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상처투성의 악마’다.
킬러들의 수다, 조용한 개그맨, 태연한 인생, 즐거운 악몽
처럼, 그럴 수 없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게 된 것들.
인생이 태연할 리 없으며, 악몽이 즐겁고, 시끄러운 킬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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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서 일진이었던 카사이 마이는 도쿄에서 오다기리 시노를 따돌리고 괴롭힌다.
고등학생이 되어 시골로 이사를 오게 된 카사이는 그곳에서 오다기리를 만나고,
오다기리는 시골의 학생들과 함께 카사이를 따돌리고 괴롭히게 된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이야기.
다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이야기.
악마였지만 그 사이에서 상처로 뒤덮이는 이야기.
따돌림은 유전자처럼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닌다. 유치원에서부터 학교, 군대에서도 따돌림은
역병처럼 퍼져 있고 미용실의 직원들, 회사, 심지어는 형제가 많은 한 부모에게 난 아이들에게서도 따돌림은 나타난다.
눈에 드러나게 나타날 때까지 따돌림이 서서히 올라오는 경우는 방관자들 때문이기도 하다. 따돌림을
막아야 하고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야 하는 사람, 영화에서는 담임으로 나오는 사람마저 방관하고 방치하게 되면 따돌림이라는 것은 세력이 커지고
부풀어 올라 눈에 보이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럼 방관자가 아니었던가, 또는 나는 방관자가 아닐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 나 역시 방관하거나 또는 괴롭히는 아이들 틈에 끼여 멀리서 지켜보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
하지만 나와 친한 척은 말아줘, 그러면 아이들이 날 타깃으로 잡거든.
영화 속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방관자가 되면 모든 게 편하다. 귀찮을 일이 없고, 나에게
손가락질을 할 사람도 없다. 무엇보다 내가 괴롭힘을 당하는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오늘 뜬 기사 중에는 종로 방화범에 관한 뉴스가 하나 있었다. 난 하루하루가 지옥인데, 종로 여관
방화범은 아들 결혼식 얘기,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가해자가 소주를 마시고 정신이 없는 가운데 불을 질러서 세 모녀를 잃은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인생이 망가졌다. 사형을 시켜달라고 청와대 청원을 넣었지만 아마도 사형은 집행뿐 아니라 검찰에서도 구형조차 내려지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 아버지는 가해자가 반성문을 읽는 것을 법정에서 들을 수 있는데, 가해자는 울면서 반성문을
읽었다고 한다. 그에 피해자 아버지는, 살인자가 어디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유가족들 앞에서 본인 아들 결혼식을 이야기하는가? 내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
이런 일이 터지고, 기사가 나면 우리는 대체로 방관자의 입장이다. 그저 기사를 읽고 사진을 보고
뉴스를 접할 뿐이다. 그것에 안타까워할 뿐이지만 나에게 직접적인 타격이 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으로서 모두 먼 세계의 사건이자 생면부지 타인에게
일어난 일이다. 연민은 느끼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어떤 방식으로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나에게도 이런 일이 터지면 사람들이 그저
방관자의 모습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라는 걸 인지하면 무섭다고 느끼게 된다.
영화에서 카사이는 마지막에 말한다. 괴롭히는 아이도, 또 옆에서 같이 따돌리는 아이도, 방관하는
당신도 모두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고. 옳지 못한 것보다 옳은 것이 때에 따라 악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