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권의 책을 섞어 읽는 일은 언제부터인가 책들간의 경주처럼 되어 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3~4권의 책을 함께 읽다가 결승선까지 함께 골인하는 것은 1권 정도. 나머지는 첫 부분만 읽고 어느새 한적한 곳에 쌓아두게 된다. 학창시절에는 열 권이 넘는 책을 여기저기 연결해 가며 나름 초병렬 독서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의 독서는 지식의 네트워크 형성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구나 하고.. 반성은 아니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가 있다.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앞 부분을 읽고, 《들뢰즈 개념어 사전》을 비슷한 시기에 읽고, 거기에 대니얼 카너만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다가, 샤를르 페펭의 《세계철학 백과사전》을 읽고, 거기에 질 들뢰즈가 쓰고 박정태가 엮은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의 앞 부분을 읽고 있는 지금, 같은 저자의 책을 연달아 읽거나 비슷한 주제를 품고 있는 책을 함께 읽는 것의 유용함 같은 것을 새삼 느끼고 있어서다.
허나 나는 동일 저자의 책을 연달아 못 읽는다. 아니, 그런 식으로 읽고 싶지 않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주제의 책들을 함께 읽는 것도 꺼려진다. 설사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더라도 연속해 읽는 일은 학창시절의 ‘공부’를 떠올리게 하고, 내게 ‘공부’라는 말은 부정적이다. 재미있는 공부. 라는 말처럼 웃긴 말도 없다고 생각하는 축이다. 개그콘서트가 아무리 재미 있어봐라. 그걸 보고 비슷하지만 다른 개그를 만들어야 하는 다른 개그맨들에게 그게 재미있기만 한지. 시청자들도.. 연속해서 한 20편을 보면 개그콘서트가 재미 있다는 말은 입에 달지 못할 것이다. 하는 심정인 것이다. ‘공부’라는 말에는 ‘반복’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높고, 그 ‘반복’은 또한 ‘억압’같은 것을 심중으로 느끼게 한다. 난 어쨌든 억압.은 싫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있어서, 니체에게 있어서 이 ‘반복’은 내가 생각하는 반복과 뉘앙스가 다르다.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새삼스레 《들뢰즈 개념어 사전》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나도 ‘인문학 공부’라는 것을 일종의 삶을 위한 ‘적정기술’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말과 사물》의 도입부는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를 분석하는 그 유명한 장인데, 이것을 이해하기 보다 쉽게 한 텍스트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중 <플라톤주의를 뒤집다(플라톤과 시뮬라크르)>였다. 그리고 이 들뢰즈의 글을 읽는데 《들뢰즈 개념어 사전》이 암약적으로 큰 효과를 발휘했고, 또한 이들을 읽는데 카너만의 ‘또’ 유명한 시스템1과 시스템2. 그 둘을 생각해낸 그들의 방식 그리고 창조해 낸 개념의 속살 같은 것이 푸코와 들뢰즈의 철학들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다른 부분을 이야기하는지 하면서 읽자 흥미가 더해졌다. 페펭의 글은 거기에 덧붙여 (특히)프랑스 철학자들의 어떤 에피소드적 면모를 가볍게 느낄 수 있어 막간을 적절히 채우는 역할을 했다. 다섯 권의 책이 하나의 팀을 이뤄 함께 뛰고 있는 기분이랄까. 이런 기분도 오랜만이라 반갑지만, 나는 소설을 읽고 싶다고~!
그러니 이 다섯 권의 운명은(두 권은 이미 읽었지만) 또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