될 듯 합니다.

소설을 읽고 싶어요.. 근데 좀 자아고갈인 상태라서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소설은 손에 잘 안잡혀서 토막으로 읽을 수 있는 것들만 보고 있어요.
영국 남자의 문제(핑클러 퀘스천)와 죄와 벌의 앞 부분을 더불어 읽고는 있는데 팍팍 나가진 못하고 있어요.

... 2012-06-02 14:1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대로 오프서점에서 보다가 오히려 <잘라라,기도하는 그 손을>에 낚여버렸어요 ㅜㅜ

dreamout 2012-06-02 20:4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뜻밖의 문장이고 뜻밖의 이미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각도 못한 사운드였다. 알음알음으로 알았던 <<잉글리시 페이션트>>에 대한 내 선입견은 한 두 페이지의 독서 만으로도 곱게 부스러졌다. 이 고요. 처음부터 깊은 숨을 들어 마시게 한 이 고요. 부커상 수상작들(시끄러운 분위기거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분위기)에겐 거의 기대해 본 적 없는 것.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적요함과는 느낌이 또 다른. 깊게 스윽.. 하고 부드럽게 안기는 것 같은 고요.

 

소설의 주요 무대인 빌라 산 지롤라모와 사막은 동그랗게 몸을 만이미지로 계속 변주되어 나타난다. 2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했던 곳, 국경이 없는 곳. 사막. 영국인 환자 알마시와 캐서린의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 캐서린의 목 아래 움푹 패인 곳. 해나가 홀로 남아 알마시를 간호하던 빌라 산 지롤라모, 빌라 안에서 알마시가 누워 있던 트롱프 뢰유가 그려진 2층의 방, 킵의 천막 안과 킵이 폭탄을 해체하던 구덩이들. 그 동그랗게 말려 들어간 장소들에서 그 고요는 고요하게 물결쳐 작고 고요한 와류들을 또다시 생성해 내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이 고요에는 기적 같은 우정의 분위기(플라토닉 러브 같은)도 녹아 들어가 있어... 아이를 자기 손으로 지운 젊은 간호사 해나, 거의 탄소 결정체나 다름없이 타 버린 영국인 환자 알마시, 엄지 손가락을 잘린 카라바지오와 자기의 전쟁이 아닌데도 그 한복판에 있어야 하는 킵. 그들이 우연찮게(그렇지만 우연만은 아닌 어떤 조화로) 빌라 산 지롤라모에 모여 작은 유리잔을 얼굴에 갖다 대고 눈물을 모으는것 같은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었다.

 

또 그리고 이 고요에는 해나가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국인 환자 알마시와 있기를 결정한 순간과 킵이 해나가 곁에 있는 상황에서 지뢰를 해체하던 순간, 킵이 해나와 둘 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알마시의 보청기 전선을 끊던 순간과 알마시가 캐서린의 목소리를 사랑하게 된 순간과….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가 생긴 이후로 가장 지독한 폭탄 두 개가 떨어지던 순간이 함께 하는 것이다.

 

무언가 인간적인 것을 만져야 했다.’ 킵이 그러했던 것처럼 너무나 비인간적인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여전히 비인간적인 여러 사건들을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설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고요, 사랑, 우정, 그리고 위반의 순간들-을 만지게 해 주고 있었다. 기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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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권의 책을 섞어 읽는 일은 언제부터인가 책들간의 경주처럼 되어 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3~4권의 책을 함께 읽다가 결승선까지 함께 골인하는 것은 1권 정도. 나머지는 첫 부분만 읽고 어느새 한적한 곳에 쌓아두게 된다. 학창시절에는 열 권이 넘는 책을 여기저기 연결해 가며 나름 초병렬 독서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의 독서는 지식의 네트워크 형성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구나 하고.. 반성은 아니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가 있다.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앞 부분을 읽고, 《들뢰즈 개념어 사전》을 비슷한 시기에 읽고, 거기에 대니얼 카너만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다가, 샤를르 페펭의 《세계철학 백과사전》을 읽고, 거기에 질 들뢰즈가 쓰고 박정태가 엮은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의 앞 부분을 읽고 있는 지금, 같은 저자의 책을 연달아 읽거나 비슷한 주제를 품고 있는 책을 함께 읽는 것의 유용함 같은 것을 새삼 느끼고 있어서다.

 

허나 나는 동일 저자의 책을 연달아 못 읽는다. 아니, 그런 식으로 읽고 싶지 않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주제의 책들을 함께 읽는 것도 꺼려진다. 설사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더라도 연속해 읽는 일은 학창시절의 공부를 떠올리게 하고, 내게 공부라는 말은 부정적이다. 재미있는 공부. 라는 말처럼 웃긴 말도 없다고 생각하는 축이다. 개그콘서트가 아무리 재미 있어봐라. 그걸 보고 비슷하지만 다른 개그를 만들어야 하는 다른 개그맨들에게 그게 재미있기만 한지. 시청자들도.. 연속해서 한 20편을 보면 개그콘서트가 재미 있다는 말은 입에 달지 못할 것이다. 하는 심정인 것이다. ‘공부라는 말에는 반복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높고, 반복은 또한 억압같은 것을 심중으로 느끼게 한다. 난 어쨌든 억압.은 싫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있어서, 니체에게 있어서 이 반복은 내가 생각하는 반복과 뉘앙스가 다르다.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새삼스레 《들뢰즈 개념어 사전》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나도 인문학 공부라는 것을 일종의 삶을 위한 적정기술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말과 사물》의 도입부는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를 분석하는 그 유명한 장인데, 이것을 이해하기 보다 쉽게 한 텍스트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중 <플라톤주의를 뒤집다(플라톤과 시뮬라크르)>였다. 그리고 이 들뢰즈의 글을 읽는데 《들뢰즈 개념어 사전》이 암약적으로 큰 효과를 발휘했고, 또한 이들을 읽는데 카너만의 유명한 시스템1과 시스템2. 그 둘을 생각해낸 그들의 방식 그리고 창조해 낸 개념의 속살 같은 것이 푸코와 들뢰즈의 철학들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다른 부분을 이야기하는지 하면서 읽자 흥미가 더해졌다. 페펭의 글은 거기에 덧붙여 (특히)프랑스 철학자들의 어떤 에피소드적 면모를 가볍게 느낄 수 있어 막간을 적절히 채우는 역할을 했다. 다섯 권의 책이 하나의 팀을 이뤄 함께 뛰고 있는 기분이랄까. 이런 기분도 오랜만이라 반갑지만, 나는 소설을 읽고 싶다고~!

 

그러니 이 다섯 권의 운명은(두 권은 이미 읽었지만) 또 어떻게 흘러갈지알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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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셀린 붓다
정영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1.

이것은 결과가 좋은, 무언가를 작동시키는, 그런 문장은 아니다. 그러나 이 문장들의 형태는 SQL 쿼리(Query)를 떠올리게 한다. 엔터 키를 탁 치면 무언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 그런 문장. 아마도, ‘그리고(and)’혹은(or)’. 이 두 접속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작동시키는 문장이 아니라고 느낀 것은 이 270여 페이지를 꽉 채우고 있는 쿼리문에 엔터 키를 탁 치면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정의 문장, 어지러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문장이다. 인간의 소장. 7미터짜리 꼬불꼬불하고 부드러운 관을 마치 음식물이 되어 통과하는 듯한 느낌을 독자에게 준다. ‘그리고혹은그리고 쉼표(,)로 연결되는 그 리듬에 정신을 실으면 곧 꿈틀꿈틀 연동운동을 느끼게 된다. 뭔가 밀어내고 뭔가 자꾸 나를 휘몰아치는 기분. 드럼 세탁기 속 빨래들 처지가 된 것 같은.

 

 

2.

이 소설의 문체로 글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가능할 것 같다. 이어폰을 꽂고 하나의 생각거리를 머리에 떠올린 채 산책하듯 배회하듯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상념들. 무언가 하나의 사물을 봤을 때 연상되어 떠오르는 관념과 경험들. 그런 것들을 그대로 종이에 옮긴다면 이와 비슷한 문장이 될 것이다. 물론 누구든지 똑같진 않겠지. 도둑과 돌고래와 염소와 양과 쥐, 올빼미와 고양이와 벤치와 백조와 놀이공원과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도시들과 궁전들과 호텔들과 베케트와 몰로이와 울프와 등대로와 비트겐슈타인. 정영문이 토해내는 얘깃거리들은 당연히 독자들과 다르다. 하지만 독자들 또한 정영문의 얘깃거리들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얼마든지 토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체를 베끼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건 문장력의 문제도 관념의 틀의 문제도 아니다. 전정기관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일단 어지러워서 쓰지 못할 것이다. 또 하나, 우리들 생각의 편향. 인간의 뇌는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이렇게 길게 무의미한 것들을 풀어놓기는 어려운 일이다.

 

 

3.

무의미. 라는 말을 썼지만, 물론 우리의 사고는 이 무의미에서 기어코 의미를 뽑아내고야 만다. 서사를 꺼린다. 는 저자의 말과 사실주의와의 기나긴 전쟁. 이라는 표현을 보면 짐작되는 것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서사를 꺼리지만서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것이 작품에 분명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용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한다.

 

 

4.

작가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나를 휘저어놓기는했으나, 나를 휘어잡는 순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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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2-05-01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좋아하는 작가의, 그러나 끝내 끝까지 읽어내지는 못했던 작품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어요. 길을 가다 소와 마주치는 부분까지 읽은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네요. 아무려나, 어디면 또 어떻겠어요.

dreamout 2012-05-02 18:34   좋아요 0 | URL
독특하더군요! 한국에선 못 본 유형의 소설였어요 ^^

비로그인 2012-05-0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력적인 문장들로 가득한 리뷰네요. 저절로 추천을 누르게 만드는... 잘 읽었습니다^^

dreamout 2012-05-02 18:34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