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으로 특권을 누리는 백인 중산층 여성들은 특권이 자유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은 생존자가 거의 없는 낯선 나라였다. 여성의 몸은 빈민가나 제3세계만큼이나 식민화 되어 있다. 그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여성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강하고 행복한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448


미친 여자들은 정말로 미친 걸까?

정신병을 앓는 여자들은 정말로 정신병에 걸린 걸까?


서양의학이 어떤 질병을 이해할 수도, 치료할 수도 없을 때 종종 그 질병을 단순히 정신질환이라고 진단하면서 그런 병의 존재를 부인해왔다는 사실이다.  - p.37


필리스 체슬러 자신도 스스로의 대표 저작이라고 꼽는 여성과 광기를 읽으면서 따라가면 왜 구성이 이렇게 되어 있는지 깨닫게 된다. 

1부 제목은 광기, 2부 제목은 여성인데 1부에서는 대표적인 사례를 든 후 신화와 대표적으로 미쳤다고 평가된 여성 영웅에 대해 언급하고, 이후 정신병원과 질환, 치료사들에 대해서 범용적으로 다룬다. 2부에선 정신병원에 입원당했거나 치료받았던 여성들을 분류하고, 그들에 대해 다루며, 개인들과 진행했던 인터뷰 역시 담겨 있다. 


어떻게 사회와 치료사들이 손쉽게 미쳤다고 진단해버리거나 몰아붙여버렸는지, 혹은 실제로 미쳤다면 왜 미치게 되었는지를 꼼꼼하게 다루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내게 어둡던 길이 밝혀진 느낌이었다. 


전통적으로 우울증은 '이상적인' 자아의 상실, 애증의 대상의 상실이나 자기 인생의 '의미'의 상실에 대한 반응(상실에 대한 표현)으로 인식되었다.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서, 외부로 향했어야 하거나 외부로 향할 수 있었던 적개심이 자신의 내부로 방향을 돌리게 되어 우울증이 생긴다는 것이다. '공격성'보다는 우울증이 실망이나 상실에 대한 여성적 반응이다. 그런데 연구조사와 임상적 증거를 놓고 봤을 때 이러한 견해는 전체든 일부든 간에 논쟁의 소지가 다분하다. 우선 대부분의 여성이 어머니를 '상실했다' - 또는 한번도 진정으로 '가진' 적이 없었다 - 는 점에 주목하자. 여성에게 어머니의 상실은 남편이나 연인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단단한 '이상적' 자아를 발전시키는 여성은 거의 없다. 삶의 '의미'에 관심을 쏟는 일에 격려는 말할 것도 없고 허용조차 받지 못하는 여성이 대다수다.(물론 많은 남성들도 그렇겠지만 확실히 여성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그렇다) 여성은 삶의 의미를 지탱하고 있는 실존적인 기반을 상실한다기보다 '여성'이라는 직업을 잃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은 그들이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을 '상실할' 수 없다. 


여성은 그들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언제나 애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 대다수 여성들은 이러한 애도를 성적,육체적,지적인 활동을 통해 철학화하거나 무시해버리거나 화를 내 풀어버리지 못한다. p.163


그는 '가족병리학'이 혼란스러운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개인 행동의 이해 불가함을 집단의 이해 불가함으로까지 확장한다. 이제 이것은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다수의 개인들에게 적용된 생물학적인 유추이다. [...] 이것은 '범임상주의'의 한 형태인데 [...] 그런 임상주의에서 모든 사회는 심리적으로 '치료'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범임상주의의 위험은 가공할 낙관성에 있다. 토머스 사즈는 이것을 "정신분석학적인 제국주의"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실제로 사회가 '치료를 필요로 할 수는 있겠지만, 통찰이 있건 없건 간에 개인의 자유라는 환상에 기초한다.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적 방법은 그와 같은 '치료'를 할 수 없다. 특히 주요한 사회제도가 전혀 '치유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면 더더욱 치료될 수 없다. 


위 구절은 이북으로 읽어서 페이지 수가 없다. (이북은 종이책과 비교했을 때 몇 페이지인지도 같이 병기를 해주면 좋겠다...) 


나는 이 부분이 정말 좋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여성) 개인의 행동은 그 개인만의 행동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서 동시에 발견되는 것이며 결국 사회는 심리적으로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임상주의를 가리켜서 '그 가공할 낙관성' 이라고 잘라 말하는 부분이 너무나 멋진 것이다. 

사회제도가 치유되지 않고 남아있는데 어떻게 치료하녜... 

저 절묘한 비꼼... 


하지만 이 책은 그 뿐만이 아니라 이전에 읽은 두 권의 책... 정확히는 대략 80%만 읽은 페미니즘의 투쟁과 어찌저찌 완독해낸 하나이지 않은 성에서 이해가 안되던 부분들을 명쾌하게 관통하는 지점이 있어서 더욱 좋았다. 


나는 이전 두 권에서 몸에 대한 투쟁과 이론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게 당황스러웠고, 어딘가에서 몸을 다루는 게 필수적인 것 같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쭉 따라가다보니까 이런 구절이 있는 것이다. 


소규모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여성들의 성적 오르가슴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는데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됐다. [...] 여성이 자기 몸을 인정하고 즐기는 것은 자기발전에 필수적이다. 미국의 기계적인 '성매매'나 남성 중심적인 그룹섹스나 프리섹스와 같은 환상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여성들이 완전한 섹슈얼리티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어머니들이 생산수단과 재생산수단을 통제해왔을 때라는 것이다.  [...]  여성의 성적인 오르가슴도 빈민가의 아침 식단도 그 자체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인 첫걸음임은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절을 보고서야 몸에 대한 탐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의 일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육체를 죄악시하고, 육체에서 나오는 욕망을 죄악시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어떻게 긍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음, 사실 신화 파트도... 뒤에서 계속해서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를 소환하여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았다면 신화 파트가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 2의 성을 읽을 때도 그랬다. 긴긴 신화들을 읽어가면서 뭔가 알 듯 말 듯한 걸 보니 나는 정말로 이해한 게 아니었고... 그러나 일단 읽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일단 읽어가다가 막바지에 이르러서. 


사업하는 여성으로서 나는 남자 동료나 고객과 스포츠클럽이나 동업자 모임이나 사창가나 남자들만 모이는 파티에서 '비즈니스'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와 유사하게 관여할 수 있는 여자 동료도 거의 없다. 여성으로서 우리는 그와 같은 제도를 즐길 만큼 사회화되어 있지 않다. - p. 495


여성들은 집단적으로 공적인 문제를 해결해본 경험이 거의 없으며, 가치 있는 역할 모델도 거의 없다. '권력'과 '공적 행동'은 사실상 남성의 것이기에, 여성에게는 낯설다. - p.505


이 부분을 발견한 것이다. 

신화를 찾는 것은 가치 있는 역할 모델을 찾아내는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고, 동료를 찾고 경험을 찾기 위한 사회화의 일환이라는 걸 비로소 이렇게 구체적인 언급을 듣고서야 이해한 것. 


책의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깊이 몰입했다가 마지막 열 세 가지 질문을 읽었다. 출간된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단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 여전히 살아 숨쉬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질문들이다. 



루비 이든은 열일곱살 때 임신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이모는 그녀를 "헤픈 년"이라고 부르면서 그녀가 몰고 온 ‘소동‘과 ‘치욕‘을 비난하고 임신중절을 권유함으로써 괴로운 시련을 안겨주었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모성은 이런 방식으로 실체화되었다. 여기서 진지하게 묻고 있다. 육체가 그처럼 야만적으로 부정당할 때 여성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 P233

일각에서는 남성 동성애를 서구 문화의 파수꾼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생각이 옳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나의 느낌은 그들의 생각과 다르다. 무엇보다도 이는 우리 문화가 반여성적이고 독선적이며 호전적임을 의미한다. - P362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흑인이자 여성은 폭력과 자기파괴와 편집증 사이를 끝없이 비틀거리며 걷는 위치에 있다. 나는 흑인 여성들에게 나타나는 이런 증세를 연구했다. 흑인 여성은 흑인 남성이 흑인 여성을 좋아하지 않고 백인 여성을 선호하며 돈이라고는 벌어오지 않고 아내나 흠씬 두들겨팬다는 점을 전 생애에 걸쳐 분명히 깨달았다. 흑인 남성은 딴 여자들과 놀아나지만 흑인 여성은 백인 남성으로부터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라는 점 또한 분명히 알고 있었다. 흑인여성들의 눈에 백인 여성들은 굴러먹은 여자들이고 유치하며 부유하며 인종차별 적이다. [...] 흑인 여성은 강하지만 그들 역시 굴러먹었고 가난하고 인종차별적이고 백인 남성이나 ‘좋은‘ 흑인 남성을 얻는 데 목을 맨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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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2-31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저는 저 비꼼을 그냥 넘겨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은데 등롱 님은 바로 딱 지적해주시니 같이 읽는 맛은 바로 이런데 있는가 봅니다. 저 혼자 읽기에도 좋은 책이지만 이렇게 다른 분들의 후기 읽다 보면 제가 파악한 것보다 더 많은게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돼서 책의 가치가 더 뛰는 것 같아요. 읽느라 고생하셨고 후기 쓰느라 애쓰셨어요. 책도 등롱 님의 후기도 읽을 수 있어 즐겁습니다.

등롱 2021-12-31 22:19   좋아요 0 | URL
다른 분들의 인용을 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다시 읽는 묘미가 있습니다! 저도 다른분들 후기 찾아 읽으며 이리가레보다 후기가 많아서 즐거워요 ㅎㅎㅎ 여성과 광기 정말 너무 좋은 책이었어요…!! 잠시 쉬고, 이제 또 다음 책을 기대하면서 출발하겠습니다, 다음 책 남성됨과 정치도 너무 설레어요~~

공쟝쟝 2022-01-04 1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었습니다! 굳이 다 찾아내서 읽는 중입니다 ^^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은 여성주의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슈입니다. 먼저는 육체와 이성의 이분법이 여남의 이분법 그대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겠지만, 저 스스로는 제 몸에 대한 통제권을 높여가는게 (그것이 운동이나 안전의 문제, 혹은 섹슈얼리티까지) 여성이자 인간으로서의 저를 좀 더 강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종종 또 같고 다른 책으로 만나면 좋겠습니다 ^^

등롱 2022-01-04 11:49   좋아요 1 | URL
앗 공쟝쟝님 리뷰 저도 잘 읽었습니다~. 수줍어서 댓글을 안 달았는데, 댓글 감사합니다 ㅎㅎ

몸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가 와닿지 않았던 것 같아요. 몇권째 읽으니까 비로소 몸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서 조금씩 깨달아가는 느낌이에요. 보봐르가 말했던 여성의 몸은 여성에게도 타자화된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함께 읽기 너무 즐겁습니다, 또 책 후기 나눠보아요 ㅎㅎㅎ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책에서는 마커를 바꿔봤다. 

필름 마커가 마음에 걸려서 종이 마커가 괜찮은 게 없을까 하다가 팬톤 마커를 찾았다. 

색이 통일된 건 마음에 꽤 든다. 





이 책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어떤 의도로 기획되고 출간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두 꼭지 읽고 너무 어려워서 챕터 앞에 이 글이 어떤 맥락에서 언제 출간되었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설이 있으면 좋겠어서 아쉬웠다. 


일단 첫 챕터를 펼쳐봤다가, 닫고, 작가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봤다 ㅋㅋㅋ


뤼스 이리가라이는 벨기에 태생의 철학자, 여성학자, 언어학자, 정신분석학자이다. 

[읽기 어려운 책에 대한 어려운 리뷰] 『하나이지 않은 성』 | YES24 채널예스 이 기사를 보고 '하나이지 않은 성'이 어떤 책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여러 매체들에 기고된 글들을 묶은 책으로, 프로이트-라캉주의를 중요하게 비판하는 글들 위주로 엮인 책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엮어낸 건 아닌 듯하다. 


'여성은 시선보다는 접촉을 더 즐기고, 그녀를 매우 시각적인 체계 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여전히 그녀를 수동성으로 지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그녀는 바라보기에 좋은 대상이 된다. 만일 그녀의 육체가 '주체'의 충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노출과 정숙한 위축이라는 이중의 움직임으로 인해 그토록 성적으로 자극적이고 유혹적이라면, 여성의 성기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다는 두려움을 나타낸다. 재현과 욕망이란 이 체계의 오류를 나타낸다. (...) 여성의 성기는 그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가려지고 그 '틈새' 안에 다시 여며진 것이다' p.34~35



'하나가 아닌 그녀의 성기는 성기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p.35

'그녀가 그러한 상태로 만들어지게 되는 순간들의 간격에 대한 비밀은 여성에게 있다.' p.35



'타자가 이미 그녀 안에 있고,이 타자가 자기 색정이란 측면에서 그녀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이 타자를 가로챈다는, 그녀가 이 타자를 자기 수중에 넣는다는 뜻은 아니다. 독특함, 소유라는 것은 아마도 여성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리라.' p.41


'여성이 여성으로서 쾌락을 누리게 되는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다양한 체계들을 분석하는 긴 에움길이 반드시 필요하다.' p.41


책이 몹시 어렵다. 

아마 내가 철학을 공부하지 않아서 개념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이 독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내가 오독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몹시 두려워하면서 더듬더듬,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애쓰면서 읽는다. 

여성의 몸을 그리고 표현하는 시각들이 남성만의 것이라 여성이 여성의 몸을 온전히 누리고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억압들을 분석하고 파헤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해석하면서, 여성의 몸에서부터 타고난 차이, 의미, 억압과 차별을 찾아내는 여정이 낯설다.

자신의 몸을 탐구하는 게 여성에게 얼마나 낯선 일인지? 

자신의 몸이 스스로에게 갖는 의미를 생각하는 일에서 당혹감을 느꼈는데, 이 당혹감이 아직도 내 안에 내 몸에 대해 꺼려하는 부분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 이것 또한 낯설고 불편하다. 하지만 더 불편하고, 더 거슬려야 하지. 아직도 내가 나 스스로에게 불편하고 거슬리는 사고가 남아있다는 건 더 공부할 게 많다는 뜻이지. 


독서 자체가 낯설고 쓰여진 언어들이 익숙한 용법이 아니지만 한 가지만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여성의 몸이 남성에게 갖는 의미로서 의미지어지는 게 아니라 여성 스스로에게서의 의미를 탐구하는 글꼭지들이 많다는 것. 그러니 기본적으로 남성에게서의 의미는 남근과 부친에게서 시작하며, 여성은 남근을 선망하거나 남성적 욕망을 선망한다부터 시작하는 세계관에선 얼마나 큰 논란이 되었을까. 


여전히 여성적 쾌락이 있다면, 그것은 남자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p.127


액체와 고체 비유는 내게 너무 어렵고 ...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 


 이 책을 읽으면 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성적 차이와 페미니즘'은 하나이지 않은 성처럼 여기저기 실은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라, 이리가레가 출간했던 대표논문을 묶은 책이기 때문에 오히려 논지가 일관적이고 맥락이 분명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불행히도 이 책은 절판이고 중고도 구하기 어려운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20년전 책이니까!


어디서 다시 내줄 출판사 없을까,

다락방의 미친 여자도 다시 내준다는데... 


11월 틈틈이 페이퍼를 썼는데 11월 말에 읽는 것만으로도 허덕여서 이제서야 간신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12월의 도서는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성과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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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2-05 1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어요 진짜로 ㅠㅠ
저도 12월의 도서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12월엔 우리가 신나서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등롱 2021-12-05 16:0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선정하지 않으셨으면 제가 언제 이런 책을 읽었겠어요? 덕분에 좋은 독서였습니다!! 연말에는 즐거운 독서 시즌을 보내려구 해요 ㅎㅎㅎ 여성과 광기 아주 재미있을 거 같아요, 잔뜩 기대 중이에요 ㅎㅎㅎ
 

 천천히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사 일이 너무 바빠지는 바람에 한동안 읽지 못했다. 마지막 주에 허겁지겁 질주하듯이 읽어서 간신히 완독!


다양한 저술들을 인용하면서 여자가 어떻게 여자로서 만들어지는지를 사회문화적으로, 여자의 성장과정을 전부 다루는 저서라, 보봐르는 정말이지 천재인 것 같다. 여자가 '인간의 비참함을 자기 자신의 죄악처럼 느끼지도, 속죄를 구하지도 않아서'(p.965) 미지의 것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완전한 창조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이 고찰은 너무나 유명해서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도 알고 있었지만, 저서 안에서 맥락을 거치며 읽으니 너무 대단하다. 


신화를 다룬 파트가 읽기 힘들어서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으나 제 2권으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었다. 


제2의 성 2권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애써 기억 속에 밀쳐두었던 옛 일들을 무수하게 떠올렸다. 

고등학교 시절에, 근처 공사장의 인부들이 학교 교문 앞에 줄지어 앉아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던 우리들을 가리켜서 평가질하던 일들이 있었다. 일하느라 흙먼지와 오물이 잔뜩 묻고 때가 잔뜩 낀 손톱으로 담배를 피우며 가래를 수시로 뱉으면서, 여자아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쟤는 다리가 굵고 쟤는 가슴이 크고 쟤는 그래서 몇 점이고 쟤는 걸음걸이가 단정치 못하고...


여자아이의 사춘기가 유별난 것은 흔한 속설로 숱하게 이야기되고, 원래 여자아이란 그런 것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보봐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유년시절 아버지의 보호 아래에 자기가 자신의 주체로서 온전히 뛰어다니던 아이가 자라나면서,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 마음에 들도록 해야하고 자기를 객체로 만들어야한다고.(p.403)' 가르침을 받는데 사춘기가 어떻게 유별나지 않을 수 있을까? 


한쪽에서는 어린아이 취급을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마치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는 양 신체와 말투와 행동거지 모두를 조각조각내어 평가질을 해대는데 아무리 다른 쪽에서 인격적으로 대우한다 할지라도 언제 어떻게 자칭 미식가의 앞에 올려진 음식인 양 처우가 바뀔지 모르는 신세에 불과하다는 걸 절절하게 깨닫는 시기 아닌가.


'자기자신을 일자로 설정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이 타자로서 보인다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 수업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자기를 여자로서 파악하는 여자아이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p.425) 


보봐르가 보기에는 여자가 쉽게 우는 것조차도 교육 탓이다. 

'여자는 생리적으로 교감 신경계를 통제하는 힘이 남자보다 약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육이 그녀에게 되는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쳤다. ... 풍습이 남자들에게 우는 것을 금지한 이래로 남자들은 울지 않게 되었다. 여자는 항상 세상에 대해 실패의 태도를 취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는 한 번도 세상을 진정으로 떠맡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여자가 세상의 적의와 자기 운명의 부당함을 새롭게 자각하는 데는 장애물 하나로 충분하다. 그 때 그녀는 가장 믿을만한 피난처인 자기 자신에게로 서둘러 도망간다.' (p.831)


각 부들의 제목은 내용을 읽는 내내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준다. 

4부 '해방을 향해'의 첫번째 장이 '독립한 여자'인 건 얼마나 또렷한 방향성인지. 

'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오직 나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 그녀는 록펠러 같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립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투표권과 직업을 아울러 갖는다고 해서 완전한 해방이라고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 노동은 자유가 아니다. ... 사회구조는 여성 조건의 진보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남자들에게 항상 속해있던 이 세계는 아직도 그들이 각인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p.928) 


 이 대목에서 달라 코스따의 '페미니즘의 투쟁'을 떠올린 것은 직전 달의 페미니즘 같이 읽기 대상 도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달라 코스따는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다가 필요성을 느껴서 여성 노동자들만의 단체를 따로 조직했었다는 대목을 인상깊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페미니즘의 투쟁은 내가 끝까지 완독을 못했는데 아직도 못한 상태네, 다시 읽고 리뷰를 써야지. 


'남자가 누리는 그리고 유년기부터 느껴 온 특권은 인간이라는 소명과 남자라는 운명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p.930)

'세계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세계의 죄를 자기의 죄로 여기며 세계의 진보를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해서는 특권자 계급에 속해야만 한다. 세계를 변화시키고 생각하고 드러냄으로써 세계를 정당화하는 것은 거기에서 명령권을 장악하고 있는 특권자들에게만 속한다. ... 지금까지 인간이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여자 속에서가 아니라 남자 속에서다.' (p.965) 


그래서 결국 보봐르가 해방을 외치며 목표로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성의 차이를 넘어서 자기의 자유로운 실존의 험난한 영광 속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여자는 자기의 역사, 문제, 의구심, 희망을 인류의 그것과 융합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여자는 자기의 삶과 작품에서 인격 뿐만 아니라 현실 전체를 드러내보이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한 창조자는 될 수 없을 것이다.'(p.965)


제 2의 성을 언젠가 한 번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라도 읽어서 다행이다. 다락방님 덕분에 힘내서 끝까지 완독할 수 있었다! 

다음 주에는 익숙한 타자를 들춰보고, 그 다음 주에는 11월 대상 도서를 읽어야지. 

보봐르가 인용했던 무수한 텍스트들 가운데 스탕달과 소피아 톨스토이의 일기는 읽어보고 싶은데 소피아 톨스토이의 일기는 국내에 출간 준비했었다는 소식만 찾아낼 수 있었고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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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0-31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10월의 마지막말 끝내셨네요. 축하합니다 그리고 고생하셨습니다! 이 책은 읽어두는 게 좋은 책이니만큼 함께 읽을 수 있어 더 좋은 것 같아요. 두꺼운 책이라 혼자서는 좀처럼 진도가 안나가는데 읽어보면 또 정말 좋은 책이잖아요. 고생하셨습니다!!

등롱 2021-11-01 10:40   좋아요 0 | URL
마지막 날 안에 끝내려고 노력했는데 끝내서 너무 기분이 좋아요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고전은 정말 읽을 가치가 충분했어요! 많은 걸 얻는 독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
 



밑줄긋기와 밑줄긋기 사이에 문단을 넣고 싶은데 그런 기능은 없는 모양이다. 















가족 안에서 여성의 수동성은 그 자체로 '생산적'이다. 

... 생략

둘째, 자율성을 완전히 부정당하기 때문에 좌절을 느끼고, 이 좌절을 언제나 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연속적인 욕구, 즉 소비 비슷한 것으로 승화해야만 하므로, 여성은 생산적인 존재가 된다. 소비는 여성이 가사노동을 할 때 갖는 강박적인 완벽주의에 정확히 상응한다.

p.47


이 부분이 좀 어렵다. 자율성을 완전히 부정당하기 때문이라는 구절은 노동력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사회자원- 혹은 노동력이기 때문이지만 노동력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읽었다. 하지만 소비 부분이 이해가 잘 안된다. 소비가 어떻게 집안일에서의 완벽주의(페이지를 찾기 어렵지만, 앞에서 굳이 그렇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집안일에서의 완벽주의를 취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와 상응하는 것일까?

가사노동과 소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이미 다뤄진 이론이 있는데 내가 그 이론을 전혀 모르는 거라는 느낌이 든다. 


집 안에 뭐가 있어야하는지 여성들에게 말하는 것은 분명 우리 일이 아니다. 아무도 다른 이의 욕구를 규정할 순 없다. 우리는 투쟁을 조직하고, 그 투쟁으로 이런 승화가 불필요해지는 데 관심이 있다. p.47-48


그리고 다음 단락에서...

성적 수동성이 바로 튀어나와서, 이 부분 역시 조금 혼란스러움. 

가사 노동과 성적 수동성이 연결되는 부분이... 


일단 이 부분은 제껴놓고. 

계속 읽다보니 저 소비와 가사노동의 상응관계는 아마도 여성이 가정을 소비의 중심지로 만든다는 공격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여성은 노동력을 재생산해낼 뿐 그 자신이 노동력이 아닌데도 노동력에게 더 많은 소비를 해야하는 자본을 벌어오라고 괴롭힌다는 관념에 대한 반론인 것 같다. 혹은, 여성은 검소해야한다는 압박에 대한 반론이거나. 


가족 안에서 여성이 맡은 역할의 세 번째 측면은, 여성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억압하는 인물,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규율을 강조하는 사람이 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앞서 논의했듯이 여성의 인격이 특수한 유행의 저해를 받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편이라는 폭압, 가정이라는 폭압, 자신의 전 존재가 '영웅적인 어머니와 행복한 아내'라는 이상형을 거부하는데도 그런 이상형이 되고자 고군분투해야하는 폭압 아래에서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p53


아, 나 이 부분 너무 좋았는데-. 

여기 읽으니까 뭐가 떠올랐냐면, 아내에게는 비밀로 아이를 어린이집(유치원?)에 보내지 않고 아이와 둘이서 놀러가면서 아내에게 비밀을 만드는 남편 이야기였다. 그리고,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냐며 아내를 힐난하는 남편들의 목소리. 성인 아들을 하나 더 키운다고 한탄하는 아내들의 목소리. 저 폭압을 말하는 문장에 얼마나 많은 몰아세움이 담겨있는지, 읽고 또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썼는지 감탄하고 공감하면서. 


산아 제한 연구가 이토록 더디게 진행되고, 거의 전 세계에서 임신 중절이 금지되고 결국 '치료'목적으로만 허락된 건 우연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이것들을 요구하는 것은 안이한 개혁주의가 아니다. 이런 문제들이 자본주의적으로 관리되면 거듭해서 계급 차별, 특히 여성 차별을 만들어낸다. p.54


 이 부분을 읽자마자 얼마 전에 읽은 멜린다 게이츠의 책이 바로 떠올랐다. 멜린다 게이츠는 여성 생존이 산아 제한, 피임, 임신 중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자세한 현장의 목소리와 함께 설명한다. 


연결할 생각이 전혀 없이 읽었던 책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노동계급가족은 더욱 무너뜨리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노동계급가족이 노동자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로서, 그리고 노동자라는 이유로 노동계급가족은 자본을 지탱하고 있기도 하다. 노동계급가족은 계급의 유지 및 생존을 좌우하지만, 이때 계급의 유지 및 생존은 계급 자체에 반하여 여성을 희생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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