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중반까지 거의 손을 대지 못하다가 막판에 50페이지씩 몰아서 읽으며 새삼 느꼈다. 어려운 책은 찔끔찔끔 읽는 것보다는 역시 어느 정도의 분량을 몰아 읽어야 그나마 이해력이 조금 높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고.
먼저 일독하신 분들의 리뷰대로 11장은 가슴에 용기를 가득 불어넣어주고, 여성주의 책들을 읽어가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챕터였다. 하필 이 챕터를 읽고 있는 동안 미국 대법원의 임신중지 위헌 판결이 나오는 바람에 우리가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이 좀 흔들렸지만, 괜찮다, 항상 그래왔다.
책을 읽으면서 서문이 좀 어렵다고 느꼈는데, 11장을 읽은 후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 11장으로 돌아왔더니 거다 러너의 포부와 큰그림이 읽힌다.
"혁명적 사고는 항상 억압받는 사람들의 경험을 격상시킴으로써 가능하였다. 봉건영주에게 감히 도전하려면 농노는 먼저 그의 생활경험의 의미를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만 했다. ...(중략)... 새롭게 의식화된 개인 혹은 집단으로 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해방적이다.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다." p.395
"우리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떠나야 한다." p.396
"우리 자신의 것, 여성의 경험을 신뢰함으로써 누군가의 진술을 검증하기. 그런 겨험은 대체로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거나 무시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지식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자신 속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저항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p.396
우리 자신의 것, 여성의 경험을 신뢰함으로써 진술을 검증하기.
이게 책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서문에서 제시된 질문 "사회에서의 종속적 위치에 대한 여성의 각성이 오랫동안 지연된 것에 관한 것이다. 무엇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그들을 종속시킨 가부장적 체계를 유지하고, 그들을 종속시킨 체계를 후세에 전하고, 그 체계를 양성의 자손들에게 세대를 이어 전하는 데 가담한 여성의 역사적 공모를 설명할 수 있을까?" (p.19)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여성의 경험을 신뢰하며 그 진술로부터 차곡차곡 끌어내어 논리와 역사를 쌓아올린 것. 서장과 마지막장이 딱 맞물리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좀더 많이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후속작인 이 책은 이미 절판이 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중고로 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얻은 또 하나의 성과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목소리들을 읽을 수 있었던 것. 이 목소리들을 통해서 거다 러너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착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노예화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구조와 기원을 읽어내지만 한편으로, 사회와 시스템에 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좀더 나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시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읽고, 서툴게나마 읽은 기록을 남기고, 어떻게 살려고 노력하는지 흔적을 남겨야지. 노력하는 삶을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