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치는 웃기기만 한 것이 아니다. 웃음과 슬픔이 잔인하게 녹아있고 그 속에는 늘 뼈 때리는 언어가 숨어있다. 우리가 주성치를 좋아하고 주성치의 영화를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5세 아이처럼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성치의 영화는 채플린을 관통한다. 웃긴데 참 슬프다. 여린데 악독하고, 호들갑스러운데 냉철하다. 이런 모순이 가득해서 키득키득하며 웃다 보면 어느새 이상하고 또 이상한 이물감 같은 기분에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겨울이 되면 당연하듯이 삐삐를 보는 것처럼 매년 어떤 시기가 되면 서유기 선리기연을 보게 된다. 선리기연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재미있다는 게 몹시, 정말 이상하다

 

주성치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지난 번에 리뷰를 한 '신희극지왕'이었다. 주성치와 장바이즈의 희극지왕, 리부트다. 주성치의 희극지왕을 보면 알겠지만 주성치는 힘들고 인정받지 못한 무명의 시절이 아주 길었다

 

같이 영화에 뛰어든 양조위, 장국영이나 유덕화나 주윤발이나 성룡은 이미 톱클래스에 올라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는데 주성치만 계속 무명이다. 그래서 배역을 얻으러 가면, 그 정도 해서 안 되면 그만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 같은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그 대사는 신희극지왕의 여몽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이 한다

 

여몽은 긴긴 시간 무명배우로 지내면서 괄시와 멸시를 사람들에게 받지만 절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활짝 웃으며 훌훌 털며 일어난다. 이 여몽 역를 한 악정문은 실제로 무명배우였다. 신희극지왕 이전 필모가 전혀 없었다

 

주성치는 자신의 사단이 있음에도 그는 서른 살이 다 된 무명배우 악정문에게 주인공 역을 준다. 실제 주성치가 긴 무명시절의 모습을 악정문에게서 본 것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악정문은 여몽의 배역을 정말 잘 소화해낸다. 웃기면서 처절하고 슬픈데 밉지 않고 독하게 매달리는데 잘 안되는, 그래서 신희극지왕을 보면 주성치가 주인공이었던 영화처럼 키득키득 거리다가 어어? 하면서 쿡 울게 된다

 

여몽만 무명이 아니다. 여몽의 돈을 등쳐먹었던 남자친구 역시 무명이었는데 배역을 주성치가 주었고, 갑부로 나와서 여몽과 함께 주성치의 희극지왕을 패러디했던 여몽의 친구인 이양역시 무명으로 신희극지왕 이전에 필모가 전혀 없다. 그리고 여몽의 부모님 역시 95년 이후 배역이 없었다가 신희극지왕에 캐스팅이 되었다

 

주성치는 주성치 사단이 있음에도 무명 배우들에게 주역을 맡겼다는 이유로 신희극지왕을 촬영할 당시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주성치가 무명배우에게 주인공을 맡겼다며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기도 했다

 

슬프면서 웃기고 황당하면서 이해되고 의자는 앉는 것이 아니라 던지라고 있는 것이며 비극인데 희망적인 주성치 영화를 앞으로 몇 편 볼 수 있을까. 마치 하루키가 유산을 기증한다고 하니 이제 하루키 장편 소설을 한 편 정도 더 보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에 조금은 슬픈 것 같은 감정이 든다

 

심사관에서 매염방은 정말 코믹하게 나오는데 매염방도 일찍 세상을 떴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어제 100분 토론이 훨씬 재미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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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면은 수위가 있어 삭제했음요

 

 

 

 

 

시리즈 카니발 로우는 아마존의 판타지 드라마인데 주연은 올랜드 블룸과 카라 델레바인이다. 이 영화도 영국의 4개 대륙을 7개인가로 나뉘어 서로 잡아먹으려는 권력과 야망에 관한 이야기였던 왕좌의 게임처럼, 영국의 산업혁명 시대를 요정과 인간 외의 종족들의 모습이 판타지로 결함되면서 인간의 세계에 같이 살아가는 요정인 페이 종족과 늑대인간 같은 종족들이 서로 얽히면서 공화국과 연합의 전쟁이 치러지고 그 사이에서 주인공인 라이크로프트 필로스트레이드트(에이 이름 씨앙)과 비녯(짧은 이름인데도 씨앙)의 판타지 사랑이 섞인 이야기다

 

볼거리가 많고 요정이 나오고 늑대인간이 출몰하고 현대의 배경에서 완전히 벗어난 판타지라 아이들이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몹시 잔인하고 몹시 야하고 몹시 난잡한 인간 세계를 보여준다. 캡처는 첫 사진 이후 몽땅 미성년불가사진이다. 비녯은 인간과 섹스를 할 때에는 날개에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크로프트와 섹스를 할 때 날개가 빛난다. 그 이유는 보면 알 수 있다. 이 장면에서도 뭔가 야하다는 느낌보다는 아주 신비로웠다. 그간 많은 영화에서 날개를 단 여자들이 섹스를 해왔지만 아름답고 신비롭게 보이는 장면은 드물었다고 생각한다

 

델레바인이 날개를 달고 공중을 날아가는 장면은 매 회 봐도 환상적이다. 슈퍼맨처럼 공중부유를 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신에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면 아마도 비녯처럼 날아가지 싶다. 슈퍼맨처럼 비행을 하기가 인간의 신체 상 좀 무리다. 델레바인은 영국의 모델이라 길죽길죽하다. 2017년 지미추 광고를 할 당시 델레바인은 사람들에게 쌍욕을 들어 먹었다

 

그 광고를 보면 지미추의 주 무기인 힐을 광고하는 것인데 남자들이 캣콜링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고 해서 델레바인은 욕을 들어 먹었다. 델레바인은 당시 누구더라? 하? 하? 거물 프로듀서인 하 머시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백을 했는데 광고에서 캣콜링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델레바인은 영국인처럼 생겼다. 눈매가 푹 꺼져 들어가고 깡마르고 키는 길죽길죽한 것이 라라 플린보일이나 앰버하드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카라 델레바인의 언니도 배우이자 모델인데 키도 더 크고 더 길죽길죽한데, 킹스맨 골드서클에서 가장 늘씬하고 제일 섹시하게 나온 여자를 떠올리면 알게 된다. 델레바인 이 집안이 참 금수저 집안으로 유명하다. 언니인 포피 델레바인은 이미 유명백화점(라고 하니 좀 재밌네)의 퍼스널 쇼퍼 디렉터이고 아버지가 부동산 개발업자로 돈이 많데. 증조부는 정치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기레기들처럼 이들의 가장 최근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곳이 인스타그램이기에 외국도 이들의 인스타그램에 사진 하나가 올라오기를 늘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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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공부를 포기해버린 것이 이른 시기인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수학처럼 계산을 해야 하는 과목은 꽝이었다. 그렇다고 국어나 영어가 점수가 잘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미술처럼 손으로 그리고 만드는 것만 점수가 잘 나왔다. 하지만 미술 시간은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로 구색 맞추기 시간이었다. 미술 선생님도 술렁술렁 대충대충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군대에서 겨울 동안 훈련에서 열외하여 크리스마스카드 병으로 차출되어 죽어라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 팔았다.

 

 

화학이나 자연과학 시간에는 줄곧 음악을 들었다. 창가에 앉아 이어폰을 왼쪽 귀에 꽂고 왼팔로 귀를 괸 채 열렬하게 귓구멍으로 음악을 흡수했다. 가요보다는 팝을 주로 들었는데 가요를 들으면 가사에 심취해서 멍하게 창밖을 보다가 선생님에게 걸릴 염려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팝을 늘 들었다. 닥치는 대로 팝을 들었다. 가난할 대로 가난한 집이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듣고 싶은 음반은 나무라지 않고 사주었다.

 

 

손을 놓아버린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음악을 듣고 나면 찝찝한데 후련했다. 체기는 빠졌지만 잔존하는 미미한 이물감이 느껴지는 기분을 가지고 집으로 와서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왔다고 했다. 아마 그때부터 본격적인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역시 그 덕분인지 허구로 점철된 소설도 가끔 영차영차 하며 적는지도 모른다. 하루키를 접하게 된 건 어쩌면 몹시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무슨 책을 어디서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먼지처럼 보내던 나에게 하루키의 소설은 매일 먹는 밥처럼 야금야금 들어왔다.

 

 

며칠 전 하루키의 기사가 대대적으로 났다. 하루키는 자신의 유산을 모교인 와세다 대학에 몽땅 기증을 한다는 것이다. 먼저든 생각은 멋있다,였다. 에세이를 통해서 공부만 바라보는 일본 사회와 배울 것이 없다는, 일본 축소판인 와세다 대학을 깎아내리면서도 실은 마음 깊은 곳에는 애정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필시 하루키는 자신처럼 범우주적이고 현실에서 약간 비켜가 있는 학생들에게 지식의 채집보다는 감정의 터득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의 유보로 자신의 유산이 학생들에게 골고루 전달되리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멋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시무룩해졌다. 유산기증, 같은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이제 하루키도 소설을 고작 한 두편 정도 집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3년도에 몇 년 만에 장편소설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출판되었을 때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은 들썩였다. 다자키의 이야기가 나오기 이전에는 하루키는 없는데 하루키에 관한 책들이 쏟아졌었다. 하루키를 좋아하세요? 같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패러디와 사람들은 카페의 구석진 곳에서 하루키를 논하고 출판사에서는 하루키가 없는 하루키에 대한 책들이 출간되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그의 소설을 이야기했다.

 

 

다자키 이야기는 일본에서 1주일 만에 100만 부가 팔렸고 발간된 4월 12일 도쿄 시부야 구에 있는 서점 다이칸야마 쓰타야에서는 그날 자정에 카운트다운 행사까지 열었다. 내용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 주문이 50만 부나 되었다. 소설 속에 흐르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 음반까지 덩달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에 그럼 하루키만 한, 하루키만큼 좋아했던 소설가는 없었을까.

 

 

실은 무라카미 류도 있고,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도 한국이 좋아하는 작가들이었다. 하지만 왜 그런 지 13년, 그 즈음을 기점으로, 아니 조금 더 이전부터 신드롬의 주인공은 오직 하루키였다. 지금 현재 하루키를 제외한 신드롬을 일으키는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한국에는 하루키 이전의 신드롬을 밀란 쿤데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사랑은 운명이라 믿는 테레자와 사랑은 그저 우연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토마시와 그 사이에 매력적인 사비나와 찌질한 남자 같은 프란츠는 지구에 있는 인간 유형을 전부 드러냈다. 사람들은 밀란 쿤데라의 3인칭 같은 1인칭적이며 작가의 화법이 등장하는 등, 소설의 작법을 이렇게 와그작 무너트린 그를 몹시 좋아했다. 그 자리를 조용히 비집고 하루키가 들어왔다.

 

 

사회운동의 시대가 저문 9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하루키 붐이 불기 시작했다. 시대, 사회를 말하는 한국 소설보다 말보로와 싱글 몰트 위스키의 하루키는 그야말로 매혹적이었다. 밀란 쿤데라를 읽으려면 니체의 영원회귀와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알아야 했지만 하루키는 비틀즈, 레이먼드 카버 등 20세기의 것들로도 충분했다. 야나첵과 베토벤, 리스트가 등장하지만 음악을 철학적으로 연결 짓는 어리석은 짓을 하루키는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망가지지 않고 작가의 본분은 반복된 루틴이라는 명제하에 철저하게 정돈되고 질서를 유지한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했고 사람들에게 하루키는 매혹을 넘어 신드롬이었다.

 

 

신드롬이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신형철은 하루키는 한국에서 문화적 현상에 한정해 하루키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효가 다 되었다고 말했다. 진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는데 요컨대 눈과 손이 가지 않음에도 이 신드롬 때문에, 모두가 읽으니까 할 수 없이 읽으며 감정을 소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영화 ‘조커’와도 비슷하다. 조커처럼 우울하고 폭력적인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칭찬 일색인 이 영화를 봐야 인스타그램에 인증 사진을 올릴 수가 있는 것이고 사람들과 한 마디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하나레이 베이 속 사치는 아들을 잃고 그곳에서 텅 비어버린 공백에 대해서 생각한다. 하루키의 대부분 소설에서 주인공은 누군가를 잃는다. 나오코를 잃고, 키키를 잃고, 쥐를 잃고, 연상의 그녀를 잃고, 다자키는 친구들을 잃고, 엄마와 누나를 잃은 다무라 카프카 녀석, 멘시키는 아내를 잃고, 에이코를 잃은 토니타키는 생각한다, 들어온 만큼 뺐는데 원래의 구멍은 이전보다 더 커져 있다고. 그간 소설 속에 등장한 주인공은 왜 그런지 읽고 있는 독자의 이야기 같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우리가 보통 느끼는 상실에 대해서 여기저기에 이야기해 놓음으로써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텅 비어버린 이상한 공백과 공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건 돈이나 명예가 아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밝지만 우울한 미도리, 묘한 매력의 오시마와 사에키, 다자키의 사라, 스미레, 아오마메와 덴고, 아키가와 마리에 등 사람으로 인해 생겨버린 공백은 사람이로 메꿔야 한다고 절실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소설 속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흔들림 없는 진실보다는 오히려 흔들리는 가능성을 선택하는 게 옳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정작 하고 싶었던 영화 ‘하나레이 베이’ 이야기는 못 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주인공 사치처럼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 화면 속 사치를 따라서 가다보면 사치의 결락을 느끼게 되어서 울컥하다가 동시에 위로를 받는다. 슬픔이란 파도 같은 것이다. 준비되지 않는 모성으로 아들을 키우다 결국 아들을 잃어버린 상실을 깨달았을 때의 사치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하루키를 좋아한다면 한 번 보는 것도 좋다. 하루키의 소설이 영화가 몇 편 안 된 줄 알았는데, 2004년 토니 타키타니를 시작으로 2007년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로버트 로게발’, 2008년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대해-톰 플린트’, 2010년에는 ‘빵가게 재습격-카를로스 쿠아론’이 영화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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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와 엘리의 이야기는 유일하게 원작과 영화와 리메이크 영화가 모두 성공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엘리는 오스카에게 잠시만 내가 되어 달라고 한다. 상대방이 한 번 되어 보라고 한다. 엘리는 생존을 위해서 인간을 죽여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몇백 년 전부터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존과도 무관한데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한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사람은 단지 뱀이니까, 바퀴벌레니까, 그들이 인간에게 어떤 유해한 것들을 퍼트리는지 생각하기 전에 그게 바로 너 니까, 너의 모습이니까 공격을 한다

 

눈을 가리고 코끼리를 만져보게 하면 어떤 사람은 다리만 만지고 거대한 벽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코를 만지고 큰 뱀이라고 한다. 코끼리를 코끼리로 인식하지 않고 분리하여 판단을 하는 게 우리, 인간이다

 

아이가 친구들도 다 떠난 놀이터에서 혼자 신나게 놀고 있다. 혼자지만 아이는 따분해하지 않고 지루한 표정도 없다. 아이가 혼자서 놀다가 생각났다는 듯 벤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엄마가 벤치에 앉아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봐주는 한 사람만 있다면 버틸 수 있다. 눈물이 여러 날 나겠지만 그 한 사람 덕분에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다. 존버. 존나게 버티면 어떻든 주저 안지 않을 수 있다

 

예전에 쉬웠던 버티는 것이 요즘은 쉽지 않다. 은호의 말처럼 일상은 고요한 물과도 같이 지루하지만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우리는 일상을 그리워하며 그 변화에 허덕인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약하여서 어느 날 문득 장난감처럼 망가지기도 한다. 버티는 것에 틈이 보이면 절망은 어김없이 틈으로 침투한다. 매일이 고난이고 힘듦의 연속이기에 버티는 것이 예전 같지 않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를 바라봐 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힘든 하루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삶에서 누군가가 사라지다니 끔찍하지 않니. 어느 영화에서 대사였다. 모두에게서 외면당했다고 깊게 느껴지면 버티는 것이 어렵다. 버틸 수 없는 내일을 맞이하는 게 두렵고 겁이 난다. 그렇게 목숨을 끊어버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한 번 웃음을 짓기 위해 무엇인가를 걸레 짜듯 짜내야 했을 것이다. 더 이상 쥐어짜낼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하얀 세상을 만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낮과 밤이 하얀 세상으로 불멸하는 세계 속으로 말이다

 

심심하다는 말은 생활이 안전하다는 말이다. 심심하다는 건 무료하다는 것이고 무료하다 이런 느낌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심심한 것은 테러블 한 것에 집어넣는다. 그 말은 생활이 안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건 어쩌면 하루를 버티기 위해 사력을 다해 애쓰고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엘리가 버틸 수 있는 건 자신을 바라봐 주는 오스카 덕분이다. 좋아하는 오스카가 바라보기 때문에 어떻게든 하루를 견디고 있다. 원작이 나오고 시간이 엄청 흐른 후 작가는 엘리가 오스카도 뱀파이어로 만들어서 불멸하는 결말로 마무리를 지었다고 한다

 

원작의 본문 중에 - 엘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손가락을 눈꺼풀에 대고 누른다. 몸으로 느껴지는 근심처럼 엄습해오는 여명. 그는 속삭인다. “하느님, 하느님? 전 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거죠? 왜 저는...” 전부터 수없이 거듭해왔다. 이 질문을. 왜 저는 안 되는 건가요? 왜냐면 넌 죽어야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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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이라는 우울하고 불행한 모험이 지속되는 가운데 서도 그 불행을 잊게 만드는 행복 덩어리 써니의 활약을 보자. 써니는 일종의 전사, 우리 쪽의 비밀병기로 시즌 1의 갓난아기에서 벗어난 써니는 시즌 2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3에서는 3남매 중 가장 활약을 많이 한다는 느낌을 준다. 잠깐 볼까

 

운전을 하지 못하는 언니와 오빠를 위해 대형 트럭을 운전해서 올라프의 소굴에서 탈출한다. 저 작은 손으로 기어를 넣고(게다가 수동기어다) 클러치도 밟고 붕 5단으로 밟을 때 써니의 표정을 보라. 불행의 연속이지만 잊게 만든다

 

 

다음 장면은 써니가 꼬마 늑대 인간 차보로 변신했을 때다. 악의 무리들이 언니 오빠를 괴롭히려 할 때 써니가 차보로 변해 캬악 하며 덤벼드는데,,, 정말 너무 귀엽다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에 나오는 남자들은 알라딘에 나오는 남자들처럼 대체로 바보거나 덜 떨어지거나 멍청하다. 올라프를 비롯해서 그의 졸병들도, 은행가인 포, 에피소드에 나오는 남자들은 전부 멍청하게 나온다. 대신에 여자들과 아이들은 현명하고 용감하다. 우리나라 규방문화와도 흡사하다

 

이 영화에 나오는 바보 같은 악당들은 파시스트의 모습을 많이 보인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다오.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괴벨스의 이 파시스트적인 논리를 올라프가 보들레오 아이들의 재산을 뺏기 위해 매 회 에피소드마다 펼친다. 올라프의 파시즘에 착하고 정의롭지만 멍청한 어른들이 거기에 휩쓸린다. 그래서 아이들을 화형에 처하려고 하거나 사자 우리에 던지려고도 한다. 거짓 뉴스에 속아서 마녀사냥에 동참한다

 

파시즘에 젖은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웅크리고 앉아 신나게 사람을 죽인다. 늘 웃고 있어서 몰랐던 속은 썩어 문드러져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만들고,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을 앞에 두고 한숨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은 불면을 불러들이고 조그만 화면 속에서는 아직도 죽은 사람을 씹어대고 있다. 이 모든 게 한 문장에서 시작을 한다 그들은 변질된 공공성으로 그것이 마치 최고의 선이자 앎의 최선이라 여기고 한 문장으로 시작된 사람 죽이기는 무서울 정도로 꽃을 피운다

 

위험한 대결에서 저쪽 편이 힘을 가질 때는 우리 편은 속수무책으로 억울하게 당하거나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다. 반면에 우리가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저쪽 편은 정의를 부르짖으며 당당하게 그릇됨을 주장하고, 힘을 가진 우리 편은 저쪽 편의 부당함을 처리할 만큼 힘을 내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방법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편은 힘을 가지던, 힘을 가지지 못하던 늘 당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파시즘에 순수함으로 방어를 하는 사람이 바로 막내인 써니다. 시즌 3에서 써니는 본격적으로 적의 소굴에 남아서 스파이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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