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수면 위의 일본 영화는 과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다.
예전에 ‘지금 만나러 갑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조제, 호랑이,,,,’ ‘철도원’ 같이 손을 뻗어 아무거나 휙 건져도 영화의 세계에 압도당하고 이야기에 몰입하곤 했던 적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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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스완은 원작 만화를 재미있게 봤기에 영화가 나왔을 때 팬들은 당연하게도 우려반 기대반으로 보게 된다. 원작 만화가 있는 영화가 성공할 확률은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하는 것에 비해 확연하게 떨어진다. 그건 프래쉬함이 낮기 때문이다. 프래쉬함이란 오직 한 번이기에. 원작 만화의 신선함을 영화가 넘어서기란 기적에 가깝다. 그러니 성공에서는 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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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일본의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나온다. 주인공인 아야노 고, 야마다 타카유키, 이세야 유스케, 키네코 노부야시, 사와지리 에리카, 그 외 선이 굵은 중견배우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그렇지만 만화를 영화로 옮겨놓다 보니 과하다. 입을 다물지 않고 우루사이!를 소리치는 것과 같은 발성이 과하게 영화를 가득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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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도 과하고 미장센은 좋으나 역시 과하다. 과함에 과함으로 덮고 과함을 튀겨낸 영화가 신주쿠 스완이다. 거기에 소설적 대사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젤리처럼 만든다. 일본의 신주쿠 가부키쵸는, 캡처한 화면에서처럼 향락의 도시다. 소비가 매일 이루어지는 도시. 생산은 요만큼인데 소비는 이만큼인 도시. 바로 꿈의 도시다. 이는 곧 욕망을 드러내는 도시이며 현실 속 꿈같은 세계이다. 전체는 있지만 일부가 없는, 모호하고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도시이다. 누구 하나 말없이 사라져도 그 자리는 또 다른 인형이 들어서는 세계이다. 젊은 사람들은 욕망이 강하다. 좋은 가방, 좋은 차, 좋은 옷, 맛있는 음식,으로 향한 욕망은 인간의 밑바닥 본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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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향락과 물욕,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도시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내가 있는 바닷가의 여기 도시에도 자정을 기점으로 향락으로 변모하는 도시가 있다. 지나가면 삐끼들이 따라다니며 말을 걸며 그들의 세계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겉이 화려할수록 속은 미궁 같은 곳은 대도시일수록 한없이 추악하고 가학적일 수밖에 없다
.

얼마 전에 안타깝게 죽어버린 엔서니 보뎅(안소니 부르뎅)도 미국을 움직이는 화려한 뉴욕 사람들의 더러운 뒷이야기 ‘키친 컨피덴셜’을 적었다. 그 속에는 뉴욕을 움직이는 거대한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 마약, 음식 저장고 속에서의 섹스, 과음, 있을 수 없는 식재료, 그리고 업계의 폭로 등을 그대로 써냈고 그 이야기는 브래들리 쿠퍼 주연의 폭스 티브이 드라마로 제작이 되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는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화려함, 커튼 뒤의 모습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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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풍속점, 패션헬스, 카바죠나 호스트가 산업이다. 섹스를 산업으로 두고 있고 길거리 스카웃은 합법적이다. 그러다 보니 야쿠자와는 다른 이쪽 업계의 종사자들은 경찰들과도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일본과 한국의 다른 점은 한국은 잡아끄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은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바로 경범죄에 속하기 때문에 그저 말로만 가와이, 우와 초 가와이! 같은 말로 스카우트 제의가 온다. 일본의 걸그룹은 섹시한 콘셉트가 거의 없다. 대체로 귀여움으로 무장을 하고 자주 바뀌게 되는 반면 한국은 걸그룹이 섹시한 콘셉트가 많다. 일본에서는 풍속점을 비롯해서 AV 업계가 온통 섹시함으로 줄줄 흐르고 있기에 걸그룹은 그 사이를 뚫을 수 없는 구조다. 성인여배우, 이들은 회사를 통해 팬들을 만나는 것도 꺼려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들과도 거침없다. 무엇보다 짧은 기간에 거액의 돈을 거머쥘 수있다. 명과 암이 도사리고 있고 선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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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의 립반윙클의 신부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는 키자키 제시카를 비롯해 현역 AV 배우들이 실제로 영화에 출연을 했다. 좀 웃긴 이야기지만 일본의 섹스산업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데 오프라인의 대형 섹스샵에 가면 70퍼센트가 한국인, 25퍼센트가 외국인 나머지가 그 외에 사람들이 그 곳에서 입을 벌리고 구경을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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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스완은 그런 향락의 도시의 뒷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만화 속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던 에피소드를 꺼내 영화로 만들었고 2년 뒤에 또 다른 에피소드로 2편을 만들었다. 두 편다 과함의 연속이고 감독의 세계관을 볼 수 있다. 만화와 비슷한 것은 역시 타츠히코의 머리 스타일이려나. 오히려 원작의 타츠히코의 얼굴은 분명 이세야 유스케가 하면 싱크로가 딱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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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적인 장면, 과한 피 터짐, 향락 뒤 지저분한 뒷모습의 대도시 신주쿠를 보고 싶다면 봐도 좋을 듯하다. 영화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한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대도시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그것을 평범하지 않은 향락의 세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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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조이에서 이 장면을 보는 순간은 정말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줄 알았다. 나병 임산부의 손을 잡아 줄 때, 모두가 붙어서 아기가 무사히 나올 수 있게 땀을 뻘뻘 흘릴 때, 꺼져가는 생명에게 생명을 불어주는 주문을 외울 때, 그리고 아기가 나와 모두가 기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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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같은 장면이었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무엇보다 시티 오브 조이에서 패트릭 스웨이지는 살아있었다. 팔딱팔딱 뛰고 있었고 소리를 지르고 생명을 존중할 줄 알고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살아있었다. 패트릭 스웨이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다시 본 시티 오브 조이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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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하고 고난을 겪고 그 후에 기쁨을 느끼는 패트릭 스웨이지를 보는 것이 패트릭 스웨이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물이다. 영화 속에서 패트릭 스웨이지는 부서지고 또 파괴되고 망가지면서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비록 인간으로서 신에게 파괴가 될지언정 인간 자신에게 패배 당하지 않음으로 어떤 필연성을 가진다. 그건 우리 인간이 비록 죽어 한 줌의 재가 될지라도 삶에서 부서지더라도 늘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사랑이 곁에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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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스웨이지는 죽었다. 그가 부른 노래 쉬 라잇 더 윈드처럼 바람이 되었다. 키아누 리브스와 미친 듯이 달릴 때도, 몰리의 사랑을 찾기 위해 동전을 끌어올릴 때에도, 자니가 되어 무대에서 새처럼 춤을 출 때에도 패트릭 스웨이지의 는개비 같은 눈빛을 잊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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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들어서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보는 것 같다. 그렇지만 새로운 영화가 아닌 지나간, 몇 번이나 봤던, 예전의 오래된 영화들이다. 아마도 내가 낡은 사람이라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낡아버렸으니 낡아버린 영화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래전에 느꼈던 감정 같은 것을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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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민을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검은 커튼을 두고 맞은편의 모르는 이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나의 불안과 나의 감정이나 내가 느끼는 일반적이지 않는 고민들을 이야기한다. 그건 뭐랄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기분이다. 그동안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어떤 기준 이하의 자격으로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발을 밀어 넣고 난 후 어쩌지 못하는 비겁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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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조이에는 사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들까요, 그렇기에 기쁨이 더 큰 것 아니겠어요.를 알게 되는 것 같다. 패트릭 스웨이지가 환하게 웃을 때 영화는 그동안 더욱 밝았으니까. 우리는 패트릭 스웨이지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이야기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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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벗어난 SF 영화는 재미있다. SF 영화는 우주의 고독이 있다. 광활하게 펼쳐진 우주의 공백을 표류하는 주인공들의 외로움이 가득하다. 깊은 고독을 오고 가는 메타포 역시 아름다운 지구에서 펼쳐지는 영화적 표류보다 심층적일 수밖에 없다. 끝도 보이지 않는 우주를 바라보는 시적인 감수성과 표층적이지 않는 언어가 있기 때문에 판타지와는 다른 SF영화의 감성 때문에 사람들이, 어른들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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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타워즈, 에일리언 그리고 천 개의 행성 등 원작 소설을 봐도 주인공들은 더없는 외로운 우주 속을 고독하게 누비며 근원적인 인간문제에 대해서 다가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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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영화가 재미있으려면, 도시가 나오고 도시 속 사람들이 가득 나오고 그 속에서 비주얼 쇼크가 이루어지며 클리셰를 비틀어 버리면 보는 이들의 재미를 끌어낼 수 있다. 즉 지구를 벗어나 사람들이 도심 속에 있는 것만큼 나오지 않으면서 비주얼 쇼크를 일으키고 영화적 상상력이 결합된 영화가 주는 재미로 치자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영화적으로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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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DC코믹스의 시리즈는 망작에 가까울 정도로 위의 요소들을 전부 결합하고서도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맨 오브 스틸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조드 장군은 정말 지구의 인간들을 씹어 먹을 듯했다. 입체적이었다. 조드 장군과 카엘의 전투를 통해 미국의 왓슨 테크니컬 컨설팅 회사에서는 피해액을 추산하기도 했다. 인명피해로 12만 명의 사망자와 25만 명의 실종자와 돈으로는 7천억 달러라는 피해액이 나왔다고 할 정도로 영화는 회자되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저스티스 리그에서는 초강력 빌런이라는 게 조드 장군의 다리 하나를 따라오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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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코믹스의 영화가 마블의 영화보다 재미가 떨어지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를 들자면 마블의 시리즈가 벌써 20편이나 나왔는데 마블 각각의 영화가 나오기 전에 도시가 먼저 화면에 나온다. 그리고 그 도시가 가지는 특징을 영화를 보면서 알 수 있고 그 도시 속 맥도날드나 실제 건물을 배치시킴으로 허구 속 현실을 보여주는데 반해 DC코믹스의 영화는 도시도 허구에 현실의 접점을 찾아볼 수 있는 요소가 전무 후무하다. 설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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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티 워는 마블의 19번 째 영화다. 그것도 아주 긴 영화다. 인피니티 워에는 그간의 어벤져스 시리즈의 영화에서보다 아주 많은 히어로가 등장을 하고 비주얼 쇼크가 강하게 이루어지고 흔한 클리셰를 파괴해 버린다.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줌으로 각각의 캐릭터를 좋아했던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도 했다. 이로써 이제 어벤져스의 끝이 보이게 되었다. 십 년 넘게 전 세계 사람들의 아드레날린을 충족하게 분출시킨 시리즈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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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티 워에서도 우주적 고독과 철학적 물음 그리고 요소마다 나타나는 미국식 유머와 함께 조드 장군보다 강력한 타노스가 등장한다. 타노스는 우주적 재앙이며 흔한 클리셰를 파괴하는 굉장한 타격감의 빌런이기도 하다. 스톤을 모아서 아이언맨을 타격할 때에는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초합금으로 이루어진 아이언맨이 부서질까 조마조마했다. 타노스는 입체적이다. 어벤져스를 그야말로 때려 부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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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티 워는 기존 히어로물의 작법과는 이별을 했다. 헐크가 패배를 한다. 이것은 충격적이다. 그 후 영화 내내 헐크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절대적일 것 같았던 아스가르드의 파멸, 록키의 죽음과 해임달의 죽음은 영화의 결말을 말하기도 한다. 마치 영화 우주전쟁 초반의 장면에서 레이첼(타코다 패닝)이 손가락이 가시에 찔려 아파하고 아빠인 레이(톰 크루즈)가 빼내주려고 하자, 가시는 가만두면 저절로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그 첫 장면이 우주전쟁의 결말을 말해주는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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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티 워는 긴 시간을 할애함에도 조금 안타까운 건 타노스의 퀘스트를 한 영화 속에서 다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인피니티 워를 두 편으로 제작했다면 그 속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의 활약도 더 보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와칸다에서의 전투에서 히어로들은 그간의 영화 속에서처럼 큰 활약을 하지 못한다. 100년 된 젊은 노인인 버키는 그런 엄청난 무기인 팔을 부착하고도 그저 엑스트라에 그치고 마는 모습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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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티 워에서의 타노스는 영화적인 작법에 따라가다 보니 어느 정도 인간화가 되었다. 고뇌를 하고 앞뒤를 척도 한다. 원작에서의 타노스는 손가락 튕기기만으로 우주의 반이 날아가는 미치광이자 전 우주의 악으로 나오지만 영화 속 타노스는 지구의 인간이 가지는 감정을 지니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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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줄여서 쓰려고 해도 안 되니 급,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물리적으로 충격적인 결말로 끝난 인피니티 워는 쿠키영상과 엔터맨과 와스프를 보면서 어벤져스가 이후 타노스와의 전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닥터스트레인지가 예지력을 통해서 말 한, 단 한 번의 승리를 알 수 있다. 엔터맨의 배경이 된 도시가 양자역학을 오래전부터 연구를 후원하는 도시로, 어벤져스 4에서는 당연하지만 양자역학으로 타노스와 대결을 하게 될 것이다. 우주의 물질을 바꾸고 눈앞의 고체를 기화시키고 상대를 무참히 무력하게 만드는 타노스라도 우주를 관통하고  흐르고 있는 엔트로피는 일정하기에 어벤져스는 양자역을 이용할 것이다. 우주, 자연의 흐름을 그 어떤 존재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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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게 써서 줄이고 줄였지만 단편소설 만큼 적어도 할 말 많은 어벤져스시리즈. 역시 다음 영화가 기대되는 어벤져스다. 영화 속 수많은 감동적인 장면이 많지만 그루트가 자신의 팔을 잘라 토르의 망치 손잡이를 만드는 장면에서 급 감격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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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면 공포영화가 나온다. 물속에서 물의 마녀가 얼굴을 내밀듯 여름이면 어김없다. 그렇지만 21세기, 현재 공포영화를 보며 흡족해하는 영화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건 이미 너무 많은 공포영화가, 공포영화로 할 수 있는 서사가 바닥이 났기 때문이다. 더 이상 어떤 내용면으로 관객의 니즈를 흡족시킬 수 없어졌다. 그렇기에 공포영화라기보다는 놀람주의 영화로 전락해버린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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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반복, 클리셰. 일 수밖에 없는 공포영화에서 이 3요소를 적절하게’만’ 배치하고 구성을 잡는다면,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공포물이지만 공포물이라는 이름답게 사람들의 지갑을 열 수 있다. 외국의 호러물 역시 모방과 반복 그리고 클리셰를  잘 버무려 포진하고 오마주를 장면 장면 넣으므로 관객들에게 재미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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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스승의 은혜’는 한국 공포영화의 새로운 서막을 여는 영화였다. 아바타가 3D영화의 문을 연 것처럼. 스승의 은혜 이전의 한국 공포영화는 민담이나 설화로 이어지는 원혼의 영화 위주였다면 스승의 은혜에서는 처음으로 신체 훼손이라는 신선한 공포를 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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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으로 공포영화라는 건 사지가 꺾이며 계단을 오르고, 밀가루 토시오가 이때쯤에 고양이 소리를 내거나 수녀 복장의 무장 괴물이 벽에서 연기처럼 나와서 무서움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처럼 사람이 사람을 무참하게 버려둠으로 도시에서 외로운 섬에 갇혀 살다가 굶어 죽거나 사라지는 것이 진정한 공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공포와 호러는 어떤 면으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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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은혜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는 눈꺼풀의 깜빡임을 하지 못하게 호치키스로 눈을 박아버리고 입을 다물지 못하게 잘게 부순 면도날을 입에 넣고 펄펄 끓는 물을 붓는다. 이런 장면에서 보는 이들은 굉장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펄펄 끓는 물의 무서움은 바보라도 알 수 있다. 뜨거운 물에 데인적이 있는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펄펄 끓는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는 그 무서움을, 그 고통에 대해서 알기에 극대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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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게 부순 면도날을 입안에 가득 집어넣는 것 역시 그렇다. 누구나 칼에 베인 적이 있기 때문에 날카로움, 선단공포에 버금가는 그 무서움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을 한다. 면도날들이 입안으로 들어가 몸속에서 난도질할 것을 알기에 보는 이들은 당하는 사람의 공포에 이입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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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공포를 주는 것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을지 모르나 한국 영화의 클리셰에 갇혀 그만 사람들에게 잊히고 만다. 이 영화가 2006년도에 나왔으니 분명 2004년도에 전 세계를 강타한 ‘쏘우’를 본받았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모방, 반복, 클리셰를 적절하게 배치했다면 화면을 응시하는 관객에게 호응을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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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에서는, 주인공은 모르지만 관객만은 알고 있는 사실이 있어서, 그곳으로 가면 안 돼, 안 돼, 가지 마, 하게 되는 경우가 있고, 주인공과 함께 관객이 같이 흐름에 의식이 따라가는 경우가 있다. 주인공과 같이 공포에 휘말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관객은 개개인의 삶을 통해서 면도날이라든가 펄펄 끓는 물에 대한 공포는 어느 정도 학습이 되어 있다. 요즘 나오는 놀람주의 영화는 ‘맵기’와 비슷한다. 매운 정도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다. 불닭볶음면이 매운 사람이 있고 고춧가루를 더 뿌려먹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학습을 통해 터득한 공포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정한 공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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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는 클리셰, 이 죽일 놈의 클리셰를 어쩌지 못했다. 지금 현재 나오는 한국 영화 속에는 대단히 많은 클리셰가 있는데, 요컨대 21세기에 갈등 요소가 있는 인물들이 화해의 장면은 국밥집에서 국밥을 먹으며 해소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미국 영화로 치자면 치즈버그를 앞에 놓고 갈등을 와해시키는 장면인데, 관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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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우처럼 시리즈로 나올 법했던, 여고괴담의 뒤를 이을 법했던 영화는 사라졌고, 당분간은 미장센으로 버무려져 몰입하게 만들었던 곤지암의 아류작들이 꽤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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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플레이스

이 영화는

고요하고 적막한 박진감이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가족 모두가 수화를 하며,

소리와 소음을 줄이기 위해 다니는 행동반경에 모래를 깔아서 맨발로 다닌다.

영화에서 중요한 소리가 소거가 되었어도 묘하게 가슴 졸이며 보게 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또 다른 주인공이 어떻게 생겼냐 하면 저렇게 생겼다

얼굴에 송곳니와 소리를 듣는 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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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뚱딴지같지만 영화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지만 배설을 할 때는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분명, 이 영화가 원작이 있다면 그런 인간 밑바닥에 딱 붙어있는 생존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 사유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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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코맥 맥카시의 ‘더 로드’를 읽어보면 신발을 구하는 것과 ‘우리’ 이외의 사람을 피해다니는 것에 대해서 잘 적어놨다. 절대 식량 부족으로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도래했기에 생존과 근접하게 되면 인간은 인간이 가지는 어떤 도덕과 윤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렇게 다 표현하지 못했다. 비고 모텐슨과 샤를리즈 테론의 열연이 있었지만 조금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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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모두가 무엇에 의해 시력이 상실하면 처음에는 질서 있게 배설을 하러 가지만 안내자가 사라지게 되면 똥오줌과 같이 뒹굴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된다.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역시 영화에서 줄리안 무어의 열연이 있었지만 소설의 세계를 표현하기는 어림없었다

.

 

오히려 일본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에서 인간의 밑바닥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도쿄를 비롯해 일본 전역의 전기가 전부 나가버린다. 

도시에서 전기가 없는 도시 인간들의 생활은 원시시대의 생활과 비슷하게 변모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미쳐가지만 생존, 살아남기 위해 생리작용을 해결하는 것들이 더 잘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

 

콰이어트 플레이스로 돌아와,

소리가 소멸된 가족의 분열이 나타나고

분열된 가족은 다시 소리로 인해 가족을 확인한다.

그 과정에 가족의 중심이었던 아버지는 사라지게 된다.

뉴욕 같은 대도시를 파멸로 몰고 간(그 과정이 영화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인간세계를 침범한 인간보다 강하고 살의를 지닌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서,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 가족은 어떤 방법을 찾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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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영화그램

#콰이어트플레이스#눈먼자들의도시#더로드

#서바이벌패밀리#영화끝나고엔딩음악이좋다

#간만에심장서늘한공포영화#똥싸면소리가나기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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