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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셀린 붓다
정영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1.
이것은 결과가 좋은, 무언가를 작동시키는, 그런 문장은 아니다. 그러나 이 문장들의 형태는 SQL 쿼리(Query)를 떠올리게 한다. 엔터 키를 탁 치면 무언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 그런 문장. 아마도, ‘그리고(and)’와 ‘혹은(or)’. 이 두 접속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작동시키는 문장이 아니라고 느낀 것은 이 270여 페이지를 꽉 채우고 있는 쿼리문에 엔터 키를 탁 치면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정의 문장, 어지러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문장이다. 인간의 소장. 그 7미터짜리 꼬불꼬불하고 부드러운 관을 마치 음식물이 되어 통과하는 듯한 느낌을 독자에게 준다. ‘그리고’와 ‘혹은’ 그리고 쉼표(,)로 연결되는 그 리듬에 정신을 실으면 곧 꿈틀꿈틀 연동운동을 느끼게 된다. 뭔가 밀어내고 뭔가 자꾸 나를 휘몰아치는 기분. 드럼 세탁기 속 빨래들 처지가 된 것 같은.
2.
이 소설의 문체로 글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가능할 것 같다. 이어폰을 꽂고 하나의 생각거리를 머리에 떠올린 채 산책하듯 배회하듯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상념들. 무언가 하나의 사물을 봤을 때 연상되어 떠오르는 관념과 경험들. 그런 것들을 그대로 종이에 옮긴다면 이와 비슷한 문장이 될 것이다. 물론 누구든지 똑같진 않겠지. 도둑과 돌고래와 염소와 양과 쥐, 올빼미와 고양이와 벤치와 백조와 놀이공원과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도시들과 궁전들과 호텔들과 베케트와 몰로이와 울프와 등대로와 비트겐슈타인. 정영문이 토해내는 얘깃거리들은 당연히 독자들과 다르다. 하지만 독자들 또한 정영문의 얘깃거리들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얼마든지 토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체를 베끼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건 문장력의 문제도 관념의 틀의 문제도 아니다. 전정기관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일단 어지러워서 쓰지 못할 것이다. 또 하나, 우리들 생각의 편향. 인간의 뇌는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이렇게 길게 무의미한 것들을 풀어놓기는 어려운 일이다.
3.
무의미. 라는 말을 썼지만, 물론 우리의 사고는 이 ‘무의미’에서 기어코 ‘의미’를 뽑아내고야 만다. 서사를 꺼린다. 는 저자의 말과 사실주의와의 기나긴 전쟁. 이라는 표현을 보면 짐작되는 것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서사를 꺼리지만’ 서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것이 작품에 분명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용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한다.
4.
작가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이 작품은 나를 ‘휘저어놓기는’ 했으나, 나를 ‘휘어잡는 순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