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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로 - Traces of Lov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가을로. 제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처음엔 으로의 for적 의미로 생각했었는데 문득 가을 길을 뜻하는 게 아닌가싶었다. 김대승 감독은 인터뷰에서 가을로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토로했다. 삼풍백화점 참사가 여름이었기에 거기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가을로이고, 길을 의미하는 가을로이기도 하단다. 제목에서도 그렇듯 이 영화를 알아가기엔 시간이 좀 요구된다. 영화를 본 즉시 무엇인가 얻어내기 보단 영화를 곱씹고 되새기며 그 뜻을 짐작해 보아야 하는 영화가 아닐까. 스릴러, 서스펙트, 코미디 등등의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장르의 자극적인 영화와는 영 거리가 있다. 영화 <가을로>는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그 것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인생 같은 영화다. 한국의 가을을 완벽하게 담아낸 단풍 빛이 가득한 영화 <가을로>를 이야기하련다.
제 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관심과 기대를 받았던 영화 <가을로>는 개막작 예매 시작 2분 45초만에 매진되어 예년의 기록을 갱신한 화제작이다. 나 또한 많은 기대를 한 작품이라 Piff에서는 놓쳤지만 개봉 첫날 꼭 보러가리라 결심했었다. 지인이 동래CGV개관행사에 무료시사회에 있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갔었는데 거기에 <가을로>도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닌가. 개봉 전에 무료로 본다니 완전 땡잡았다. 10월 25, 26일 양일간 무료시사회를 했었는데 <가을로>는 첫날엔 배부 즉시 매진되어 다음날로 미뤄야했다. 나 말고도 다들 기대했나보다. 25일엔 <천하장사 마돈나><잔혹한 출근> 26일엔 <뚝방전설>과<가을로>를 봤는데 영화제에 온 기분이었다. 26일 배부 전부터 기다려 마침내 영화 표를 얻을 수 있었다. <뚝방전설>은 <가을로> 상연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시간 때우려고 본 영화였는데 여기에 유지태가 우정출연 하는 게 아닌가. 그 것도 비열하기 짝이 없고 피도 눈물도 의리고 뭐고 없는 조폭으로 말이다. 앗 실수다. 이 것이 그 다음 보게된 영화 <가을로>에 영향을 미칠 줄이야. 그래서 그런지 아님 평소에 노숙자 패션을 즐기는 그라 그런지 그의 멜로 연기는 크게 와 닫지 않았다.
<가을로>는 영화<번지점프를 하다>와 <혈의 누>로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였던 김대승 감독의 세 번째 영화다. 출연진도 화려한데 <여자 정혜>로 영화에 데뷔한 신인 배우 김지수와 영화만 고집하는 영화인 유지태, 영화 `똥개` `주홍글씨` `극장전` 에 출연, 입지를 다지고 있는 배우 엄지원이다.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자연이 네 번째 주인공이란다. 스텝진도 화려한데 감독이고 배우고 스텝이고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정평이 나있는 사람들이다. 영화 제작과정 또한 대단하다. 긴 시간을 투자한 사전 헌팅 작업과, 10개월이라는 촬영기간 동안 계절을 거스르며 담아낸 한국의 자연은 새로움을 안겨준다. 지난가을과 겨울을 촬영하고 올 여름 담아낸 필름은 사실 영화 속 스토리의 전개와 역행한다. 영화는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이 재밌다. 유난히 더웠던 올 여름, 긴 팔을 입고 가을의 분위기를 담아내야 했던 배우들, 눈 덮힌 산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촬영장비를 짊어지고 겨울 산을 올라야 했던 스텝들, 모두의 피와 땀이 어우러진 영화 <가을로>는 그래서 애착이 간다고 한다. 삼풍백화점 참사 장면을 찍기 위해 10억원 비용과 미니어처 실사 촬영, 컴퓨터 그래픽 등 영화의 모든 기법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시간과 돈, 노력을 아끼지 않은 그야말로 정열이 깃든 영화다.
삼풍 참사로 사랑하는 사람 민주(김지수)를 잃고 10년을 고통 속에 사는 현우(유지태)가 민주의 다이어리에 적힌 그들만의 신혼여행지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행지에서 의문의 여인 세진(엄지원)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들은 민주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생존자가 가지고 있는 가슴 아픈 상처들을 여행이라는 루트를 통해 서서히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 <가을로>의 줄거리이다. 영화의 끝에서 무엇인가 결말을 내지 않는 엔딩이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해서 좋았고 왠지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스토리부분이 좀 부족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현우의 아픔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나는 감정이 메마른 인간인가 보다. 깊어 가는 가을을 더 무겁게 하는 영화가 아닐까.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7번 국도를 따라 떠나는 여행, 우이도의 사막으로 불리는 모래언덕, 가장 한국적인 정원 소쇄원, 가보고 싶다. 가을을 극장에서 만나고 싶다면 이 영화가 어떨까. 풍경 사진을 보듯 여유를 가지고 본다면 그리 나쁘지 않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