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페이션트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뜻밖의 문장이고 뜻밖의 이미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각도 못한 사운드였다. 알음알음으로 알았던 <<잉글리시 페이션트>>에 대한 내 선입견은 한 두 페이지의 독서 만으로도 곱게 부스러졌다. 이 고요. 처음부터 깊은 숨을 들어 마시게 한 이 고요. 부커상 수상작들(시끄러운 분위기거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분위기)에겐 거의 기대해 본 적 없는 것.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적요함과는 느낌이 또 다른. 깊게 스윽.. 하고 부드럽게 안기는 것 같은 고요.

 

소설의 주요 무대인 빌라 산 지롤라모와 사막은 동그랗게 몸을 만이미지로 계속 변주되어 나타난다. 2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했던 곳, 국경이 없는 곳. 사막. 영국인 환자 알마시와 캐서린의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 캐서린의 목 아래 움푹 패인 곳. 해나가 홀로 남아 알마시를 간호하던 빌라 산 지롤라모, 빌라 안에서 알마시가 누워 있던 트롱프 뢰유가 그려진 2층의 방, 킵의 천막 안과 킵이 폭탄을 해체하던 구덩이들. 그 동그랗게 말려 들어간 장소들에서 그 고요는 고요하게 물결쳐 작고 고요한 와류들을 또다시 생성해 내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이 고요에는 기적 같은 우정의 분위기(플라토닉 러브 같은)도 녹아 들어가 있어... 아이를 자기 손으로 지운 젊은 간호사 해나, 거의 탄소 결정체나 다름없이 타 버린 영국인 환자 알마시, 엄지 손가락을 잘린 카라바지오와 자기의 전쟁이 아닌데도 그 한복판에 있어야 하는 킵. 그들이 우연찮게(그렇지만 우연만은 아닌 어떤 조화로) 빌라 산 지롤라모에 모여 작은 유리잔을 얼굴에 갖다 대고 눈물을 모으는것 같은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었다.

 

또 그리고 이 고요에는 해나가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국인 환자 알마시와 있기를 결정한 순간과 킵이 해나가 곁에 있는 상황에서 지뢰를 해체하던 순간, 킵이 해나와 둘 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알마시의 보청기 전선을 끊던 순간과 알마시가 캐서린의 목소리를 사랑하게 된 순간과…. 그리고 무엇보다 인류가 생긴 이후로 가장 지독한 폭탄 두 개가 떨어지던 순간이 함께 하는 것이다.

 

무언가 인간적인 것을 만져야 했다.’ 킵이 그러했던 것처럼 너무나 비인간적인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여전히 비인간적인 여러 사건들을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설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고요, 사랑, 우정, 그리고 위반의 순간들-을 만지게 해 주고 있었다. 기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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