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오브 조이에서 이 장면을 보는 순간은 정말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줄
알았다. 나병 임산부의 손을 잡아 줄 때, 모두가 붙어서 아기가 무사히 나올 수 있게 땀을 뻘뻘 흘릴 때, 꺼져가는 생명에게 생명을 불어주는
주문을 외울 때, 그리고 아기가 나와 모두가 기뻐할 때
.
마법 같은
장면이었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무엇보다 시티 오브 조이에서 패트릭 스웨이지는 살아있었다. 팔딱팔딱 뛰고 있었고 소리를 지르고 생명을 존중할 줄
알고 바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살아있었다. 패트릭 스웨이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다시 본 시티 오브 조이는 좋았다
.
고독하고 고난을
겪고 그 후에 기쁨을 느끼는 패트릭 스웨이지를 보는 것이 패트릭 스웨이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물이다. 영화 속에서 패트릭 스웨이지는
부서지고 또 파괴되고 망가지면서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비록 인간으로서 신에게 파괴가 될지언정 인간 자신에게 패배 당하지 않음으로 어떤 필연성을
가진다. 그건 우리 인간이 비록 죽어 한 줌의 재가 될지라도 삶에서 부서지더라도 늘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사랑이 곁에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라는 것을
.
패트릭 스웨이지는 죽었다. 그가 부른 노래 쉬 라잇 더 윈드처럼 바람이 되었다. 키아누 리브스와 미친
듯이 달릴 때도, 몰리의 사랑을 찾기 위해 동전을 끌어올릴 때에도, 자니가 되어 무대에서 새처럼 춤을 출 때에도 패트릭 스웨이지의 는개비 같은
눈빛을 잊지는 못할 것 같다
.
근래에 들어서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보는 것 같다. 그렇지만 새로운 영화가 아닌 지나간, 몇 번이나
봤던, 예전의 오래된 영화들이다. 아마도 내가 낡은 사람이라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낡아버렸으니 낡아버린 영화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래전에 느꼈던 감정 같은 것을 더듬는다
.
나의 고민을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검은 커튼을 두고 맞은편의 모르는 이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나의 불안과 나의 감정이나 내가 느끼는 일반적이지 않는
고민들을 이야기한다. 그건 뭐랄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기분이다. 그동안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어떤 기준 이하의 자격으로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발을 밀어 넣고 난 후 어쩌지 못하는 비겁자가 된
것이다
.
시티 오브 조이에는 사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들까요, 그렇기에 기쁨이 더 큰 것 아니겠어요.를 알게
되는 것 같다. 패트릭 스웨이지가 환하게 웃을 때 영화는 그동안 더욱 밝았으니까. 우리는 패트릭 스웨이지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이야기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