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에 나온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을 잡고 끝까지 죽 끌고 가는 힘이 있다. 마지막에서는 초현실 장면까지 넣다니.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는 우나기,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 이야기도 초현실)을 봤는데 나는 아주 재미있었다. 오늘내일 중으로 간장 선생도 볼 예정인데 기대된다.


이유와 동기도 없이 그저 사람을 죽이는 연쇄살인마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실제 사건의 취재 기를 극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살인마인 이와오를 체포하여 취조하는 과정에서 살인자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이와오는 당시에 드문 기독교 집안에서 하느님을 믿는 아버지가 천황의 군부대에게 고기잡이 배를 빼앗기는데 아직 어렸던 이와오는 군인에게 몽둥이를 들고 덤벼든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던 아버지는 천황만세를 외치며 배를 바친다. 그때부터 이와오는 조금씩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비정상, 반도덕, 반사회적인 모습이 아주 많이 나온다. 사람을 이유 없이 죽여 가며 사기를 치고 돈을 뜯어 도피행각을 하는 이와오에 초점이 맞춰 있지만 영화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욕망이나 반사회적인 모습도 잘 보여준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욕정을 품고, 헤어진 남편이 장모가 보는 앞에서 부인을 겁탈하지만 장모는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이 모든 사람들이 일본의 군국주의적인 힘 앞에서 무력하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벌어진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훔쳐보는 자들에 의해 알음알음 퍼져 나간다.


이와오가 최초에 사람을 죽이면서 손에 묻은 피를 소변을 보면서 씻는다. 그 장면은 마치 감정이 소거된 하느님 같은, 신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 손으로 사과를 따 먹다가 맛이 없다며 버린다.


이 영화는 오래됐지만 분명 사람을 잡아 끈다. 이와오의 연기가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한다. 그 능청함과 순박함을 표현하다가도 사람을 죽일 때 드러나는 섬뜩한 눈빛, 아내인 카즈코의 몸과 살갗은 욕망을 알린다. 시아버지와 같이 목욕을 하면서 시아버지의 손을 가슴에 잡아 끄는 손을 카메라는 클로즈업한다. 그때의 손은 집안일을 하고 밥을 하는 손은 분명 아니다.


그리고 포스터 속에 나오는 여성, 여관의 주인인 하루는 이와오에게 반하게 된다. 자신을 상냥하게 대해주는 그에게 넘어간다. 나중에 그가 티브이 속에 나오는 범죄자 연쇄살인범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준다. 하루는 늘 남자들에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지만 이와오와 함께 자면서 생긴 아이가 있었지만 이와오는 그런 하루를 목을 졸라 죽이고 만다. 이와오에게 목이 졸려 죽을 때 하루는 이와오를 위해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손이 양념에 묻어 벌겋게 되면서. 그런 장면이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여관의 모녀를 죽이지만 세 명을 죽인 것이다. 하루의 배 속에 아기가 있으니. 이와오는 취조과정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나의 아이가 뱃속에서 시멘트처럼 굳어서 죽었을 거야. 이런 대사는 정말 섬뜩하다.  


실화로는 여관의 모녀를 죽이고 바로 잡히는 게 아니라 한 절에서 사기를 치다가 거기서 잡히게 된다고 한다.


제목이 왜 복수는 나의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와오는 어릴 때 신이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고 비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신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제목을 이렇게 지었지 않았을까. 내가 사람을 이유 없이 죽여도 신은 나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계속 확인하고 싶었던 사이코패스 이와오의 이야기 ‘복수는 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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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바다에 매일 나오다 보면 갈매기들을 늘 볼 수 있어. 그런데 바다에 나왔는데 갈매기들이 한 마리도 없는 날이 있어. 마치 갈매기들이 [우리 바다에 나가지 말자] 라며 담합으로 농성을 하는 파업자처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날이 있어. 한 마리쯤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늘 생각은 빗나가고 말아.


생각이라는 건 언제나 빗나가는 것 같아. 내가 하는 생각이란 그래. 언제부터인지 바다에 갈매기보다 비둘기나 까마귀가 더 보이기 시작했어. 비둘기가 귀엽게 모여 있다면 까마귀들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바닷가를 점령해 버리고 말아.


비가 내리고 난 후 지저분해진 바닷가에 모여서 크악 크악 공격적인 소리를 내며 인간이 버려놓은 음식 찌꺼기를 먹으려고 날개를 펼치고 서로를 노려봐. 까마귀들은 저들의 공간에서 어쩌다가 바닷가까지 와서 공격적인 모습으로 도로 위의 버려진 음식 쓰레기를 쪼고 있는 걸까.


까마귀들을 보고 있으면 내 감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어. 세상에는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거 같아.


까마귀들이 먹이 때문에 생존을 위해 날개를 펴 크악 크악 거리는 모습은 글쎄, 조금은 괴로워. 사실 이런 종류의 괴로움은 육개장을 먹고 나면 약간 남아있는 국물처럼 늘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어.


조금 괴롭다는 말은 정말 괴롭지 않다는 말일지도 몰라. 정말 괴롭지 않음은 늘 괴롭다는 말과도 같을까.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이면 언제나 괴로움이 침잠해 있어.


꿈에서마저 까마귀들이 나와. 여긴 우리 자리야 이제 넌 다른 곳으로 가버려. 라며 까마귀들이 바다에서 나를 쫓아내려고 해. 나는 싫다고 해야 하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아. 그때 트럭이 까마귀들을 밟고 지나가 버려.


도로에 쩍 붙어 까마귀를 나는 토를 참아가며 떼어내고 있는데 그 소리가 소름 끼쳐. 적요한 흙구덩이 속에 들러붙어있던 내 신경줄을 억지로 뜯어내는 소리 같거든. 이런 꿈은 마음이 불편해. 불편한 이면에는 소름이 눈을 홉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어.


상처가 아물기 전에 딱지를 떼어 버리고 난 다음을 후회할지라도 속살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소름 돋는 소리 지만 나는 신경줄을 억지로 뜯어내는 거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한정적이야. 겁을 집어먹는 것과 지금까지 해 오던 짓을 지치지 않고 계속해야만 한다고 내가 나에게 꾸짖고 소리 지르는 것. 겁이 나고 무섭지만 입으로 무섭다고 할 수 없는 이상한 어른이 이미 되어 버렸어.


콤플렉스를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을 합리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지도 몰라. 세상이 불합리적으로 모순인데 합리적으로 비합리를 설명해야 한다는 게 그게 너무 이상하잖아. 잠이 들어 까마귀조곡을 들어야겠어. 그게 어쩌면 유일한 존재양식의 행로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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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착실하게 간다. 심술궂은 5세 아이에게 부탁하여 시계를 고장 낸다고 해도 시간은 차곡차곡 앞으로 가기만 할 뿐이다. 시내버스도, 대형트럭도 가끔 후진을 하는데 시간은 앞으로만 갈 뿐이다.

여름이다. 매미소리가 강하게 들린다. 매미 소리는 기분이 좋다. 도심지에서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자연의 소리처럼 들린다. 매미가 울면 사랑의 열병을 앓는 미술가가 그려놓은 하늘이 펼쳐지고 바람은 얼굴에 시원하게 닿는다.

여름에는 다른 계절보다 양치질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양치질을 하다가 문득 든 생각은 칫솔이 지구상에 없다면 너무나 끔찍한 세상이 될 것만 같았다.

전국의 칫솔을 만드는 공장에서 “아아,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먹고살기가 힘들군” 하며 칫솔 공장 전부가 “우리는 이제 그만하렵니다” 라면서 두 손을 놓아 버린다면 세상은 얼마나 암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칫솔이 없으면 뭐 어때? 흥. 아무거나 가지고 닦으면 되지, 치실도 있고 수건도 있고 소금도 있으니 괜찮아, 아무런 문제가 없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이는 칫솔로 이리저리 쓱싹쓱싹 하면서 닦아야 깨끗해지는 것 같고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어느 날 칫솔 없이 생활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칫솔 대신 수건이나 거즈로 이도 닦아보고 밥을 먹자마자 물로 헹구기도 했다. 칫솔 대신에 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이를 닦아봤지만 하루 만에 포기해 버렸다.

집을 떠나 여행을 가서 일박을 하게 되었을 때 씻지 못하고 잠이 들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얼굴이나 발은 못 씻어도 이는 닦아야 편하게 잠이 온다. 칫솔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으로 이를 닦는다고 해봐야 답답할 뿐이다.

어린 시절에는 왜 그리도 이 닦는 것을 싫어했을까. 어린 시절의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의 어린이도 비슷하다. 사실 지금도 샤워하는 건 좋은데 씻는 건 싫다. 아이도 이 비슷한 마음일까.

치과에서는 양치질만으로는 이가 깨끗해질 수 없다고 한다. 밥을 먹고 바로 물로 여러 번 헹군다든가 식사 후 많은 시간이 지나기 전에 양치질을 해준다거나 양치질을 한 후 치실 질을 해주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생활이 밥을 먹고 그 이후의 모든 것을 매일매일 하기란 통일이 되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 같다.

치아가 치과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아주 깨끗한 사람들은 위의 귀찮고도 힘든 관리를 지치지 않고 꾸준하게 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로서리 쇼핑을 위해 퇴근길 마트에 들르면 칫솔 코너가 있는 곳에서 이것저것 칫솔들을 구경하고 만지작거린다.

여러 종류의 칫솔들이 있군, 이건 아주 부드럽겠는데, 이건 좀 모양이 이상한데, 음 이건 작아서 어금니 안쪽까지 닦이겠는데. 뭐 이러면서 이 칫솔 저 칫솔 구경하다가 하나씩 사 나른다. 양모가 붙어있는 모양과 색도 천차만별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칫솔, 노인들을 위한 칫솔, 개를 위한 칫솔.

어릴 때부터 우리는 연필이나 볼펜을 손에 쥐고 생활을 해왔다. 칫솔의 생김새는 연필처럼 손에 꽉 움켜쥐게 되어 있다. 그것이 칫솔이 사람에게 부여한 의미가 있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물품들이 존재하고 사람들의 생활을 영위하게 해 주지만, 손으로 움켜잡고 무엇을 할 수 있는 물품은 드넓은 물품 중에 몇 없다.

그렇게 손으로 꽉 쥐고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물품은 인간사에 반드시 밀접하게 필요한 물품들이고 그 종류는 생각만큼 넉넉하지는 않다. 칫솔이 언제 어느 순간에 인간사에 짠하며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칫솔 역시 세대에, 시대에 맞게 진화가 되어 전동칫솔까지 나왔다.

세상에는 없어서는 안 될 물품들이 아주 많다. 컴퓨터가 없어도 안 되며 냉장고가 없어도, 자동차가 없어도 안 된다. 칫솔은 여기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물품일지도 모른다. 있으면 다행이고 없어도 다른 것으로 대처하면 그만인 물품이 칫솔이다.

하지만 없어져 버리면 서서히 불편해진다. 그리고 불편함은 불안으로 번진다. 사소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물품일 수 있다. 사람들 중에서 칫솔 같은 사람이 있다. 아니 어쩌면 칫솔 같은 사람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자동차나 냉장고 같은 사람도 분명히 있다. 회사나 학교나 그 단체, 조직에서 컴퓨터나 자동차 같은 사람은 한두 명씩은 있다. 하지만 회사나 학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칫솔 같은 사람들이다.

언젠가 필요 없어지면 갈아치워 질지, 닳고 못쓰게 되면 버려질지 모르면서 생활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비록 칫솔은 하찮고 어디를 가나 널려있고 일회용으로 한 번 쓰이고 버려지는 물품이지만 분명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품이다. 회사를, 학교를, 가정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 하나하나처럼 말이다.

칫솔을 사랑하는 구매자가 있으니 칫솔 공장 사장님과 직원 분들은 지치지 마시고 분발해 주세요. 으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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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 없이 이 정도면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영화였다. 시저가 나와서 ‘노우’ 했을 때 그 무한으로 들었던 짜릿함은 전혀 없어서 굉장한 재미는 없지만 혹성탈출의 새로운 시작으로는 무난했다. 나는 재미있게 봤다는 말이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긴 러닝타임 때문이기도 한데 나는 지루하지 않았다. 나는 혹성탈출 시리즈는 이상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전부 재미있게 봤다. 인류가 만든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는 90퍼센트 이상 사라졌고 유인원은 언어를 사용하게 된 세계에서 시저 후손들이 서로 물고 뜯고 하는 이야기다.

그 사이에 에코라 불리는 인간이 한 명 등장하는데 다른 인간들과 다르게 지능이 있고 언어를 할 줄 알며 자신의 이름을 메이라고 하는 여자였다.

주인공 노아는 메이의 이름을 알기 전 노바라고 부르는데 노바는 60년대 혹성탈출에서 유인원에 잡혔던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고, 이전 3부작에서 그 여자 아이의 이름이기도 하다.

어떻든 시저의 팬으로 시저가 나오지는 않지만 유인원과 유인원 그리고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혹성탈출 시리즈는 재미있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왜 유인원은 인간화가 되었는데 말은 그냥 말이냐고.

이 시리즈는 침팬지에 대한 이해도가 있으면 더 깊게 빠져서 볼 수 있다. 이전에 올렸던 것처럼 침팬지는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정치적인 존재다. 인간처럼 정치적으로 종족을 보존하고 유지한다. 다른 군집생활을 하는 동물들처럼 우두머리가 되려면 일 대일로 붙어서 싸워서 이겨서 대장이 되는 게 아니라,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때, 추앙을 받았을 때 우두머리가 된다.

그러다가 왕의 역할을 잘하지 못한다? 그러면 서열 2위와 3위가 합쳐서 우두머리를 내친다. 합치를 이뤄서 권력을 휘두르는 우두머리를 내쫓는다. 그래서 침팬지는 암에 걸려 곧 죽을 것 같아도 절대 그런 표를 내지 않는다.

또 다른 위협적은 육식 동물들이 쳐들어왔을 때에도 어떻게 방어를 하는지, 또 암컷 침팬지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이 모든 것들이 뒷받침되었을 때 왕이 되고 군집을 다스린다. 우두머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침팬지들은 전부 인사를 하는데 그 방식이 제각각이다. 고개를 숙이는 놈, 손을 흔드는 놈, 우우우우 하는 놈 그렇게 왕에게 자신의 신뢰를 표기한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은 여왕 침팬지의 정치적인 행동도 왕은 터치하지 않는다. 여왕 침팬지는 다른 암컷들을 대동해서 자신의 편으로 계속 둔다. 그 과정이 아주 재미있다. 그리고 왕의 음식에 손을 대기도 하는데 우두머리는 그걸 나무라지 않는다.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거의 인간과 비슷하다.

60년대 혹성탈출 시리즈를 보면 유인원들은 인간처럼 전부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지금 봐도 재미있다.

이번 영화의 여자 주인공 메이로 나온 프레이아 엘런의 얼굴은 미샤 버튼의 한창때의 모습 같았다. 인류가 망하고 몇 세기가 흘렀는데 여기서도 눈썹은 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다. 다른 모습은 영화 속 시대에 맞게 고증이 된 것 같은데 눈썹만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그것 참 신기하다.

내용은 딱히 볼 게 없다. 끌려가고 결투를 하고 배경과 함께 유인원들의 삶을 보는 재미가 있다. 사냥, 착취, 군림을 위한 유인원과 자유를 바라는 유인원과 인간의 역사적 기술을 유인원에게 넘기기 싫은 인간이 펼치는 이야기 ‘혹성탈출 새로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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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불꽃] 축제가 끝나면 불꽃이 사라진다고 보십니까, 나의 삶은 화약으로 시작해 불꽃과 함께 했습니다. 단 하루의 축제를 위한 불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불꽃. 당신에게 필요한 불꽃은 무엇입니까.


이 말은 몇 해 전의 한화 광고에서 불꽃놀이를 보여주며 불꽃 장인이 한 대사였어. 불꽃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 꽃과 불은 함께 할 수 없지만 불꽃은 그걸 가능케 하니까.


활활 타오르는 꽃.


상상만으로도 멋진 장면이지. 장관이랄 수 있어. 어린 시절의 불꽃은 보이는 그대로의 불꽃이었고, 학창 시절의 불꽃은 열정을 말했으며 그 사람과 불꽃같은 사랑을 하고 태운 불꽃을 소진시키며 남은 날들을 보내곤 했지. 비명을 지르며 힘들게 꼭짓점에 도달하는 순간 백만 개의 불꽃으로 잠시 아름답게 타올랐다가 그대로 무화되는 불꽃. 인간의 삶과도 닮았어.

우리는 왜 인파 속으로 들어가 고생스럽기만 한 불꽃을 보러 가는지, 훌쩍 커버린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도 불꽃놀이를 하면 그곳으로 가서 불꽃을 보는 것일까.


우리는 이렇게 말을 해. 이번에 불꽃놀이 보러 갈까?라고. 불꽃놀이를 혼자 보러 가는 사람은 많지 않아.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는 거지.


불꽃의 색이나 형태는 잊어버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보는 거야. 불꽃놀이의 날 누구와 보냈는지 만큼은 계속 생각나서 추억이 되니까. 불꽃은 금방 사라져 버리지만 추억은 영원하니까.


[불꽃이 작렬할 때 사람들은 말하기를 멈춘다. 꼬리를 흔들며 ‘피융’하는 비명에 귀 기울인다. 예고된 불꽃놀이를 부러 탐탁지 않은 사람과 보러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불꽃놀이는 찰나적이다. 그리하여 우리 의식에 지워지지 않는 점을 찍는다. 불은 적극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동시에, 사로잡힌 대상을 태워 무화시키는 이율배반적 원소다. 완성의 순간은 수십만 개의 소멸로 흩어진다. 절정은 곧 죽음이다. 흡사 벚꽃의 미학이다 – 김혜리 기자]


불꽃놀이는 추운 계절에는 하지 않아. 여름이나 그 언저리에 언제나 열리지. 한 번 화려하게 타올라 절정과 함께 소멸하는 불꽃은 어쩌면 저 높은 곳에서 성냥갑 속의 성냥개비 같은 우리들을 긍휼히 바라볼지도 모르지.

그림은 불꽃그림의 화가 야마시타 기요시의 그림들이야. 그는 불꽃놀이를 그리는 것이 평생에 걸친 탐닉이었어. 야마시타는 지적 장애가 있었고 세 살 무렵 고열을 앓은 다음부터 걸음걸이도 불편했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이지메가 따라붙었어.


미술만큼은 그가 유일하게 ‘수’를 받는 과목이었고 친구가 없어서 꽃과 곤충에게 말을 걸며 놀았지. 그러면서 자연을 정밀묘사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에 대해서 사납게 일렁이던 소년의 마음이 잔잔해졌어.


18세에 방랑을 하면서 야마시타는 밥을 얻어먹고 마을을 떠날 때면 작품을 남기곤 했어. 도시락 뚜껑, 쟁반, 밥주걱, 부채 등 검소한 서민의 살림살이가 모두 그의 화폭이었지. 1971년 7월에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올해 불꽃놀이는 어디로 갈까?”였데.


야마시타 이야기는 일본에서 드라마로 방영이 되기도 했어. 배우가 실제 야마시타랑 쏙 닮았어 큭큭. 검색해 보면 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을 거야.



치매가 걸린 노모에게 불꽃을 보여주고 싶다. 치매가 걸린 노모와 함께 불꽃놀이를 보러 가면 화려한 불꽃과 함께 노모의 모습에서 눈앞이 흐려지며 지분거릴지도 모른다. 아이같이 되어 버린 노모는 어쩌면 쥐어 짜내듯 피어 올라가서 터져버리는 불꽃을 보며 또 다른 세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다. 수만 개의 불꽃이 치매 노모의 흐릿한 눈동자 속에 수 만개의 추억으로 명멸할 테니 – 이건 한 번 써본 짤막한 소설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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