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일아트가 아가씨들의 전유물에서 이제는 모든 여성들의 기호가 되었다. 어쩌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동안 신경 쓰지 못한 부분에 투자를 하는 여성들이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들에 비해 더 네일아트를 할지도 모른다. 그건 주위에 네일 샵들이 늘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지나가다가 쓱 들어가서 네일 손질을 받으면 되는데 이제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결혼을 하고 다른 곳은 결혼 전에 비해 망가졌을지라도(피부나 몸매) 손톱은 손질을 받으면 받은 만큼 표가 확실하게 나기 때문에 손질을 받기 전과 후의 기분은 정말 다르다고 한다. 또 무엇보다 자기 만족도 있지만 남편이나 남자 친구도 좋아한다. 손톱이 예쁘면 남자들도 좋아한다. 더불어 아이들이나 친구들도 손톱이 예쁘다고 한 마디 한다. 그 별거 아닌 한 마디가 비록 손질한 네일이 무너질지라도 또 내일 열심히 일상을 보내는 동력원이 된다.


나이가 들면 가장 먼저 표가 나는 것 중에 하나가 손톱이다. 단백질이 빠져나가니 줄이 가거나 울퉁불퉁해진다. 네일 손질을 받으면 그렇지 않은 손톱에 비해 그걸 가릴 수도 있다. 또 손톱도 사람의 귀처럼 다 다르지만 손톱 바디가 길고 끝이 뾰족하게 모여 있는 예쁜 손톱을 가지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누군가들에게 자신의 손을 자신 있게 드러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예쁘니까.


우리는 보통 손이 예쁜, 섬섬옥수라고 하는데 실은 손톱이 예쁜 손을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손톱이 예쁘게 보이기 위한 네일 손질이 근래에 나타난 건 아니다. 세기의 디바 바바라 스트라이샌드도 손톱에 신경을 아주 많이 쓰는 스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손톱은 늘 정갈하고 길쭉하고 튀는 색의 매니큐어로 되어 있다. 그래서 어쩌면 바바라의 얼굴보다는 손으로 먼저 시선이 갈 수도 있다. 바바라 스트라이샌드는 40년대 생으로 할머니지만 손톱은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66년 1월 1일에 개봉한 아주 재미있는 ‘말띠 신부’라는 영화가 있다. 42년 생의 말띠 동창생들의 이야기다. 엄앵란, 최지희, 남미리, 방성자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리고 있는데 세련됐고 지금 봐도 재미있다. 영화 속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밴드 키보이스가 나오며 영화 속에서 밴드와 어우러져 뮤지컬처럼 춤과 노래를 한다.


영화 속 최지희는 독보적이다. 사람들과 춤을 추는 장면은 정말 뮤지컬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이 장면은 왜 그런지 수많은 리메이크 장면을 탄생시킨 존 트라볼타의 토요일 밤의 열기를 떠올리게 한다. 말띠 신부가 66년이고 토요일 밤의 열기가 77년이니 얼마나 앞선 것인가.

이 66년의 영화 속 여주인공들의 손톱은 지금의 네일 손질을 한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아마도 그 오래전부터 손톱이 예쁜 것에 집착 아닌 집착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에 대한 동경은 괴테의 시절에도 예뻐 보이기 위해, 피부가 하얗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피를 빼기도 했을 정도이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클레오파트라까지 간다.


이렇게 예쁜, 길쭉하고 붉은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에 집착한 사람은 마광수 교수였다. 마광수 교수는 평생 윤동주를 연구하다 ‘즐거운 사라’를 펴내면서 사회에 폭풍과도 같은 파란을 일으켰다. 오죽했으면 즐거운 사라는 판매금지를 받고 정부 산하기간에 끌려가기도 했다.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에서였다. 얼마나 한국이라는 사회가 무지했던가. 마광수 교수는 사라의 손톱에 집착을 했다. 사라는 예쁘고 길쭉한 손톱 바디를 가지고 있으며 늘 매니큐어를 발랐다. 미대생인 사라는 다른 여학생들과는 달랐다. 한지섭 교수의 강의 도중에도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온 가족이 미국으로 가서 사라는 몹시 자유롭다.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 그 자유에는 예쁜 손톱, 즉 섹시한 손톱은 큰 한몫을 한다. 마광수 교수 자신도 붉은색의 매니큐어를 바른 길쭉한 손톱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을 보면 발에 엄청나게 집착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예쁜 발을 보면 참을 수 없었다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자신이 밝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발에 대한 집착이 잘 나타난다. 작고 예쁜 발과 발톱이 예쁘면 한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양말에 그 예쁜 모습은 늘 감추고 있으니 자신밖에 볼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악마적인 안도감과 성취감으로 발을, 발가락을 열심히도 탐미한다.


'미친 사랑'을 읽어보면 불편하고 자극적인데 격렬한 문학과는 별개로 인간적인 면모가 가득하다. 나오미의 바람기와 방자함은 그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남자에게 내 보일 때 발이 드러난다. 그 결점을 없애버리면 조지의 것이 되지만 결점이 사라지면 나오미의 가치도 사라져 버린다. 조지는 나오미를 향한 일방적인 미친 사랑에 빠져들어 점점 수몰되어간다.


준이치로의 ‘만’을 읽어보면, 이렇게 예쁜 몸매를 하고 있으니 차라리 죽여 버리고 싶어,라고 하고 죽여줘, 죽여줘. 차라리 당신 손에 죽고 싶다고 한다. 여배우의 나체를 떠올리며 글을 쓰는 준이치로는 발에 집착을 한다. 예쁜 발, 파멸하는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되는 육체의 한 부분이 성적으로 드러나는 가슴이나 성기가 아닌 누구도 가지지 못한 예쁘고 섹시한 발인 것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1880년대 사람이니까 이렇게 너저분하고 악마적이지만 인간의 본능에 몰입하는 소설을 써서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불륜, 미친 사랑, 자살이 예전에는 금기시되었다. 아니 요즘도 금기시되고 있다. 우리나라 56년도 영화 ‘자유부인’을 봐도 파격적이다. 금기라는 건 그만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고 나면 강력하고 파괴적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동경하는 것이 '금기'일지도 모른다. 그 금기 속에는 예쁘고 섹시한 손톱이 있었을 것이다.


여자들도 남자들의 예쁜 손, 손톱을 좋아한다. 한때 소지섭의 길쭉하고 잘빠진 손톱에 여성들이 열광을 했다. 성시경의 요리하는 길쭉한 손가락에 또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묘하지만 손가락이 짧은데 손톱 바디가 길거나 손톱 바디가 긴데 손가락이 짧고 굵은 경우는 잘 없다. 소지섭의 예쁜 손은 이렇게 짤로 돌아다닌다.

실사만 그런 게 아니라 만화에서도 예쁜 손톱은 드러난다. 드레곤 길들이기 홈 커밍에서도 예쁘게 손톱을 표현했다.

우리는 왜 예쁜 손톱에 빠지고 좋아할까. 그건 정말 본능에 가깝지 않을까. 누군가를 불러 놓고, 아니면 여럿 모아 놓고 왜 그런가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사람들은 대답을 할 것이지만 이런 본능에 가까운 집착을 말로 풀어서 설명을 하기는 애매하다. 그저 예쁜 것이다. 예쁜 것에는 남자 여자가 따로 없다. 예쁜 것을 보고 끌리는 건 나이와도 무관하다. 그리고 동물들, 새들도 그렇다. 공작새를 보라. 암컷을 꼬시기 위해 엄청난 컬러를 뿜어내며 날개를 얼마나 뽐내는지.


예쁜 것에는 대체가 없다. 베토벤을 살아생전 동경하던 슈베르트는 32살인가, 아주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는 한 번이라도 베토벤을 만나고 싶었지만 베토벤은 만나주지 않았다. 더불어 좋아하는 여자에게도 다가가지 못했다. 배는 나오고 150 정도의 키에 머리통이 커서 사랑하는 여성도 슈베르트를 만나주지 않았다. 사창가를 돌다 그만 성병에 걸려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되었다. 천재적인 능력도 예쁜 외모를 이기지 못한다. 베토벤은 슈베르트가 작곡한 악보를 보고 왜 만나주지 못했을까 후회를 했다. 사후 후세들이 그 둘의 무덤을 나란히 둬서 조금이라도 슈베르트를 기리고 있다.


예쁜 건 빨리 질리지만 아름다운 건 쉽게 질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본능은 예쁜 걸 찾는다. 예쁜 걸 보면 집착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미질이 행복을 가져다 주지만 미질 때문에 불행해지기도 한다. 그게 인생이고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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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1-16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중 반복되는 부분이 있네요.

그런 영화가 있었군요.저도 찾아 봐야겠어요.
저도 긴 손톱을 좋아하지만 남자 손톱 긴건 좋은 줄 잘 모르겠..ㅋ
암튼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교관 2021-11-16 17: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리 할 수 있었네요.

예쁜 손톱 같은, 좋은 하루 되세요~~
 

평소에 먹지 않던 맛있는 음식을 보게 되면 폭식의 유혹에 빠져든다. 폭식의 유혹은 먹다 보면 더 강하게 온다. 냠냠 이거 맛있군, 자주 먹던 소시지의 맛이 아니군, 하며 먹다 보면 이미 배가 부른지도 모르고 먹게 된다.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먹었을 때 자제를 해야 하는데 맛있다고 느끼는 음식은 그런 것들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앉아서 먹을 때는 모르지만 일어나면 배가 엄청 부른 경우가 있다.


폭식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한 번에 집중적으로 많은 양의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른 데도 먹는 것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며, 무엇을 얼마나 먹어야 할 것인지 조절할 수 없는 상태’라고 되어있다. 정말 이 얼마나 멋진 상태인가. 최고의 상태가 폭식이 아닌가. 무엇을 얼마나 먹어야 할 것인지 조절할 수 없다니, 세상에 만상에 이렇게나 흐트러질 수 있는 상태라니. 몇 그램, 몇 미터, 몇 센티, 몇 개, 몇 리터처럼 딱딱 정해진대로 생활해야 하는, 생활하고 있는 요즘에 이렇게 뇌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정신줄을 놔버린 상태는 그야말로 멋지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이 강하다. 그 강한 유혹에 또 넘어가게 되면 유혹에 빠져 있는 동안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 하지만 유혹에서 빠져나오면 후회가 따라온다. 폭식의 유혹은 사람에게만 따라다니고 사람이라 폭식의 유혹에 늘 지는 인생이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들은 배가 고플 때 배를 채울 뿐이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시간이 되었다고 해서 음식을 먹거나, 배가 불러 터질 것 같아도 자제가 되지 않아도 폭식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때가 되면 식사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또 뭔가를 먹는다. 굳이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식사와 식사 사이에 빵을 먹고, 과자를 먹고, 컵라면을 먹는다. 어쩌다 인간이 되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인간이 아닌, 인간의 탈을 쓴 몬스터처럼 생활하는 사람도 있다.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습관처럼 음식을 먹기도 한다.


폭식은 아주 멋진 말이다. 너무나 멋진 말인데 그걸 쉽게 할 수 있으니 더없이 유혹이 강할 수밖에 없다. 조절할 수 없는 상태가 생활 속에서 인간이 몇 번이나 경험할 수 있을까. 하지만 생활 속에서 보이지 않는 끈을 겨우 붙잡고 살아가는데 유혹에 넘어가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그쪽으로 몸이 확 쏠리게 된다. 배움이 많고, 똑똑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 유혹에는 혹하게 된다. 그리고 폭식의 유혹에 한 번 빠지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수도꼭지에 물을 콸콸 틀어 놓듯이 속수무책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맛있는 것들이 너무 많고, 맛있는 것들을 실컷 배부르게 먹어가면서 아무렇지 살아가기는 어렵고. 이 폭식의 유혹이 오늘도 날름거리며 혀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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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시인이라고 불리지만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출신의 625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참담함과 꺼져가는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무엇을 보면서 그 시대를 견뎌 냈을까.

김수영의 시를 읽으며 잠시 눈을 감으면, 당시의 어려운 시대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전후 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도로에는 시취가 아직 났고 건물은 복구가 안 되어서 뼈대가 다 드러나 있던 시대.

친구였던 박인환 시인은 밤이면 혼돈 속에서 어쩌지를 못해 술을 마시기만 했다.


김수영 시인은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된다는 착각.

못 사는 사람들이 잘 살게 된다는 착각.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이 된다는 착각.


착각하지 마라.라는 소리는 참 듣기 싫다.

착각하고 있네, 착각하며 살지 마라, 같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 미간은 좁혀지고 골이 생긴다.


심리학자들은 이 '착각'이 인간이 벗어던져야 할 나쁜 관념인가에 대해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착각은 때로는 행복과 긍정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의 제시를 해 주고 동기부여를 갖게 한다.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을 상대로 심리 실험이 이루어진다.

3살짜리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보여준다.

그림책에는 동화가 그려져 있는데 동화 속에는 또래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용선이.

용선이는 손가락이 4개밖에 없다.

용선이는 태어날 때부터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용선이는 손가락이 5개 있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용선이가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될까,라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묻는다.


아이들은 어떤 대답을 할까.


어떤 아이는 자신이 용선이의 손을 만져줄 거라는 대답을 하며 동화책을 끌어안아주었다.

또 한 아이는 용선이가 어른이 될수록 새끼손가락이 자꾸 생겨난다고 대답을 한다.

또 다른 아이는 뽀뽀해주면 그 손가락은 새싹처럼 돋아난다고 했다.

아이들은 용선이의 손가락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절대 그럴 리 없지만 우리는 아이들의 대답에서 착각이 일으키는 긍정의 힘을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에게 안 될 거라고 하는 걸 나는 될 거라고 생각하는 착각.


내 아이가 첫발을 내디디면 어디든 달려갈 거라는 엄마의 착각.


누군가는 나의 능력을 믿어 줄 거라는 착각.


오늘보다 분명히 내일이 나을 거라는 착각.


이것이 우리의 긍정적 착각이다.


잘 안 되지만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혹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그것이 착각의 '힘'이다.

진정한 착각은 우리의 두 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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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고될 때 된장국을 끓인다


하루가 고될 때는 언제일까. 나에게 있어 고된 하루라는 건 육체적 노동을 많이 한 날이 아니라 좀 더 깊은 고민을 하거나 끈적끈적한 불안 속에서 보낸 날이다. 날 때부터 좋지 못한 위 때문에 신경을 써버리면 물도 소화를 못 시킨다. 그러면 뒤 따라오는 증상이 부정맥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위장을 잘못 달고 태어나면 이런 문제 때문에 생활이 불편하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에는 아주 천천히 먹어야 하는데 회사를 다니거나, 누군가와 만나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면 난처한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수순처럼 회사는 제대 후 잠깐 아르바이트처럼 몇 달 한 것이 고작이고 사람들과의 식사도 줄어들었다. 다행이라면 술자리에서는 그런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술자리는 식사자리보다는 길게 끌고 가니까.


불안은 잠에서 깨어나면 따라붙는다. 잠이 들기 전까지 조금씩 증식하다가 잠이 들면 같이 잠이 드는 것 같다. 어떤 날은 이 깊이도 알 수 없고 고고(높고 오래된)한 불안이 잠이 들어도 따라다닌다. 그러면 어김없이 꿈에서 기이한 형태로 나타난다. 어쩌다가 불안하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러면 왜 불안하지 않지, 하며 그것 때문에 불안하다. 불안해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이 불안이라는 것은 나의 위장장애처럼 평생 같이 달고 가야 할 동반자라고 받아들였다.


어린이 때처럼 하루를 아무 생각 없이 최선을 다해서 보내고 싶은데 내일이 오기 전에 내일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불안해한다. 매일 언론에서는 불안을 감추려고 불안한 뉴스가 나온다. 그 속에 내가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근본적인 불안이 머지된다. 먹고사는 것, 생존과 생계도 불안하다. 오늘 이전까지는 어떻게든 견뎠지만 오늘 이후에는 자신이 없어진다. 불안한 것이다. 이런 불안이 갈비탕을 먹고 남은 미미한 찌꺼기 같은 것이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불안에 떨다가 집으로 들어온 날은 하루가 고되다. 많이 힘들다. 이런 날은 된장국을 끓인다. 된장국은 쉬운 문제다. 된장국만큼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실수로 잘못 끓여도 된장국은 된장국이다. 물에 불려 놓은 시래기와 된장을 넣고 끓이면 된다. 복잡할 게 없다. 냉장고에 먹다 남은 고기가 있기에 그대로 같이 넣어서 끓여버렸다. 된장국에 보이는 기름은 그래서 생겼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처음 했을 때 몸에 파스를 8개씩 붙였다. 몸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내가 한 첫 아르바이트가 냉장고를 나르는 일이었다. 헤헤 거리며 호기롭게 달려들었다가 첫날 하고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온몸이 그야말로 몽둥이로 잘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그래서 파스를 8개 붙이고 나갔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오전 8시까지 가야 했고 허허벌판 곳에서 아주 큰 냉동고 같은 차에서 냉장고를 꺼내서 포터나 개인 자가용이 오면 거기에 싣는 일을 했다. 처음에 알바 구해주는 곳에서 일이 힘드니까 첫날 해보고 힘들면 하지 말라고 했다. 다른 알바 자리도 많으니까 다른 거 구해준다고. 왜냐하면 몸이 다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회사도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하니 당시에 꽤 많은 돈이 바로 들어왔다. 몸은 부서질 것 같으나 돈을 만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형들이 좋았다. 텃새도 없고 그저 옛날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처럼 무척 친하게 지냈다. 냉장고가 무거워서 내가 너무 낑낑거리면 와서 잡아주었다. 그때 분명 일은 고된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으면 그 고됨이 기분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아르바이트는 단발성으로 한 달 정도 하는 일이었다. 그때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벌판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하던 형들과 같이 걸어 나왔다. 그곳에서 버스정류장까지 차로 태워주는데 우리는 그냥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오다 보면 기찻길이 있는데 그곳에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들처럼 그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가 오뎅에 소주를 한잔씩 마셨다. 겨울이었기에 몸이 녹아내리는 그 알싸한 기분을 우리는 만끽했다.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온 몸, 세포 끝까지 퍼지는 느낌이 분명하게 들었다. 그때 확실하게 몸을 움직여서 얻는 고된 기분을 알 수 있었다. 늦은 저녁에 집에 오면 어머니가 된장국을 끓여 주었다. 거기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고 나면 오늘도 해냈다, 같은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된장찌개는 모든 계절에 어울리는데 된장국은 딱 이 계절에 어울리는 것 같다. 아마도 추워지는 날 속에서 늘 된장국을 먹던 추억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게다.


시간에 두드려 맞으며 어느새 훌쩍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 일을 하며 사람들 틈 속에서 부대끼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이토록 살얼음판을 걷고 있을 거라는 걸 알지 못했다. 첫 아르바이트를 할 때처럼 몸이 부서지지는 않지만 마음이 조금씩 깨진다. 파스를 붙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조각난 마음을 꿰맬 수도 없다. 내 인생에서 몸이 고생인 건 군대에서 끝이 났다. 몸이 고된 건 그에 따른 결과가 분명하게 난다. 하지만 마음이 고된 건 그에 딸려오는 결과가 명확하지 않다. 불분명하고 추상적이다. 제각각이며 원인도 모르고 그늘처럼 오래 머문다. 마치 불행과 흡사하다.


마음이 여기저기에 부딪혀 고된 날 집으로 오니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서 사라졌고 더 이상 겨울에 몸을 데워줄 된장국도 없다. 그래서 오늘 된장국을 끓인다. 한 숟가락 떠먹으면 위로 까지는 아니지만 잠시나마 예전을 추억하게 된다. 그 따뜻함과 안온감, 그리고 부드러운 포근함. 지금 호로록 먹는 된장국은 몸이 고될 때 먹던 된장국이 주던 위로에서는 멀어졌다.


라디오에서 나온 말인데 어른이란 때로 어딘가를 갈 때 택시를 탈 때 느낀다. 그래 어른이구나, 그래 어른이라 택시를 탈 수 있어서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어차피 어린이로 돌아갈 수 없고 어른도 아닌 이상한 어른이로 죽 살아야 한다면 도망가지 않는 나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천천히 닳아 없어질 때까지 즐기는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늘 1면으로 실려 안 좋은 소리를 듣고 죄를 짓는 사람들이 주로 어른들일지라도, 조직을 일으키고 단체의 수장도 대체로 어른들이다. 된장을 만들고 시래기를 말리고 하는 것 역시 어른들이 한다. 된장국을 맛있게 먹으며 위로를 받는 것도 어른의 몫이며 누릴 수 있는 약간의 행복도 어른이기에 가능하다.


이미 어른의 세상으로 들어와 버린 지금 하루가 고된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여러 불안과 걱정과 고민 때문에 마음은 고되고 또 고되다. 그럴 때 된장국을 끓인다. 될 수 있으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해 먹자.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음식을. 끓이는 동안 된장국의 냄새가 조금씩 나를 감싸고돈다. 냉기가 흐르던 집 안에 온기가 쌓인다. 된장국은 나에게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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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들이 예전에 비해서 사람들과 공생을 잘하고 있는 거 같아서 보기 좋은 요즘이다. 내가 다니는 길목에(해안도로까지) 고양이 시체가 일주일에 서너 번은 있었는데 이제는 로드킬을 당한 길냥이들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영차영차 노력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늘어난 고양이가 못 마땅한 사람도 있겠지만 고양이가 사람에게 해코지를 먼저 하는 모습은 본 적은 없다.


길바닥에 떠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잘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삶도 길바닥을 떠도는 저 고양이들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매년 이맘때 길냥이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지만 이제 느닷없이 추위가 몰아닥칠 텐데 또 이번 겨울은 어떻게 버티려나,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매일 조깅을 하면서 지나치는 길냥이들이 눈에 자주 들어온다. 길냥이들과의 인연을 한데 모아서 한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참 여러 길냥이들을 스치고 만났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269


고양이들을 원래 쳐다보지 않았는데 한 10년 전에 한 길고양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는 도시락을 열심히 싸다니던 시기였다. 밤에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대리를 불러 집으로 오고 있었다. 한 새벽 2시 정도 되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공기의 밀도가 다르고 새벽의 운치가 가득한 날이었다. 술도 올라서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아파트 단지에 다 와서 대리기사분이 도로에 뭐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차를 운전했다. 그래서 이렇게 보니 도로에 고양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파트 단지 밑의 도로는 2차선이다. 가고 오고. 도로의 양옆으로는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그래서 차들이 새벽에 빨리 달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도 도로 중간에 고양이 몇 마리가 있으니 난감한 일이었다. 차에서 내려 고양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보니 어미 고양이가 죽어 있고 새끼 고양이들이 주위에 모여있었다. 아직 새끼 고양이들은 어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른 채 그저 어미 고양이가 일어나기만을 바라듯이 새끼 고양이들끼리 장난을 치고 있었다.


새끼 고양이들은 네 마리였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만화에서나 볼법한 얼굴과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주차장까지 차를 넣지 말고 근처에 주차를 시켜달라 하고 계산을 했다. 만약 술에 취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어쩌면 그냥 집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 시간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도시락통에서 숟가락을 꺼냈다. 그리고 조깅을 하면서 흘린 땀을 닦느라 들도 다니던 수건도 들고 왔다.


어미 옆으로 가니 아직도 이 어두운 새벽에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새끼들이 옹기종기 모여 낯선 내가 다가가도 어미 옆에 붙어 있었다. 나는 새끼들을 휘휘 저어서 이 위험천만한 도로에서 내 보냈다. 후다다닥 하더니 작은 소리로 ‘왜 그러냐, 인간 놈아’ 같은 말을 하며 주차되어 있는 차들 밑으로 숨었다. 나는 죽은 어미 고양이를 수건으로 돌돌 말아서 들었다. 어미 고양이는 아직 몸이 따뜻했다. 자동차의 바퀴가 그대로 어미의 몸통을 밟고 지나갔는지 입으로 피가 나오고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다. 돌돌만 어미 고양이를 안고 아파트 단지 뒤의 저수지까지 올라갔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고양이는 저수지로 올라갈수록 몸에 남아있던 온도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리고 도시락을 퍼먹던 숟가락으로 저수지에 있는 어떤 멋지게 보이는 나무 밑을 열심히 팠다. 술이 되어서 그런지 숟가락으로 팠는데도 잘 파졌다. 열심히 파다 보니 옷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고양이의 온도는 싸늘해졌다. 그제야 고양이를 묻어줬다. 잘 가라, 네 새끼들은 열심히 살아가겠지, 나 같은 놈도 잘 살아가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날 이후 아파트 근처 고양이들을 보면 그때 그 새끼 고양이가 죽지 않고 이렇게 커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조깅을 하면서 길고양이가 있으면 잠시 멈추어서 보게 되었다. 더운 여름에는 이렇게 더운 날에는 어떻게 더위를 이겨내려나, 추운 날에는 어디에 몸을 욱여넣어서 추위를 견디려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들은 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나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세상은 그런 잘 설명할 수 없는 엔트로피, 무질서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암튼 세상은 온통 신기한 것들과 고리 터분한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 같다.

핼러윈데이에 동네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길냥이에게 핼러윈 텐트를 만들어줌. 어찌 알고 저 안에 들어가서 포즈를 잡고 있다. 고놈 참. 야옹.


담벼락 위의 고양이처럼. 이 녀석은 마치 오브제처럼 저 마시다가 두고 간 음료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다.  무슨 맛일까냥. 내가 매일 핥는 내 사타구니의 맛일까냥.


이제 슬슬 겨울을 준비해야지. 고양이들은 느긋하다. 그러다가도 물수제비처럼 재빠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런 고양이들이 우리 주위, 손 닿을 수 있는 반경 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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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11-08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드킬 당한 고양이를 몇번 길 옆 나무잎들 사이로 옮겨준 적이 있어요.
생명이 빠져나간지 얼마되지 않은듯 손으로 전달되던 그 따스한 체온이 왜 그리 낯설고 어색하던지...

교관 2021-11-09 11:21   좋아요 0 | URL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은 언제나 적응이 어렵고 적응이 안 될 것 같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