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공부를 포기해버린 것이 이른 시기인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수학처럼 계산을 해야 하는 과목은 꽝이었다. 그렇다고 국어나 영어가 점수가 잘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미술처럼 손으로 그리고 만드는 것만 점수가 잘 나왔다. 하지만 미술 시간은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로 구색 맞추기 시간이었다. 미술 선생님도 술렁술렁 대충대충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군대에서 겨울 동안 훈련에서 열외하여 크리스마스카드 병으로 차출되어 죽어라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 팔았다.

 

 

화학이나 자연과학 시간에는 줄곧 음악을 들었다. 창가에 앉아 이어폰을 왼쪽 귀에 꽂고 왼팔로 귀를 괸 채 열렬하게 귓구멍으로 음악을 흡수했다. 가요보다는 팝을 주로 들었는데 가요를 들으면 가사에 심취해서 멍하게 창밖을 보다가 선생님에게 걸릴 염려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팝을 늘 들었다. 닥치는 대로 팝을 들었다. 가난할 대로 가난한 집이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듣고 싶은 음반은 나무라지 않고 사주었다.

 

 

손을 놓아버린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음악을 듣고 나면 찝찝한데 후련했다. 체기는 빠졌지만 잔존하는 미미한 이물감이 느껴지는 기분을 가지고 집으로 와서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왔다고 했다. 아마 그때부터 본격적인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역시 그 덕분인지 허구로 점철된 소설도 가끔 영차영차 하며 적는지도 모른다. 하루키를 접하게 된 건 어쩌면 몹시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무슨 책을 어디서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먼지처럼 보내던 나에게 하루키의 소설은 매일 먹는 밥처럼 야금야금 들어왔다.

 

 

며칠 전 하루키의 기사가 대대적으로 났다. 하루키는 자신의 유산을 모교인 와세다 대학에 몽땅 기증을 한다는 것이다. 먼저든 생각은 멋있다,였다. 에세이를 통해서 공부만 바라보는 일본 사회와 배울 것이 없다는, 일본 축소판인 와세다 대학을 깎아내리면서도 실은 마음 깊은 곳에는 애정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필시 하루키는 자신처럼 범우주적이고 현실에서 약간 비켜가 있는 학생들에게 지식의 채집보다는 감정의 터득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의 유보로 자신의 유산이 학생들에게 골고루 전달되리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멋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시무룩해졌다. 유산기증, 같은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이제 하루키도 소설을 고작 한 두편 정도 집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3년도에 몇 년 만에 장편소설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출판되었을 때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은 들썩였다. 다자키의 이야기가 나오기 이전에는 하루키는 없는데 하루키에 관한 책들이 쏟아졌었다. 하루키를 좋아하세요? 같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패러디와 사람들은 카페의 구석진 곳에서 하루키를 논하고 출판사에서는 하루키가 없는 하루키에 대한 책들이 출간되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그의 소설을 이야기했다.

 

 

다자키 이야기는 일본에서 1주일 만에 100만 부가 팔렸고 발간된 4월 12일 도쿄 시부야 구에 있는 서점 다이칸야마 쓰타야에서는 그날 자정에 카운트다운 행사까지 열었다. 내용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 주문이 50만 부나 되었다. 소설 속에 흐르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 음반까지 덩달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에 그럼 하루키만 한, 하루키만큼 좋아했던 소설가는 없었을까.

 

 

실은 무라카미 류도 있고,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도 한국이 좋아하는 작가들이었다. 하지만 왜 그런 지 13년, 그 즈음을 기점으로, 아니 조금 더 이전부터 신드롬의 주인공은 오직 하루키였다. 지금 현재 하루키를 제외한 신드롬을 일으키는 작가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한국에는 하루키 이전의 신드롬을 밀란 쿤데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사랑은 운명이라 믿는 테레자와 사랑은 그저 우연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토마시와 그 사이에 매력적인 사비나와 찌질한 남자 같은 프란츠는 지구에 있는 인간 유형을 전부 드러냈다. 사람들은 밀란 쿤데라의 3인칭 같은 1인칭적이며 작가의 화법이 등장하는 등, 소설의 작법을 이렇게 와그작 무너트린 그를 몹시 좋아했다. 그 자리를 조용히 비집고 하루키가 들어왔다.

 

 

사회운동의 시대가 저문 9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하루키 붐이 불기 시작했다. 시대, 사회를 말하는 한국 소설보다 말보로와 싱글 몰트 위스키의 하루키는 그야말로 매혹적이었다. 밀란 쿤데라를 읽으려면 니체의 영원회귀와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알아야 했지만 하루키는 비틀즈, 레이먼드 카버 등 20세기의 것들로도 충분했다. 야나첵과 베토벤, 리스트가 등장하지만 음악을 철학적으로 연결 짓는 어리석은 짓을 하루키는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망가지지 않고 작가의 본분은 반복된 루틴이라는 명제하에 철저하게 정돈되고 질서를 유지한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했고 사람들에게 하루키는 매혹을 넘어 신드롬이었다.

 

 

신드롬이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신형철은 하루키는 한국에서 문화적 현상에 한정해 하루키를 바라보는 관점은 시효가 다 되었다고 말했다. 진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는데 요컨대 눈과 손이 가지 않음에도 이 신드롬 때문에, 모두가 읽으니까 할 수 없이 읽으며 감정을 소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영화 ‘조커’와도 비슷하다. 조커처럼 우울하고 폭력적인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칭찬 일색인 이 영화를 봐야 인스타그램에 인증 사진을 올릴 수가 있는 것이고 사람들과 한 마디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하나레이 베이 속 사치는 아들을 잃고 그곳에서 텅 비어버린 공백에 대해서 생각한다. 하루키의 대부분 소설에서 주인공은 누군가를 잃는다. 나오코를 잃고, 키키를 잃고, 쥐를 잃고, 연상의 그녀를 잃고, 다자키는 친구들을 잃고, 엄마와 누나를 잃은 다무라 카프카 녀석, 멘시키는 아내를 잃고, 에이코를 잃은 토니타키는 생각한다, 들어온 만큼 뺐는데 원래의 구멍은 이전보다 더 커져 있다고. 그간 소설 속에 등장한 주인공은 왜 그런지 읽고 있는 독자의 이야기 같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우리가 보통 느끼는 상실에 대해서 여기저기에 이야기해 놓음으로써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텅 비어버린 이상한 공백과 공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건 돈이나 명예가 아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밝지만 우울한 미도리, 묘한 매력의 오시마와 사에키, 다자키의 사라, 스미레, 아오마메와 덴고, 아키가와 마리에 등 사람으로 인해 생겨버린 공백은 사람이로 메꿔야 한다고 절실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소설 속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흔들림 없는 진실보다는 오히려 흔들리는 가능성을 선택하는 게 옳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정작 하고 싶었던 영화 ‘하나레이 베이’ 이야기는 못 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주인공 사치처럼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 화면 속 사치를 따라서 가다보면 사치의 결락을 느끼게 되어서 울컥하다가 동시에 위로를 받는다. 슬픔이란 파도 같은 것이다. 준비되지 않는 모성으로 아들을 키우다 결국 아들을 잃어버린 상실을 깨달았을 때의 사치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하루키를 좋아한다면 한 번 보는 것도 좋다. 하루키의 소설이 영화가 몇 편 안 된 줄 알았는데, 2004년 토니 타키타니를 시작으로 2007년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로버트 로게발’, 2008년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대해-톰 플린트’, 2010년에는 ‘빵가게 재습격-카를로스 쿠아론’이 영화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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