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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66매)         그날 밤 그 자리에

혜나는 그 날 밤 거기서 모든 걸 끝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 그래서 인생의 맨 마지막 날에만은 완벽한 걸 한 번 시현해보고 싶어졌다 . 그 날  밤 그 자리에서만은 완벽하게 끝내서 자기네 모자를  발견하더라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게 하고 싶었다 . 그래서 사체를 수습하더라도 누가누군지 모르도록 , 수습한 사람들이 자기네 모자 신원을  알아내지 못하거나 알아낼 때까지 애를 먹이고 싶었다 .




그런데 그만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어차피 죽으러 가는 길이었지만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휠체어를 밀고 가는 길은 만만찮았다 . 잠든 현빈이가 비를 맞지 않도록  박쥐우산을 펼쳐들었지만 빗발이 거세 조금씩 현빈의 몸이 젖고 있었다 . 어차피 죽으러 가는데 비를 맞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 조금 있으면 자기네 모자 시체는 달려오는 기차에 짓이겨져서 살과 피와 뼈가 각각 독립성을 잃고 흩어져버릴 텐데...그리고 곧 빗물에  씻길 텐데...그러면서 생각했다 . 하참!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지만 나처럼 이렇게 철저히 힘들고 출구가 없이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사람이 또 있단 말인가 ? 그래도 아직 완전히 지치지 않았을 때 완벽히 죽어버려서 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민망한 장애인 모자가 되진 말아야지...뭐 그런 생각을 했다 .




현빈은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




아가야! 미안해 ...나도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 뭔 세상이 이렇게 무정하냐 ?네가 왜 병에 걸렸는지도 엄마는 모르겠고 그 병명이 뭔지 의사들이 왜 못 찾는지도 모르겠고 네 아비가 왜  우리 모자를 떠났는지도 나는 모르겠다 . 그러나 어쨌든 너와 나만 죽어버리면 간단하다 . 상빈이는 그냥저냥 어떻게   살아가겠지...보육원에 맡기든가 아니면 ...모르겠다...그 애는 사지가 멀쩡하니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




그때 혜나는 철로 저 쪽에 선 그림자를 발견했다 . 누굴까 ? 이상도 해라, 이 비오는 밤에 누가 철로에 섰는가 ?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인가 ? 근데 왜 저기에 섰지 ? 나처럼 죽을 때까지 휠체어 타야하는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 누구나 자기  자신이 겪는 불행이 가장 절실하다고 느끼겠지만 혜나는 정말 그랬다 . 어느 날, 어린 자식의 무릎이 구부러지면서 아들은 어이없이 푹 주저앉았다 . 엄마! 이상해!다리가 힘이 빠져서 일어설 수가 없어 . 그러게 밥을 잘 먹어야 한다고 말했잖아 . 근데 엄마! 이상하게도  밥맛이  없어 . 그래도 먹어야지 . 혜나는  어린 자식에게 어떻게든 밥을 먹이려고  참기름을 치고 깨소금도 솔솔 뿌린 다음 김가루도  손바닥으로 잘 비벼 넣었다 . 그리고 한 입 먹어보는데...맛이 없었다 . 이런! 간장을 넣지 않았네! 그러니까 맛이 없지, 하면서 몽고간장도 반 술  넣어서 비볐다 . 그러나 현빈은 여전히 밥숟가락을  작게 떴다 . 왜 그러니 ? 푹푹 좀 떠서 와구와구 , 먹어라. 혜나는 옛날 엄마들이 , 세상에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제일 뿌듯하다는 말뜻이 뭔지 그 때 알았다 . 어린 현빈이가 밥을 뜨지 못하자 혜나는 가슴이 탔다 . 좀더 좀더 좀더 현빈에게 밥을 먹이고 싶었다 .




그렇게 현빈은 밥을 먹지 않았다 . 아니, 먹지 못했다 . 입맛을 잃고 기운도 빠졌다 . 그리고 넘어졌다 . 자꾸 넘어졌다 . 그리고 선풍기가 돌아가는 여름날처럼 권태롭고 지루하게 현빈은 아주 멀고 긴 길을 혼자 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 그것도 걸어가는 게 아니라  성능이 좋지 않은  휠체어를 타고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 달아났다 . 혜나는 알고 싶었다 . 왜 그런지,  도대체 병명이 뭔지...그러나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 현대의학이 발달해  인간도 복제해낼 수 있다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작고여린 소년이 왜 다리 힘을 잃고 온몸이 다 뒤틀려 고통을 겪어야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심하게 떨리는 한쪽 다리를 잡고 있는 열두 살 현빈이.

집에서는 거의  엎드려 있는 현빈이가 무리하게 몸을 움직일 때면, 현빈이의 다리에는 심한 경련이 일어난다. 혼자 앉는 것이 힘들 뿐 아니라, 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 달팽이 같은 모습.

현빈이는 척추도 50도 정도 휘어져 있어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키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무엇보다 현빈이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픈 몸이 아닌 병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 불과 7년 전, 여느 아이보다도 건강하고 씩씩했던 아이였는데... 어느 날부터 양쪽 무릎을 붙이고 걷기 시작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상태는 더 나빠졌다. 지난 7년간 여러 병원을 다니며, 온갖 검사를 해보았지만 원인을 모른다는 말 뿐...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었기에 현빈이는 제대로 된 치료도 받을 수 없었다.




혜나는 곧 버림을 받았다 . 이름붙이자면   합의이혼이지만 그건 통첩이었다 . 남편은 현빈의 질병이 혜나 때문이라고 원망했다 . 그게 왜 혜나 잘못인지는 명확히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늬네 사돈의 팔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분명히 기형아 병신 가족이 있을  거라는 못된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 물론 그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남편은 사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 그래서 그는 술의 힘을 빌었다 자꾸만 화를 냈다. 서로가 그리 내세울 만한 신랑 신부 조건이란 건 없었다 . 간신히 고교를 졸업한 남편 . 새아버지랑 함께 살기 어려워 일찌감치 혼자 살기 시작한 뒤 그는 늘 외로워했다 . 그가 다니던 가위공장에 취업했던 혜나는 착하고 성실해보여서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 그에게 큰 단점은 없었다 . 공장에서 제때 월급을 주지 못하면 어디서 단 돈 만원도 빌려온 능력이 없는 것은 뭐 ,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 혜나도 누구에겐가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으니까...결혼식도 없이 가난한 남자와 아이부터 덜컥, 가진 걸  가족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 그래도 전문대학이나마 다녔는데 아무리 부자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대학 나온 남자를 골라서 결혼하라고  그렇게 ,나이어린  동생이 조언을 했다 .  하지만  혜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 그때는 그냥 그렇게 그 남자 상열이가 좋았던 거니까 .




그러나 현빈이가 그렇게 되자  상열은 떠났다 .현빈이 병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가 괴로워하는 것도 이해했다 . 혜나도 괴로웠다 . 하지만 자신이 무너지면 어린 두 목숨도 따라서 무너진다는 걸 , 혜나는 어미로서 감지했다 . 그러나 아비는 그걸 모르는 걸까 ?그가 떠난 뒤 혜나는  기차가 오고 갈 때마다 그 앞에서 망연하게 서 있곤 했다 . 아아, 이 무서운 현실을 저 기차가 해결해줄 수  있진 않을까 ? 세상의 모든  고통은 한 방에 해결해주는 도구가 가까이 있다는 게 늘  위안이었다 .

혜나는 상열이 떠난 후 현빈과 상빈과 함께 파티를 했다 . 이제 우리는 속편하게 살 수 있어 . 그 지긋지긋한 술냄새를 맡지  않아도 된다고 .

그리고 혜나는 할 수 없이 현빈의 학교에서 청소 일을 하게 되었다 .규모가 작은 학교이므로  혜나모자의 사정을 봐서 편리를 봐준 거였다 . 아이들을 돌보며 일을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괜찮은 조건이었다 .  현빈은 철저히 엄마 손길을 기다렸다 . 담임 야예준 선생은  현빈의 상태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 그런데 야선생은 혜나에게 현빈을 도와주지  말라고 했다 . 너무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하고 만일 손길이 필요하다면  대신 자기가 해주겠단 거였다 . 혜나는 야선생의 호의를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  현빈이가 스스로 뭔가를 하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으니까 .  그러나 현빈은 엄마 앞이 아니면 결코 바지 지퍼를 내리려 하지 않았다 . 야선생 잘못이 아니라 부Rm러움 때문이었다 . 현빈은 차마 야선생에게 오줌마렵단 말을 못하고 그냥 옷에 오줌을 지리곤 했다 . 시원하게 싸지도 못하고 질금거리면 지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혜나는 이를 악물었다 . 그래 , 이상열,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 힘들다고 너만 도망쳐버리면 다냐 ?나쁜 새끼!




아무리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녀도 병명을 알아내기 힘들었다 . 현빈의 상태는 더욱 더 나빠졌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런 상태로 진행된다면 현빈의 고통은 더 심해질 게 뻔했다 . 엄마, 아파요 . 아파요 ......어떻게 해야 하나...어떻게 해야 하나...그래서 혜나는 죽기로 결심하고 철길을 찾은 거다 .  몇 날 며칠 잠을 못자고 고민하다가 힘들게 내린 결론이 죽어야만 해결된다는 거였다 . 그날 밤 그 자리에 같이 섰던 두 사람.




혜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 뭔데요 ? 저보다 더 하세요 ? 저는 이렇게 아픈 자식을 데리고 혼자 살아요 . 돈도 없어요 . 우리 아들 현빈이는 일어날 가망이 없어요 . 아저씨는  일단 건강하잖아요 .

그 자리에 있었던 우영은 말했다 저는 , 망했어요 . 망했다고요 ? 망하면 힘들 거예요 . 저는 사업은 안 해봤지만 인생 전부가 망한 거 같다고 느끼실 거예요 . 하지만  사업은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부부 맘이 안 맞으면 헤어지면  되죠 . 하지만 자식은 어떡해요 ? 말 안듣는 것도 아니고 공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몸이 아파요 . 근데 어디가 왜 아픈 건지도 몰라요 . 그냥 어느 날부터 일어서지도 못하고 기어다녀요 . 온 몸이 망가졌어요 . 병원에서도 모른대요 . 돈만 많으면 미국에라도 영국에라도 가보고 싶은데 저는 가난한 이혼녀예요 . 착하던 남편은 그냥 도망가버리고   아이들이 보고싶어해서 한 번 얼굴이라도 보게 해주려고 전화해봤는데 전화도 받지 않아요 .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은 걸 보면 우리 현빈이가 죽었단 소식 전하면 안심하려고  그러나 봐요 . 하지만 그러면 뭐해요 ? 어린 것들 둘 데리고 혼자 살아야 하는 저는  태산을 짊어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 친정이요 ? 친정도  유산을 줄만큼 부자가 아니고 아버지도 무능한 분이에요 . 동생들은,  저를 못났다고 해요 . 아, 물론 저를 도와줄 만큼 넉넉한  처지도 아니구요 . 다리 붙들고 애원해봤어요. 도와달라구요 . 저 혼자 몸이면 그냥 굶어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 하지만  어린 자식이  죽어가니까 애원해본 건데 그애들이 도와주는 정도로는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 밑빠진 독에 물붓기예요 .







우영은 사업에 실패하고 빚을 떠안게 되었다 . 젊어서는 회사원 생활을 하다가 마흔 넘어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회사를 나왔다 . 그리고 연구하던 제품을 상품화하면서 시작한  우영의 사업은 처음에는 그 나름대로  출발이 좋았다 . 봉제를 하지 않는 기능성 섬유를 사용하면 바느질기능성섬유 수요로  전망이 밝을 것 같았다 . 말하자면 테이프를 이용한  무봉제라는 아이템이었다 .  투습방수원단의 봉제선을 마감하는 재료인 원단접착 테이프를 몇 년 동안 연구해서 특허를 내기도 했다 . 원단과 원단 혹은  다른 소재를 접착하는 무봉제를 개발해서  대기업 협력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 하지만 어쩌다보니 그 기술은 순식간에 대기업에 흡수되고 우영은 대기업에 대항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 자금 조달 여력이  없는 우영은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 그런 시련이 출구를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자꾸자꾸 화를 냈다 .

- 왜 화를 내는 거야? 세상에 사업을 망해먹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

하지만 아내는 그걸 이해해주기에는 힘이 부족한 것 같았다 .

- 그러면 나는 어쩌란 말이야 ? 아들은  저렇게 대학도  졸업 못했는데 돈을 안 갖다주면 어떡해 ?당신은 양심이 있어? 없어 ? 아버님을 모시고 좁은 집으로 옮겨서 어떻게 살란 말이야 ?

- 그러니까 일단 집을 팔자고 . 그래서 모든 생활 규모를 줄이면 되잖아 .

- 생활규모를 어떻게 더 줄여 ?  나는 그렇게는 못살아 . 뭘해서라도 돈 갖구 오라구 !

- 이 사람아! 그런 말이 어딨어 ? 그렇게 못 살면 어떻게 한다는 거야 ? 내가 어디 가서 도둑질을 해와 ? 강도질을 해 ?

그렇게 버럭 , 화를 내는 순간 우영은  가슴 속이 서늘해졌다 . 그리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 어떻게 하더라도 이 사람에게는  돈만 남겨주면 되는구나 ...이십 년 이상을  정말 다른 짓 한 번 안 하고 돈을 벌어다 주었는데 아직도 모자라서 , 내 존재가 그 누구보다도 미미하구나 ...아내가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문득, 우영은 자기들에게 생명보험금이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 남은 것은 보험금뿐이었다 . 많지는 않지만  보험금을 남겨주면  아내는 장례식을 치르며 울다가도 나중에는 보험금으로 편해지겠구나 , 하는 걸 깨닫는 순간 우영은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 여행을 떠나야겠구나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아내의 심중을 떠보았다 .

- 그러면 ...나랑 못살겠으면  이 집을 팔아서 아버님과 내가 같이 살 원룸 하나만 얻어주고 당신은 선규와 살아가 .

- 이혼을 하자구 ?

-그래야 당신이 빚 독촉도 안받고 ...그나마 편해질 거야 .

우영은  자기 나름대로 아내를 배려해서 대책을 내놓은 건데 아내는 마구 화를 냈다 .

-뭐라구 ? 내 나이가 몇 인데, 이제 와서 이혼녀로 살란 말이야 ?나는 그렇게는 못살아 . 이 나이에 고대광실에서 살아도 부족한데 돈  한 푼 없이 거지꼴이 되라구 ?이혼녀가 되어서 ?

-도대체 남편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보았어 ?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면 얼마나 참담한지 , 사람을 배려하는 게 무언지 알기나 해 ?

-왜 생각을 안 해 ? 나도 살림 열심히 하고 살았어 .왜 배려를 안 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 유산 한 푼 안 물려준 시아버지를  여태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어딨어 ? 당신 어머니 병구완을 7 년이나 했어 . 내가 뭘 잘못한 거야 ?

틀린 말은 아니었다 . 다 사실이었다 .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변했다 . 과거에는 어떻든지 이제는 형편에 맞게 살아야 하는 거였다 .

- 당신 말이 다 맞아 .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잖아 . 나는 뭐 망하고 싶어서 망한 거야 ? 내가 남들처럼  게으르길 해 ? 술고래야 ? 아니면 도박을 하고 계집질을 했어 ? 이제 와서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제는 이렇게 되었으니 형편에 맞게 살아야 하잖아 .

- 어떻게 하느냐고 나에게 물으면 어떡해 ? 그러면 나는 어떡하라구 ? 내 친구들은  이 나이에 외국여행 다니고 펜션에서 휴가보내고 명품으로 휘감는데 그렇게는 못해도 요 모양 요 꼴로 나를 구렁텅이에 처박느냐고 ?

- 구렁텅이 ? 그만 좀   해요 . 그만 좀 ...그러면 어떻게 해 ?

-몰라, 몰라! 생명보험금이라도 탈 수 있게 죽어버리든가!




그게 마지막이었다 . 아내가 참고 참았던 최후의 비명이었다 . 아내는 그 말만은 참아야했다 . 하지만 참지 못하고 내뱉은 거였다 . 우영은 철퇴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 아무리 그래도 이십 년을 같이 살았는데 죽어서라도 보험금을 달라는 그 말은 ...모든 걸 마무리하는 통첩 같은 거였다 . 




그 날 우영은 집을 나왔다 . 어딘가로 가야만 했다 . 집에서 아내와  같은 지붕에서 사는 게 두려웠다 . 아내는  똑똑하고 바지런한 여자였다  . 진짜 그 자신의 말대로 시어머니 중풍 수발도 7 년이나 했고 이날까지 시아버지도 모셨다 . 열심히 교회에도 나갔고 아들에게도 지극정성이었다 . 그렇다고 헤픈 것도 아니었다 . 단 하나 옷 사고 멋 내는 걸 좋아했지만 비싼 옷을 사 입는 건 아니었다 . 인정도  많고  인간관계도  능숙해서 교회에서건  아이 학교에서건 간부를 하고 아파트 부녀회 회장도  도맡아서 했다 우영 자신이  돈만 제대로 벌어다 주었으면  살림 잘하고 싹싹한  전업주부였다 .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




집을 나온 우영은 걸었다 . 걸어갔다 .걸었다 . 걸어갔다 . 하염없이 걸었다 . 그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 차는 아내가 쓰도록  놔두고  나왔다 . 보이는 대로 차를 타고 경북 의성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28호선을 타고 걸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그러다 군위에 닿았다 .  우보면 이화리였다. 대구로 가는 919번 지방도 갈림길을 뒤로하고 급커브를 돌자 산자락 오른편에 우보역(友保驛)이 고즈넉한 나무 그늘에 조는 듯 앉아있다. 도로에서 50m쯤 떨어진 역 마당에 들어섰다 .  남쪽으로 멀리 장마철 희뿌연 안개를 걸친 팔공산이 어렴풋이 바라보였다 . 여기는 어딘가 ? 여기서 모든 걸 마감해야 하는 건 아닐까 ?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을 바라보았다 . 여기서 기다리자 .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자 . 가만, 그런데 기차에 뛰어들면 자살 아닌가 ? 자살은  보험금을 안 줄텐데 ...자살이 아니고 사고인 것처럼 위장을 해야 하는데...사고라는 걸 어떻게 보여주나 ?

우영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  이 동네에서 며칠 살다가 산책을 하는 것으로 위장해서 밤 기차에 뛰어 들어야겠다 ....




바로 그 날이었다 . 우영은  그 동네 여관에서 며칠 머물렀다 .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우보여관 . 손님도 많지 않은 여관 주인은  낯선 사내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영은 그게 홀가분했다 . 우영의 지친 모습을 보면서 그렇거니,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산책을 한다고 이리저리 걸었다 .역에는 시비(詩碑)가 서있었다.




<우보역> 박해수

이화리 모닥불

북두칠성 고갯길 넘다

왜가리 봄 햇살 몸 털고

이마 숙인 아미산




친구 따라 모닥불 꽃 보다

더 붉은 마음모아 모닥불

팔공산 넘어갔네.







불로리 마애보살입상

해질 녘 외론 가슴 타는

독경을 하네.

가슴 타는 학소대

마음을 문지르며 염불을 하네.




첫사랑 첫사랑 사랑으로

울고 가는 왜가리 눈물 따라

기차길 가네 우보역

친구 따라 강남가면

소리 죽은 삼존석불 온 삶을

불태우듯 붉고 푸르렀네.

구김 없는 목숨의 푸르른 넋







가슴 타는 눈물 타는 우보역

어울러 고향길가는 친구의

푸른 푸른 가슴 눈 시린 흰 찔레

달빛을 안고 가네.

눈 시린 달빛 애태우고 가네.




우영은 몇 번이고 그 시를 읽었다 . 달빛을 안고 가네 . 눈시린 달빛 애태우고 가네 ......오십 여년 내 삶에서 아내와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건 그냥 꿈이었던가 ?

그런데 비 내리는 그 날 밤 우영은 거기서  휠체어를 밀고 철로에 들어서는 한 여자를 보았다 . 마침 혜나는 그 날 밤 거기서 모든 걸 끝내야겠다고 생각한 터였다 .  인생의 맨 마지막 날에만은 완벽한 걸 한 번 시현해보고 싶어졌다 . 그날 그 자리에 오기까지 인생을 잘 살아보려고 한 건데  결국은 철저히 실패한 처지였다 . 하지만 그 날  밤 그 자리에서만은  임무를 완벽하게 끝내서 자기네 모자를  발견하더라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게 하고 싶었다 . 그래서 사체를 수습하더라도 누가누군지 모르도록 , 수습한 사람들이 자기네 모자 신원을  알아내지 못하거나 알아낼 때까지 애를 먹이고 싶었다 . 아, 어쩌면 자기네 모자의 살과 뼈가 휠체어 조각들과 합쳐져 쇠냄새가 강렬하게 대기에 퍼질 거 같았다 .아, 뭐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어야 하나 ? 왜 삶이란 게 이렇게까지 밖에는 마무리가  안 되게끔 엉켜버린단 말인가 ?




그런데 그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가을비였다 .  어차피 죽으러 가는 길이었지만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휠체어를 밀고 가는 길은 만만찮았다 .  어차피 죽으러 가는데 비를 맞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 조금 있으면 자기네 모자 시체는 달려오는 기차에 짓이겨져서 살과 피와 뼈가 각각 독립성을 잃고 흩어져 버릴 텐데...그리고 곧 빗물에  씻길 텐데...그러면서 생각했다 . 하,참!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지만 나처럼 이렇게 철저히 힘들고 출구가 없이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사람이 이 천지간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 살아서 얼마만큼이나 행복해보았던지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별로 없었다 . 상열과 좋았던 것도 잠시, 그가 늘 술병을 끼고 살아서 그걸 볼 때마다 가슴에 커다란 맷돌짝을 켜켜이 얹어놓았던 듯한 느낌. 그래도 아직 완전히 지치지 않았을 때 완벽히 죽어버려서 이 세상에 민망한 장애인 모자가 되진 말아야지...세상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지, 뭐 그런 생각을 했다 .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하지만   두 사람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 각각 다른 사연을 안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동시에 선 거다 . 각자 아픈  사연을 가진 거지만  두 사람은 동시에 이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고 같이 황천길을 가는 동반자가 되게 된 거다 . 그런데 갑자기 혜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

- 저기요 ...여보세요 ...뭔데요 ? 저보다 더 하세요 ? 저는 이렇게 아픈 자식을 데리고 혼자 살아요 . 돈도 없어요 . 아들은 일어날 가망이 없어요 . 아저씨는 일단 건강하잖아요 .건강하기만 하면 그리고 ...아픈 자식이 없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뭣 땜에 이러시는 건데요 ?

검은 우산을 들고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우영은 말했다 . 고죄를 하는 가톨릭 신자처럼 선선히 말했다 .

- 저는 , 망했습니다  .  나이 오십인데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망해버렸습니다 . 아내는...죽어서  생명보험금이라도  남겨달라고 합니다 . 조용히 죽어주면 아내와 아들과 늙은 아버지가 편하게 됩니다 .

- 생명보험금이요 ?남은 사람들에게 그걸 남겨주려고 이러시는 거예요 ?

- 자살이 아닌  걸로 판명되면 ...받을 수 있습니다 .비오는 밤에 길을 건너다가 ... 그래서 이렇게 우산도 들었어요 . 그러다  타이밍을 잘못 판단해서  간이역에서 사고를 당하는 겁니다 . 주머니에는  지갑과 신분증이 들었고 유서 같은 건 없습니다 . 그동안 저는 밤마다 산책을 했고  방에는 , 사업에 실패해서 도망다니는 도망일기도 써놓았고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새로운 사업 아이템도 그럴 듯하게 꾸며 놓았습니다 . 자살이 아닌 걸로 판명되면  아내는 보험금을 탈 수 있어요 .  비오는  밤에 기찻길을 건너다 사고를 당한 걸로 위장할 수  있어요 . 아내는 처음  며칠은 슬퍼하다가 나중에는 고마워하겠죠 .

- 아저씨! 그러지 마세요 ... 저는 어쩔 수 없지만 , 아저씨는 다시 살아갈 수 있잖아요 . 제발, 아저씨는 그냥 살아가세요 .저는 아이만 아니라면 무엇을 해서라도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

혜나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아주고 자기 말을 들어준다는 것에 안심이 되어서 울부짖었다 . 우영은 빗물에 섞여 더 처절해보일 수 없는 혜나를  와락 껴안고 싶었다 . .원래 누이가 없지만 너무나 가여웠다 . 병든 자식 데리고 세상을 끝내겠다는  역설적인  모성 . 남은 자식 걱정에 어찌  이 자리에 섰을까 가슴이 미어졌다 . 이렇게 아무 잘못도 없이 세상을 떠도 누구 하나 마음 아파할 것인가 . 아파한다 해도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할 것인가.  설혹 기억한다해도 무엇할 것인가 . 어린 것이 잠든 사이에  이 어미는 최대한 독하게 세상을 끝내는 걸로 마지막 선물을 주려고 하는 것인가 . 우영은 아이에게 우산을 받쳐주어 비를 안 맞게 하려는  혜나의 우산을 받아 대신 받쳐주었다 .




- 아주머니! 어쩌면 지금 여기서 아들과 함께 세상을 끝내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도 몰라요 . 저도 여기서 끝내면 남은 세 식구가 좀 더 안락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우리 자신의 생명 역시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거 아닐까요 ? 현빈이는...어쩌면 오래 못 살지도 몰라요 . 하지만  현빈이가 병사하는 그날까지 현빈이에게 따뜻한 햇살과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바다를 구경시켜주는 것이 더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요? 기차에 치어 죽는 것도 깨끗한 해결방법이지만 현빈이에게 기차여행을 시켜주고 배도 태워주고 비행기도 한 번쯤  타게 해주세요 . 현빈이가  얼만큼 이 세상을  살다가더라도 사는 동안  세상에서 신기한 것 많이 보고 어머니사랑을 흠뻑 받았다고 , 그 아름다운 기억으로 이  땅의 삶을 가지고 가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 현빈이가 사는 동안 살게 해주고 현빈이가 수명을 다하면 그때 살 건지 죽을 건지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

- 아저씨요 ?

- 저요 ? 저도 ...그냥 돌아갈 게요 .  아내가 원하면 헤어져주고 원치  않으면 다시 한 번 함께 살면서 남은 생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아보죠 .

- 예...근데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

- 그렇죠 ...우리나라는 그래요 .그렇더라도 한 일 년만 더 살아보세요 . 그리고  우리 일 년 후에 여기 우보역에서 다시 만나요 .  그때는 한밤중에 비 맞으며 만나지 말고 한낮에 만나서 현빈이랑 얘기도 나누고 일 년  지난 얘기도 해봅시다 . 그러는 거 어때요 ?

-예......

하면서 혜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 휠체어를 껴안고  울고 울고 또 울었다 . 우영은 가만히 우산을 받쳐주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 울음 끝이 희미해질 때쯤  멀리서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 마치 손님처럼 . 우영은 휠체어를 밀고 걸어갔다 . 혜나는  조용히 따라왔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밤 기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 기차 안 사람들은 조금씩 지친 얼굴로 차창에 기대고 비오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우영과 혜나는 비 그친 밤길에서 헤어졌다 . 아직 습기를 머금은 대기에 벌써 반딧불이가  마구 날면서 짜릿한 비행을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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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둘이 사는 게 그렇게 힘든 건 없었다 . 혜준은 원래 굉장히   잘살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다 . 잘 사는 친구들이 있으면 안 만났다 . 시집 잘 간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 아주 잘 나가는 사람들도  물론 만나지 않았다 . 영화에서 보는 건 괜찮았다 . 이상하게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저건 ‘뻥이야 ’ 하는 게 느껴졌다 . 그래서  아무리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를 본다 해도 부러워서 가슴 깊이 질투를 느끼는 실감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현실로 보여주는 부유함과 여유로움, 호화로운 모습을 참아내는 건 힘들었다 . 그래서 의뢰가 들어오면 그들이 알려주는 집이 어느 동넨가를 보고 우선 사는 정도를 짐작하고 간다 . 동네에 따라 아파트 평수에 따라 재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또 막상 가서 가재도구를 보면 그 집이 어느 정도 살림규모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재산이 있건 없건  석 삼년을 가르쳐도 물 한 잔 안 주는 집도 있다.  다과를 내오는 경우 그릇과 음식 종류에 따라 사는 처지를 짐작하는 게 가능했다 . 종이컵을 쓰는 집도 있었고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 컵을 쓰는 집도 있었다 . 빵집이나 동창회에서 주는 기념 물잔을 내오는 집도 있고 특별히 손님용으로 쓰는 금테 두른 찻잔을 내오는 집도 있었다 . 오비맥주에서 주는 로고 박힌 유리잔에 물을 담아서 받침도 없이 주는 집도 있고 크리스탈 잔에 물을 담아 얌전하게 컵받침을 받쳐서 쟁반에 담아 갖다주는 집도 있었다 .훼미리 오렌지주스를 주는 집도 있고‘오렌지맛오렌지’를 주는 집도 있고 자기네 먹다가 남아 유통기한 아슬아슬한 우유나 두유를 주는 집도 있고 삼 년 동안 똑같은 잔에 똑같은 봉지에서 나온 우롱차를 주는 집도 있었다 . 갈 때마다 간식을 만들어 주는 집도 있고 천원에 한 팩짜리 꿀떡만 주는 집도 있고 냉동실에 자리만 차지하는  오래 된 음식을  해동해서 주는 집도 있었다 . 그런 음식에선 오래된 이끼 냄새 같은 게 풍겼다 . 자기네는 안 먹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음식을 처리하기에 좋은 대상이 사교육 강사인가 ? 어쨌든 그런저런 대접을 받으면서 혜준은 이십 년째 사교육 강사를 했다 . 공교육이 정상화되고 사교육이 필요 없어지면 보리밥장사를 해야지 생각하면서 이십년 째 그 일을 했다 . 잘 살면서 어이없는 음료를 주는 사람들에게 복수라도 하듯 이마트에서  게산원하는 중년여성들이 시간당 사,오천 원 받을 때  오륙 만 원을 받으면서도 분했다 . 듣자하니 변호사 새끼들은 시간당 이십만 원을 받는다며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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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준은 웃으면서 말했다 .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 하지만 새아빠가 왜 싫으냐고 다그쳐 묻지는 않았다 . 굳이 묻고 싶지 않았다 . 준성이 좋은  남자인 것 같지만 그것도 영원할 것 같진 않고 사는 동안 또 싫어지고 실망하고 배반하며 헤어지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싶진 않았다 . 
 

그런데 엄마! 혹시 새아빠 될 사람이  굉장한 재산가라면 괜찮을 것 같아 .얼마나 굉장한 ? 나에게 유산을 한 백억 정도 줄 수 있는 ...백억이나 ? 좀  센데 ?응.. 그러면 멋진 오피스텔 얻어서 나가서 혼자 살고 외국으로 유학도 가고 여행도 가고 ...그러면 새아빠랑 부딪칠 일 없으니 괜찮잖아 . 그런 건 백억씩은 필요 없을 텐데 ? 아니. 백억이 필요해. 그럼 관둬 . 그냥 혼자 살게 .

혜준은 다시 웃었다 .  자신도 타인의 노동에 얹혀서 사는 게 소원이지만 한 번도 백억쯤, 이라는  가정을 해본 적이 없는데 딸은 ...자신보다 더 수리적인 사고를 가진 것 같아서  안심도 되고 낯설기도  했다 . 
 

그러면 너는 나중에 네 남친을 데려왔는데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한 백억 쯤 지참금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하면 너는 어떻겠니 ? 그건 다른 문제지 . 나는 굳이 엄마랑 함께 살지 않아도 되니까...엄마가 남친을 싫어하면 함께 살 필요 없고 ...그러나 내가 데려오는 남자는 분명 엄마 마음에  들 거야 . 그렇게 단언하는 근거가 뭔데 ? 나는 현명하니까...나는 구질구질한 거 싫고 쿨하니까...나는 사랑 같은 거에 목매지 않으니까...

혜준은 딸이 제시하는 것들과 자신이 대척점에 서있는 건 아니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리고 차마 딸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말하고 싶었다 . 너는 모른다 . 누구는 누구만 못해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니란다 . 인생은  장담하기에는 너무도 변수가 많아 . 나도 내가 이렇게 살 줄 몰랐어 . 막연하게나마 나는 잘 나갈 줄 알았어 .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지 않은 게 문제지만 ...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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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광우병에 걸려 그냥 생각도 없이 뇌에 구멍이 나서 쓰러지면 생각도 없이 죽잖아요 . 그건 안돼요 . 광우병은 랜덤으로 걸리기  때문에   먹는다고 다 걸리는 것도 아니고 침 흘리며 죽는 건 싫은데요 . 준성씨가 침 흘리며 죽는 광경은 아무리 상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데요 .그러면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러다가 쓰러지면 생각을 가지고 죽는 거죠 . 그렇겠군요 . 그러면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 함께 살다가 생각을 가지고 죽을 때  서로에게 고마웠다고 유언을 하고 상대방 손을 꼭 잡고 죽을 수 있는 기회를요 . 그러다 둘이 한 날 한 시에 죽는  건 어떤가요 ? 그게 계획대로 되진  않겠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




그건 내가 싫은데 ?

딸은 단호했다 . 입시를 앞 둔 자식에게 가볍게 물어보면서 혜준은 딸의 반응을 예측하고 있었다 . 두 사람이 사는 건 편했다 .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더라도 다른 뭔가가 부족하진 않았다 .

왜 ? 나는 새아빠같은 건 싫어 . 헌아빠도 없잖아 . 헌아빠야  없지만 친아빠도 없잖아 .

없는 건 아니겠지 . 엄마가 미혼모라서 그렇지 친아빠가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 ? 엄마가  무슨 식물도 아니고 ......허수경처럼 정자를 제공받아 낳은 거라면 ?그럴 리가 ..엄마처럼  번거로운 거 싫어하는 사람이  정자제공을 받아 미혼모가 될 리가 없지 . 아마도 ... ...

아마도 뭔데 ? 내가 영화를 많이 봐서 아는데...아마도 좋아하던 사이에 임신을 했는데 그 사실을  알려주니까  남자가 불편해하는 거야 . 그러니까 엄마처럼 까칠한 여자는  바로 헤어져서 혼자 낳아 키운 거든가 아니면......아니면 ? 괜찮은 남자가 있어서 사귀었는데 알고 보니  아내가 있었던 거야 . 그래서   헤어지고 보니까  임신이 되었던 거야 . 또 있어 . 여행을 갔다가 맘에 들어서 하룻밤 같이 잤는데 그 남자가 어디 사는  누군지 엄마도 모르는 거야 . 또  있냐 ? 응. 많지만 내가 말한 가운데  하나일 것 같아 . 딩동댕! 그 가운데 하나야 .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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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영화를 보면 보통 재떨이를 던지지 않습니까 ?그게 보통 뽀대가 나고 상대가 얻어맞으면 충격이 크도록 하려고 연출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 그 매형이란 사람, 딸이  자살했잖아요 . 예, 그랬다고 들었습니다.근데 왜 자살했대요 ? 글쎄요 . 환경이나 생태를 걱정해서 죽은 건 아닐까요 ?생태나 환경,  그런 것 같고도 자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 그러면 혜준씨는 뭐 들은 얘기 있습니까 ? 뭐, 돈이 없어서 뭘 못할 게 있다고 죽겠어요 ? 제가 아는 사람들은 전부 십억이나 이십 억만 있으면  생의 모든 부분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돈만 있으면 정말  그 모든 게 가능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 돈이 많다고  불로불사는 할 수 없겠지요 .  ‘강철의 연금술사’ 라는 일본 만화가 있는데요,  거기서 줄곧 화두를 제시하는데 그게 불로불사입니다 .거기선 돈보다도 불로불사를 원하기에 호문쿨루스라는 괴물이 등장합니다 .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 아, 지루하군요 . 영원히 죽지 않는다니...저는 언젠가는 죽는 다는 게 위안인데...어쨌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고 돈으로 많은 걸 해결할 수 있죠.  여배우들을  보면 보통 평범한 여자들보다 한 십년이나 이십 년은 젊어 보이잖아요 . 그래도 삼십년이나 사십년 씩  젊어 보이진  않잖아요 . 삼사십년 씩 젊어 보이면  기이할 것 같은데요 .

정말 그러네요 . 기이한 젊음이라 ......혜준씨도   언젠간 파파 할머니가 되겠네요 . 그래요 . 강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 ’ 에 나오는 순이 할머니처럼요 ...아, 그런 건 싫은데......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삶이란 게 원래 그런 거잖아요 . 노쇠나 질병이나 죽음을 피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살다 빨리 죽어서 뱀으로나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 왜요 ? 저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데요 .  생명으로 태어나지 않으려면 아주 높은 도를 닦아야 한대요 . 그럴 자신이 없으니 그냥  뱀으로 태어나 어두운 데로 꿈틀거리고 다니다가 생각도 없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 뱀이 생각도 없이 살다가 생각도 없이 죽는다는 건 사람 편할 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생각 없이 죽는 게 뭐가 좋은데요 ?공포나 고뇌가 없잖아요 . 그럼 좋은 방법이 있어요 . 미국산 쇠고기를 날마다 먹는 겁니다 .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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