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을 넘겨서야 쓰는 리뷰... 완독도 9월을 넘겨서야 했다!

10월의 책은 꼭 10월 안에 해치우리라고 다짐하며.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가 아니었다면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읽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다. 이 책은 2018년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현상들이 많고, 내가 함께 겪었고 겪고 있는 현상들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연구 결과를 읽고 있다는 느낌은 해외의 이론서들을 읽을 때와는 거리감이 압도적으로 다르다. 문득 도나 해러웨이에게 강좌를 듣는 대학생들은 이런 느낌이겠지 싶어서 조금 부럽지만...


2018년에 출간된 책이라서, 어떤 글은 조금 더 일찍 읽었으면 시의성이 적절했겠다고 느꼈을 듯하지만 대부분은 전혀 시간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읽는 것도 너무 좋았다. 


백지연의 '불안에도 불구하고'에서 나오는 "혜화역과 광화문 등에서 '불법 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가 다섯 차례 열리는 동안, 나는 현장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관련 사안에 가담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것은 나의 착각일까? p.66" 이 구절은 너무나 정확하게 내가 느낀 감정을 묘사하고 있어서 놀랐다. 


느꼈던 감정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그 유대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무엇을 낳는지 아는 것. 두번째 챕터가 너무 좋아서 다 읽지도 않았는데도 만족스러웠다. 


ASMR은 도서관 소음, 까페 소리 등의 ASMR만 알고 있던 내게는 차원이 다른 얘기였는데 반해 맘스타그램, 먹스타그램을 다루는 글은 가까이 닿아 있는 현상에 대해서이다보니 흥미가 갔다. 


맘스타그램 해시태그를 통해서 일상을 기록하는 것들은 플랫폼 회사에게는 사업을 위한 고객 데이터가 축적되는 과정이겠지만, 그 기록은 이 시대를 사는 수많은 개개인들의 것이기도 하다. 양육현실을 드러내주고, 서로의 육아에 대해 공감하고, 가족 공동체 혹은 지역 공동체가 사라지면서 육아에 대한 정보교환의 장이 되기도 하는 반면 상업의 도구로서도 기능하고, 외모관리, 소비, 모성노릇 등의 압박으로서도 기능하는 양상이 마지막 꼭지의 제목에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소비문화 전시와 자기서사 쓰기 사이의 줄타기." -p. 195


제목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지 뭐야. 너무 절묘한 표현이라서. 


그리고 여성 게임 개발자에 대한 글을 가장 늦게 미뤄두었다가 읽었다. 너무 내게 가까운 연구라서 읽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실무자 인터뷰가 너무 적어서 아쉬운 면이 있고. 

트오세 사건과 게이머 게이트 사건을 다룬 문단을 읽다보면 당시의 분노가 선명하게 떠오르고, 티셔츠 게이트도 떠오르고. 

그 이후에 게임업계 최초 노조가 탄생하면서 이어서 2호, 3호 노조들이 나타났다. 노조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52시간제가 도입되었다. 아직도 포괄임금제를 고수하는 회사들이 있지만, 최소한 포괄임금제가 페지되어야한다는 인식만큼은 생겨났고, 근무시간과 노동자성에 대한 개념도 조금은 생긴 것 같다. 2018년 당시보다는 많은 게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성 개발자의 노동 환경이 나아졌는가? 이건 잘 모르겠다. 겉으로 보기에는 육아휴가, 출산휴가, 육아로 인한 근무시간 조정 등이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생겨났지만, 실질적으로 회사를 리드하는 직위의 면면들을 살피면 여성은 거의 없다. 승진의 기회가 있는가? 장기근속에 무리가 없는가? 이런 부분들을 살펴보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암묵적으로 승진이 더 어려운 면이 있는데... 실무자 인터뷰가 적으면 실질적으로 그런 부분을 다루기가 더 어렵지 않았을까 싶고. 

글의 후반부에는 여성 개발자로서의 어려움보다는 게임 개발자로서의 어려움에 더 집중되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프로젝트가 중단되거나 접힐 경우의 고용불안정성, 오픈 전과 오픈 후의 야근 강요, 인센티브의 불투명함 등은 비단 여성 개발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2-10-03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등롱 님, 완독 축하드리고요,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등롱 님이 읽기를 잘했다고 해주셔서 정말 마음이 너무 좋아요. 항상 같이 읽어 주시고 그리고 읽고 쓰는 걸 공유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껴주셔서 정말이지 너무 좋아요. 등롱 님, 앞으로도 우리 열심히 읽고 생각하고 씁시다.

안녕히 주무세요!

등롱 2022-10-04 13:1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덕분에 읽고, 생각하고, 쓰는 즐거움을 되찾아서 정말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매달 말씀드리는 것 같지만 항상 진심입니다? ㅎㅎㅎㅎ

다락방님의 적절한 책 선정 센스에 이번에도 감탄했답니다.
리뷰를 쓰려면 읽으면서 생각했던 걸 다시 떠올리고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기억하던 구절이 정확한지 다시 살펴보고, 쓰려던 내용이 아귀가 맞는지 체크하는 이 과정이 어렵지만 이거야말로 정말 책을 소화하는 과정이라고 느껴요.

남은 10월 ,11월 ,12월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와 너무 뿌듯한... 뿌듯한 시간일 것만 같아요!

공쟝쟝 2022-10-04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여성이여서 힘들겠나요. 여남 상관 없이 이 말도 안되는 엉망인 착취 구조가 모두를 힘들게 하는 거고, 다만 여자들은 암묵적으로 그 힘듦을 더 받아내야 하고 정서적 노동까지 더 하라고 보이지 않는 억압을 겪으니까 정병이 오는거고 ... 안미칠려고 싸우기 시작하면서, 자기한테 맞는 표현, 언어, 말들 이런 게 막 쏟아지는 데.. 아 나에게 지금까지 이런 말이 없었구나.. 하면서 페미니즘 공부하고... 공부하다보니까 정말 온사회가 나한테 가스라이팅을 했구나 하면서... 괴롭기도하고...
이번 달에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 맨 첫문단의 다짐 쫌 감동인데요?
등롱님의 자기 서사쓰기와 페미니즘 함께 읽기를 응원합니다~!

등롱 2022-10-04 13:21   좋아요 1 | URL
공쟝쟝님 너무 좋은 말씀만 해주셔서... 행복합니다 히힣

게임업계에 몸담고 있다보니 더 할말이 차고 넘치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도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것을 적절히 표현해낼 말들이 여태까지는 없었고, 말을 찾아냈을 때, 차별을 인식하게 될 때, 이게 다 배우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들이고... 배웠으니, 이제 어떻게 이 차별들을 헤치고 나아가고 고쳐야 하나... 암담한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지금 함께 겪었던 일들이 연구되고 통계되고 분석되는 게 아주 벅차오르는 느낌이 있었어요 ㅎㅎ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까요!! 으샤으샤!
 

8월에 야근을 하느라 책은 점심시간에 짬짬이 읽어서 완독했지만 페이퍼를 쓸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또 곧 나가봐야하는데 알라딘은 모바일로 상품 링크 연결이 안되는군… 
귀가해서 상품 링크 수정!


 

임신중지권을 둘러싼 입장을 다루면서 반대론자들은 물론이고 지지하는 입장조차도 어떠한 맥락이며, 법적으로 임신중지를 허용하기 위해 가져온 주장의 근거와 감정적인 호소들이 여성의 주체성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임신중지에 대해 주로 1970년대부터 이어진 반 세기 정도의 역사 안에서의 쟁점이 이 책의 목표다. 
페미니즘의 역사와 여성 인권에 대해 폭넓게 다루는 책도 좋지만, 시야를 좁혀서 특정 사안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추상화, 개념화도 중요한 일이지만 이렇게 특정 사안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건 페미니즘이 내 근처의, 내 삶과 가깝거나 혹은 내 삶에 이미 들어온 일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다. 

문단의 구조가 종종 견고하지 못하고 문장이 튀어서 잘 쓰여진 글이라고 말하기는 힘든데, 워낙 힘이 있는 이슈를 다루다보니 집중력을 붙드는 힘이 있었다. 
사회는 법적으로 임신중지에 대한 제동을 걸 뿐 아니라 감정과 통념을 통해서도 수많은 제동을 건다. 죄책감, 애통함, 수치심, 여성답지 못함… 사회가 이런 감정들을 만들어 주입했다는 서문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가족계획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고 이야기하던 시대, 여아를 태아감별하여 낙태하던 시대에는 임신중지가 손쉽게 권유되던 선택이었는데 불과 몇십년만에 마치 옛 과거는 없었던 양 비난받을 일이 되었으니까. 심지어 낙태죄 폐지가 된 게 언젠데 아직도 후속 입법이 되지 않았고. 

책의 원제는 행복한 임신중지였다고 한다. 
252 페이지의 클레멘타인 포드의 말이 좋았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고, 미안해할 일은 없다! 

사회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수치심을 느끼며 괴로워해야 마땅하다고 감정과 태도를 끊임없이 주입하더라도, 
특히나 우리 사회는 여자들에게 시스템 외의 감정적 회초리를 끊임없이 내려치는데…
거기에 대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하는 저 태도. 
너무 좋아서 누군지 찾아봤다. 호주의 작가, 연설가고 제목만 봐도 흥미로운 책을 썼지만 국내에 번역된 책은 없다.

그러고보니 호주 사회 배경의 흥미로운 페미니즘 책이 있었는데… 
호주의 마초적인 분위기가 양육을 원하는 아빠조차도 막아선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귀가해서 어떤 책인지 찾아냈다. 제목이 가물가물해서 한참 뒤졌다. 

애너벨 크랩의 아내가뭄. 

가정 안에서의 아내가 차지하는 노동력과 역할에 대해 기자 출신의 저자가 분석한 책이다. 


기자출신이라 그런지 정말 대중성 있게 잘 썼던 걸로 기억한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지만 기실 그러한 노동이 없으면 사회에서 성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대중적으로, 쉽게, 그리고 명료하게 전달했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 이러한 노동들을 여성에게만 강요하는 호주 사회의 암묵지에 대해서도 논하면서 그 때문에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남성이 하려했을 때 부딪치는 사회적 반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다시 보고 싶은데 새로 볼 책도 넘쳐나네... 세상에 읽을 책이 너무 많다! 



나는 임신중지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했다.
내가 알기로, 나는 세상에 용서를 구하면서 평생 땅을 기어다녀야 할 사람이다.
두 번의 임신중지야말로 내가 내린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외치면서 고개를 숙여야 하고,
그 결정을 날마다 생각해야 하고,
스스로 비정한 영아살해자라는 사실에 극심한 고통을 느껴
지독한 우울에 빠져야 한다.
집어치우라.
나는 두 번의 결정 중 무엇에도 수치를 느끼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고, 미안해할 일은 없다. - P252


댓글(5)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2-09-04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언급하신 호주 사회 배경의 흥미로운 페미니즘 책은 어떤걸까요? 너무 궁금합니다. 찾게 되시면 알려주세요, 등롱 님!

저도 에리카 밀러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래서 문장이 튕김에도 불구하고 다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렇게 말해주어서 고맙다는 생각을 책 읽으면서 많이 했어요. 더불어 여성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등롱 님!

등롱 2022-09-04 22:03   좋아요 2 | URL
집에 돌아와 이리저리 뒤져봤는데 아내가뭄이었습니다! ㅎㅎㅎ
아내의 노동력에 대해 기자 출신 저자가 분석한 얘기여서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이게 벌써 2016년 출간되었던 책이네요!

이번에도 임신중지 너무 좋았어요. 이렇게 한 가지 사안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책도 정말 좋아합니다.

매달 막바지에 다 읽고, 페이퍼 쓰고 해서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있지만 다락방 님의 격려를 떠올리면 기운이 불끈 난답니다! 헤헤, 항상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2-09-10 14: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읽을 책이 너무도 많다!ㅋㅋㅋ 우리들의 독후감은 왜 항상 이렇게 끝나나용! 🥹

등롱 2022-09-10 21:51   좋아요 2 | URL
그러게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 쫓기는 기분 숙제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렇게 읽을 책 고르고 쌓아놓고 또 고르는 게 너무 좋아요… 심심하면 서점들 사이트 열어놓고 이리저리 헤매는 게 저 뿐만은 아닐 거여요, 그쵸? ㅋㅋㅋ

공쟝쟝 2022-09-10 23:00   좋아요 1 | URL
어... 그거 시작예요.. 한 번 시작되면 이제 못빠져 나가요! 황홀한 독서감옥... ㅋㅋㅋ 이렇게 된 김에 저와 함께 하시죠 ㅋㅋㅋㅋ 뒤메질(책 안읽고 구매만 하여 쌓아두는 현상) 연대! ㅋㅋㅋ
 

다락방의 미친 여자 도착!

편집 너무 촘촘하지 않아서 만족스럽다.
겨울되기 전에 비평되는 책들 일부라도 다 읽으면 좋겠다. 빌레뜨, 설득, 맨스필드 파크는 최소한 읽고 싶다. 미들마치 새 번역이 안 나온 게 너무 아쉽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22-09-03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등롱 님도 영접하셨네요
고양이 아웅 귀여워요 ^^

등롱 2022-09-03 23:32   좋아요 1 | URL
너무 기분이 좋아요 ㅋㅋㅋㅋㅋ 새 책은 모두 검사한 후 앉아보시는 고영이랍니다 ㅎㅎ

단발머리 2022-09-03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빌레뜨 읽어보겠다는 마음 응원합니다! (브론테 평생팬) ㅋㅋㅋㅋㅋㅋ
고양이 예뻐요! 야옹~~~~

등롱 2022-09-03 23:33   좋아요 0 | URL
제인에어 말고는 읽은 게 없지 뭐여요? 세상에… 최대한 읽어보고 11월 들어가려구 합니다 빠샤!
제 사랑스러운 참견쟁이입니다 ㅋㅋ

scott 2022-09-03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냐옹이 미모가😻

등롱 2022-09-03 23:33   좋아요 1 | URL
생각해보니 서재에는 들렌이 사진을 처음 올린 것 같네요! ㅎㅎㅎㅎ

다락방 2022-09-04 2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책도 고양이도 압도적으로 아름다워요! >.<

등롱 2022-09-04 22:24   좋아요 0 | URL
책 표지도, 책 안의 편집도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두께 때문에 꼭 세워서 찍고 싶었는데 저희 고영이 다행히 포즈를 취해주더라구요 ㅋㅋㅋㅋ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전체에 울려퍼지는 여자, 여자, 여자.
총을 쏘고 트랙터를 몰고 노역을 하고, 부상자를 끌고 와 치료하는 그 무수한 일들을 하면서도 너는 여자잖아 우리는 여자잖아 여자니까… 소녀병사들이 어떻게… 어떻게 여자가 아이를 버리고…
무수하게, 어떤 일에도 여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이 수많은 증언들을 읽고 있다는 게 놀랍다. 그러나 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게 바라는 목소리가 아닐지라도, 그저 목소리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남자의 목소리가 충분히, 아주 많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달 중반까지 거의 손을 대지 못하다가 막판에 50페이지씩 몰아서 읽으며 새삼 느꼈다. 어려운 책은 찔끔찔끔 읽는 것보다는 역시 어느 정도의 분량을 몰아 읽어야 그나마 이해력이 조금 높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고. 


 먼저 일독하신 분들의 리뷰대로 11장은 가슴에 용기를 가득 불어넣어주고, 여성주의 책들을 읽어가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챕터였다. 하필 이 챕터를 읽고 있는 동안 미국 대법원의 임신중지 위헌 판결이 나오는 바람에 우리가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이 좀 흔들렸지만, 괜찮다, 항상 그래왔다. 


책을 읽으면서 서문이 좀 어렵다고 느꼈는데, 11장을 읽은 후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 11장으로 돌아왔더니 거다 러너의 포부와 큰그림이 읽힌다. 


"혁명적 사고는 항상 억압받는 사람들의 경험을 격상시킴으로써 가능하였다. 봉건영주에게 감히 도전하려면 농노는 먼저 그의 생활경험의 의미를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만 했다. ...(중략)... 새롭게 의식화된 개인 혹은 집단으로 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해방적이다.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다." p.395

"우리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떠나야 한다." p.396

"우리 자신의 것, 여성의 경험을 신뢰함으로써 누군가의 진술을 검증하기. 그런 겨험은 대체로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거나 무시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지식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자신 속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저항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p.396 


우리 자신의 것, 여성의 경험을 신뢰함으로써 진술을 검증하기. 

이게 책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서문에서 제시된 질문 "사회에서의 종속적 위치에 대한 여성의 각성이 오랫동안 지연된 것에 관한 것이다. 무엇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그들을 종속시킨 가부장적 체계를 유지하고, 그들을 종속시킨 체계를 후세에 전하고, 그 체계를 양성의 자손들에게 세대를 이어 전하는 데 가담한 여성의 역사적 공모를 설명할 수 있을까?" (p.19)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여성의 경험을 신뢰하며 그 진술로부터 차곡차곡 끌어내어 논리와 역사를 쌓아올린 것. 서장과 마지막장이 딱 맞물리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좀더 많이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후속작인 이 책은 이미 절판이 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중고로 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얻은 또 하나의 성과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목소리들을 읽을 수 있었던 것. 이 목소리들을 통해서 거다 러너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착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노예화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구조와 기원을 읽어내지만 한편으로, 사회와 시스템에 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좀더 나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시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읽고, 서툴게나마 읽은 기록을 남기고, 어떻게 살려고 노력하는지 흔적을 남겨야지. 노력하는 삶을 살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2-07-04 07: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등롱 님의 결론에 동의합니다.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거요.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계속 하다보면 그 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렵니다.

읽느라 고생하셨어요, 등롱 님. 우리 다음달에도 그 다음달에도 그리고 그 뒤로도 쭉 계속 열심히 살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등롱 2022-07-05 11:20   좋아요 1 | URL
책을 읽을 때마다 이전에 힘들게 꾸역꾸역 읽어나간 보람을 느낍니다 ㅎㅎㅎ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도 있고 반복해서 언급되는 사람들이 있으니 예전보다는 대충 누군지 알게 되기도 하고~ 여성주의 함께 읽기가 제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게 느껴져요.
다락방님의 책 선구안과 리딩을 따라 앞으로도 열심히 읽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ㅎㅎ

공쟝쟝 2022-07-07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등롱님의 최선을 다해 살고 그것를 남겨야 한다! 라는 말이 참 좋고 진실하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러하기 때문이지요 ^^? ㅋㅋㅋ 목적이 방법이고 방법이 목적인 훌륭한 사상입니다. 여성주의는! 나를 잘 살게 하고 싶어지고 그게 의미있게 여겨지게 하면서 자존감을 줘요! 그리고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어 주기도 하나봐요!! 요로케 ㅋㅋㅋ 등롱님의 읽고 쓰기에 저도 함께 하고 있답니다! (속닥속닥)

등롱 2022-07-08 12:59   좋아요 1 | URL
와앙 정말 힘이 납니다!!! 여럿이 읽는 게 이렇게 좋을 줄 몰랐어요~~ 사실 여성주의 책들 읽을 때는 절망감과 가슴벅찬 희망감이 오락가락 하잖아요, 함께 읽어서 이런 롤러코스터를 잘 버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ㅎㅎ
말씀대로 여성주의 책 읽으면서 좀더 내면도 단단해진 것 같고요!
공장쟝님과 함께해서 너무 기쁩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